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랙티브] 바로가기▶ <한겨레 창간 30돌 특별기획-평화원정대, 희망에서 널문까지>
지난 7월 하순 <한겨레> 평화원정대는 미얀마를 거쳐 타이에 이르렀다. 지난 4월 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시작한 여정은 순탄치만은 않았으나, 큰 차질 없이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7월23일(현지시각),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라오스에서 에스케이(SK)건설이 시공하던 댐이 무너져 수많은 희생자가 목숨이 희생됐다. 평화원정대는 일정을 중단하고 사고 지역으로 달려갔고, 한국 언론 최초로 피해 마을에 진입해 참극의 현장을 보도했다. 한반도를 향한 지체된 일정은 8월 들어 재개됐지만, 앞서 미얀마와 타이에서 취재한 내용을 보도할 기회를 놓쳤다. 일상의 행복과 평화를 바라는 두 나라 사람들의 메시지를 늦게나마 전한다.
린 응암프린이 7월 24일(현지시각) 타이 방콕의 자기 피자 가게에서 <한겨레> 평화원정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방콕/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타이는 아시아에서 ‘엘지비티’(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에 가장 개방적인 나라로 알려져 있다. 지난달 24일 <한겨레> 평화원정대가 방콕에서 북쪽으로 1시간 거리의 돈타부리에서 만난 폴린 응암프린(51)은 ‘여자가 된 아빠’다. 응암프린은 성전환 뒤로도 자녀들은 물론 전 부인과도 변하지 않는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과연 ‘엘지비티의 천국’은 명불허전일까.
“5살 때부터 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화장실에서 내 모습을 보며 나는 왜 남자인가 싶었죠.”
피닛 응암프린이라는 이름의 남성 시절 그는 잘나가는 축구인이었다. 지난 2016년 피닛은 타이 축구협회장에 도전하며 부패한 협회를 개혁하고자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던 그가 돌연 축구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했다.
“더 이상 피닛의 삶을 이어가기 싫었어요. 오로지 인정받기 위해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는 그런 모습에 지친 거죠. 아무도 모르는 내 안의 여성 정체성인 폴린의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그해 미국으로 가 여성으로 성전환했다.
어렸을 때부터 여성의 삶을 동경했지만 가족들의 걱정스러운 시선 때문에 자신의 여성스러운 모습을 감춰야 했다. 아버지와 함께 매일 밤 무에타이 수련을 하며 남자처럼 행동했다.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단련한 운동 능력은 16살 때 프로 축구단의 유소년 선수로 활약하면서 꽃을 피웠다.
“여성적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운동을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미쳐 있었죠.”
27살 때 첫번째 결혼을 했다. 성정체성의 혼란을 느꼈지만 아들에게 듬직한 아빠가 되기 위해 버텼다. 방에서 혼자 여자 옷을 입어보거나 화려한 치장을 하면서 마음속의 목소리를 억눌러왔다. 끝내 혼자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끝에 이혼을 결정했다. 그러나 여성이 되는 것과 그에 따라 치러야 할 가늠할 수 없는 희생 사이에서 그의 혼란과 방황은 계속됐다.
성소수자에 대한 타이의 ‘이중성’은 성소수자들을 방황으로 몰아넣는다.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 인권과 정의 재단’이 지난 2012년에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성소수자 응답자 중 15% 정도가 성적 지향이나 젠더 표현 때문에 가족들에게 ‘언어 폭력’을 당하고 있다. 성소수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또 다른 연구에서는 성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괴롭힘을 당한 성소수자 학생들 중 7%가 지난 한 해 동안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으며, 23%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마히돌대에서 활동하는 ‘인권을 위한 트랜스젠더 동맹 재단’의 사다 때솜밧 집행위원장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시선은 특히 더 좋지 못하다. 조사 결과 주변인들에 의해 폭력에 노출된 성소수자들 중 트랜스젠더의 비율이 38%로 가장 높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응암프린이 성정체성 혼란을 억누르며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두번째 결혼을 했다. 아내와의 관계는 무척 좋았다. 하지만 비어 있는 여성 정체성은 채워지지 않았다. 지난 2015년 가족들에게 남성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어머니는 “내가 낳은 아들이니 엄마가 허락하겠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아버지도 “내 아들은 겉모습만 변할 뿐”이라며 지지해줬다.
새벽 직전의 어둠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그의 축구협회장 도전은 최후의 방황이었다. 그리고 고심 끝에 출마의 뜻을 접으면서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부인도 그를 이해해줬지만 성전환을 결심한 뒤에는 가족들이 사회로부터 받을 시선을 걱정해 이혼을 결정했다. 지금은 따로 살지만 주기적으로 가족 모임도 한다. 축구협회를 개혁하려던 응암프린은 이제 열심히 피자 가게를 운영한다.
평화원정대와 인터뷰하기에 앞서 화장을 고치고 있는 폴린 응암프린. 방콕/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응암프린에게는 성인이 된 아들과 아직 미성년인 딸이 있다. 성전환을 결심했을 때 아들의 시선이 가장 걱정됐다. 자신이 피닛 응암프린이 아닌 폴린 응암프린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렸을 때 아들은 주저하지 않고 아버지를 이해해줬다. 현재 아들은 ‘여자가 된 아빠’를 숨기지 않는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 물어보더라도 당당하게 ‘우리 아빠’라고 소개한다. 응암프린은 “아빠로서 역할을 제대로 했기 때문에 아들이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런 응암프린도 미성년자 딸과의 관계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는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직 딸과는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서 교류하고 있다. 딸에게는 “아빠가 여장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했을 뿐 딸에게 직접 화장을 해주는가 하면 여성 패션에 관해 함께 이야기하는 등 여성으로서 대화할 때가 많다. 응암프린은 딸이 곧 아빠의 성정체성에 관해서 물어올 것을 직감하고 있다.
“누군가가 딸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죠. 딸이 저의 성정체성을 물어오는 때가 오면 진솔하게 얘기해줄 생각입니다. 저는 지금의 가족을 지키고 싶습니다.”
방콕/유덕관 전종휘 기자 yd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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