등록 : 2019.05.28 15:11
수정 : 2019.05.28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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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설립 50주년 및 공공기록물법 제정 2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 의거일 다음 날인 1909년 10월 27일부터 1910년 4월 21일까지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 극동지역 신문이 보도한 안 의사 관련 기사 24건을 공개했다. 사진은 28일 경기도 성남시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에서 관계자들이 공개된 신문 기사를 정리하는 모습. 2019.5.28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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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안 의사 의거 다룬 러' 극동지역 신문기사 24점 공개
안 의사 "나는 조국 해방의 첫번째 선구자"…체포과정·신문 진술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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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설립 50주년 및 공공기록물법 제정 2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 의거일 다음 날인 1909년 10월 27일부터 1910년 4월 21일까지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 극동지역 신문이 보도한 안 의사 관련 기사 24건을 공개했다. 사진은 28일 경기도 성남시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에서 관계자들이 공개된 신문 기사를 정리하는 모습. 2019.5.28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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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순국 후 교도소 인근 지역의 '기독교 묘지'에 묻혔다고 보도한 러시아 신문기사가 발굴·공개됐다. 그동안 중국 뤼순(旅順) 감옥 묘지 등으로 추정됐던 안 의사 유해 매장 장소에 대해 '기독교 묘지'라고 언급한 자료가 처음 나오면서 향후 유해 발굴 작업에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등 극동 지역 일간신문들이 보도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 관련 기사 24건을 발굴해 28일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기사들은 하얼빈 의거 다음 날인 1909년 10월27일부터 1910년 4월21일까지 보도된 것으로 안 의사의 의거와 체포, 재판과정, 사형집행, 매장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국가기록원 해외수집팀은 2015년 해당 지역 독립운동과 한인동포 관련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이들 기사를 모은 뒤 번역과 내용 확인 등 과정을 거쳐 공개했다.
그간 학계 연구자나 단체에서 안중근 의사 의거와 관련한 러시아 신문기사를 단편적으로 소개한 적은 있지만 여러 신문기사를 망라해 수집·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공개된 신문기사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내용은 안 의사의 사형집행 과정과 유해가 묻힌 곳을 언급한 '우수리스카야 아크라이나'지의 1910년 4월 21일 자 보도다. 이 신문은 해외소식란에서 "아사히 신문의 특파원에 따르면 안(안중근 의사)은 예정된 시간에 사형장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는 사촌 형이 보낸 흰색 명주 한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약간 창백했으나 자신의 운명에 완전히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사형 집행 후 유해가 옮겨진 과정에 대해서는 "(안중근의 유해는) 관에 넣어져 감옥의 작은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암살에 가담한 3명의 동료에게 안과 이별하는 것이 허락됐다…이후 관은 지역 기독교 묘지로 옮겨졌다"고 적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으로 압송돼 1910년 3월 26일 그곳에서 사형됐다. 일본 외무성이 소장한 사형보고서와 일본·중국 매체 보도는 안 의사 유해가 감옥묘지에 매장됐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현지에 파견된 일본 아사히 신문 특파원을 인용해 '기독교 묘지'라고 보도한 내용이 새로 발굴되면서 매장 후보 지역에 대해 추가 조사가 이뤄질 필요성도 제기됐다. 김형국 국가기록원 연구협력과장은 "당시 아사히신문 특파원이 러시아 극동지역에 파견돼있던 것은 사실"이라며 "같은 시기 일본 내 아사히신문 보도는 안 의사 매장장소를 '감옥묘지'라고 보도했는데 러시아 신문과의 차이가 단순 오류인지 아니면 실제로 다른 묘지에 안 의사가 묻힌 것인지 추가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된 기사에는 일제의 신문과 사형집행에 이르는 과정에서 시종일관 당당하고 의연한 태도를 보인 안중근 의사의 모습과 체포 초기 발언 내용도 생생하게 담겼다. '프리 아무리예'지는 1909년 11월2일자 보도를 통해 안 의사 일행의 의거 준비부터 체포과정과 결행 등을 르포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차이자거우 우편열차 정거장에서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이 내리는 것부터 다음 날 아침 안 의사가 하얼빈으로 떠날 때 큰절을 하면서 눈물로 작별인사를 하는 모습을 상세하게 그렸다.
일본 총영사관 측 관계자 앞에서 이뤄진 첫 번째 신문 내용도 상세하게 기술했다. '프리 아무리예'지는 안 의사가 자신을 "'조선에 징벌적 행위를 한 이토 히로부미에게 복수하기 위해 선발된 29명 중 한명'이라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안 의사는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의 이성과 심장은 조국에서 그들(일제)에 의해 병을 얻었다…죽으면서 나는 기쁘다…나는 조국 해방을 위해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또 다른 러시아 극동지역 신문인 '보스토치나야 자랴'도 1909년 11월4일자에서 "이토 사살은 우리 조국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며, 아직 살아있는 것이 기쁘다. 나의 유골에 자유가 비출 것이다"라고 말한 안 의사의 신문 진술을 그대로 실었다.
사형선고 당시 상황을 담은 기사도 있었다. '프리 아무리예'는 1910년 2월 27일자에 '재팬 위클리 메일' 보도 번역기사를 통해 안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된 전날 재판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안은 1시간에 걸쳐 모든 조선인이 이토를 혐오하고 민족의 원수인 그를 하루빨리 무대에서 몰아내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모든 사람이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 같았다…그는 평상시처럼 먹고 잠을 잤으며 처음부터 마음을 굳게 먹고 참여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어머니는 가치 있게 죽음을 맞이하라는 마지막 인사말을 전했다." 국가기록원은 이처럼 안중근 의사를 일제에 저항하는 영웅으로 그리는 러시아 신문 보도에서 안 의사 의거에 대한 러시아 안팎의 높은 관심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소연 국가기록원장은 "이번에 공개하는 기사는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대한 러시아의 인식뿐만 아니라 의거 준비, 체포와 일본 영사관 인계과정 등 사후 조치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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