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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08 14:30 수정 : 2018.10.08 23:52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쿠투팔롱 난민캠프. 간이 숙소가 끝도 없이 지어져 있다.

[르포] 콕스바자르 로힝야 난민캠프
미얀마 정부군 로힝야족 인종청소 시작한 지 400여일
이동의 자유·교육·건강권 없는데도 씩씩한 어린이들
‘귀환 약속’에도 난민캠프 인원은 120만명까지 늘어
유니세프 “마땅한 권리 누릴 수 있도록” 도움 호소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쿠투팔롱 난민캠프. 간이 숙소가 끝도 없이 지어져 있다.
방글라데시 남동부 콕스바자르 쿠투팔롱 난민캠프에 사는 로힝야족 소녀 아라파의 선생님은 친구 샤캇이다. 고향인 미얀마 라카인주에서 정부군의 총격을 받고 다리를 절게 된 아라파는 캠프 안에 마련된 학습센터에 가지 못하는 날이 종종 있다. 그때마다 샤캇은 오전과 저녁 기도시간이 끝난 뒤 아라파를 찾아온다. 함께 미얀마어를 노트에 적고 따라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아라파는 콕스바자르에 사는 난민 120만명 중 절반 이상인 17살 이하 어린이·청소년들 중 한명이다. 이들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는 교육이다. 방글라데시 정부의 철저한 통제를 받는 난민캠프에선 영어와 미얀마어 교육이 가능하지만, 원칙적으로 방글라데시 언어인 벵골어 교육은 허락되지 않는다. 합의된 교육 과정이 없고, 교실은 언제나 가득 차 있으며, 기초 교구도 부족하다.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쿠투팔롱 난민캠프의 모습.
지난 5일 찾은 쿠투팔롱 난민캠프에는 대나무와 방수포로 지어진 간이 숙소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사이를 뛰노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의외로 씩씩했다. 이동의 자유, 건강과 교육 같은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지만,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모습은 여느 또래 어린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모든 난민캠프 사람들은 흙 위에 조악하게 세워진 ‘대나무 천막집’에서 산다. 공용화장실을 이용하고, 흙더미로 계단을 빚어 아랫집과 윗집을 오간다. 캠프 안 간이 상점에서 사탕을 고르는 어린이들의 눈망울이 빛났다. 좌판을 깔고 씨앗을 사고파는 이들, 깨끗이 다듬은 채소를 늘어놓은 이들의 표정도 어둡지 않다. 똑같이 해가 뜨고 진다. 어린이들이 자란다.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서 만난 로힝야족 소년들.
쿠투팔롱 난민캠프는 세계에서 가장 긴 모래 해변과 마주 보고 있다.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와 나프강을 사이에 둔 접경 지역 콕스바자르는 120㎞ 길이의 고운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휴양도시였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의 마을이다.

지난해 8월 로힝야족으로 구성된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이 동족에 대한 핍박을 견디다 못해 경찰 초소를 습격하자 미얀마 군부는 소탕작전에 돌입했다. 집을 불태우고 저항하는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고문하면서 인종청소 수준의 대학살이 벌어졌다. 그로 인해 최소 9000명이 사망했다. 집단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은 올해 초 난민캠프에서 잇따라 아이를 낳았다. 부모를 잃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어린이가 최소 6000명으로 추산된다.

로힝야족 사태는 지난 몇 년을 되짚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로힝야족은 수십년간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어느 쪽에서도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인구의 90% 이상이 불교도인 미얀마에서 정부는 1978년 이슬람교도 반군을 토벌하겠다며 ‘킹 드래건’ 작전을 펼쳤다. 이슬람교도인 로힝야족은 방글라데시로 피란했다. 1982년 미얀마에서 새 시민법이 통과된 뒤엔 1948년 이전부터 미얀마에 거주했고 미얀마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음을 서류로 증명하는 이에게만 신분증을 발급해줬다. 미처 서류 작업을 하지 못한 로힝야족은 무국적이 됐다. 로힝야족 일부는 그 뒤 콕스바자르 일대에서 수십년에 걸쳐 난민 생활을 했다.

지난해 8월 말 이후 미얀마군의 인종청소가 자행되며 로힝야족 난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공포에 질린 70만여명이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밀려왔다. 남편의 주검을 메고 사흘 길을 열흘에 걸쳐 들어온 여성도 있다. 방글라데시 정부와 국제기구, 구호단체는 부랴부랴 캠프를 늘려갔다. 쿠투팔롱, 발루칼리, 팔롱칼리, 타잉칼리가 천막집으로 뒤덮였다. 미얀마 정부와 방글라데시 정부가 난민 송환에 합의한 지 1년이 다 돼가지만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라카인주에선 국경을 넘어오는 로힝야족의 발길이 이어진다.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서 만난 여성 조미와.
120만명의 난민을 돌보기 위해 일하는 구호기구 활동가만 2000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이 열악한 탓에 원조 물품이 제때 도달하지 못한다. 교통체증이 일상인 방글라데시에선 콕스바자르공항부터 캠프까지 30여㎞ 구간을 이동하는 데 비가 올 땐 3시간이 족히 걸린다. 포장이 안 된 울퉁불퉁 튀어나온 진흙 도로를 내달리는 자동차에 앉아 있는 것은 고행과 다름없다.

난민캠프에서 만난 여성 조미와는 “15일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캠프까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며 “돌아가고 싶지만, 이런 (두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갈 수 있겠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쏟아졌다가 개기를 반복하던 우기는 이제 끝날 때가 됐다. 난민들은 쨍한 햇볕이 계속되는 날을 기다린다.

유니세프 콕스바자르 대변인 앨러스터 로슨 탱크리드가 5일 질문에 답하고 있다.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콕스바자르 대변인 앨러스터 로슨 탱크리드는 가장 필요한 것은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이라고 강조했다. 로힝야 공동체가 다시 ‘정상 사회’로 나가 살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바탕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탱크리드는 또 “난민들은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들이 마땅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방글라데시와 미얀마의 결단과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호소했다.

콕스바자르/글·사진 김미나 기자 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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