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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15 21:46 수정 : 2018.06.16 21:09

까레니군(KA) 사령관 비투. 정문태

[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까레니군 사령관 비투 장군 인터뷰

까레니군(KA) 사령관 비투. 정문태

“오는 길 멀지? 얼마만인가?” “한 3년. 얼굴이 편해 보이는데?” “배탈 때문에 죽을 지경이야.” 2012년 버마 정부군과 휴전협정을 맺은 뒤 까레니 전선에도 총소리가 멈췄다. 비투 장군은 요즘 매홍손에서 남쪽으로 84㎞ 떨어진 한 국경 마을로 내려와 동맹군 회담을 준비하고 있다.

“근데, 자넨 왜 갑자기 까야(Kayah)라고 하나?” 그이가 대뜸 소리를 빽 지른다. 함께 간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사무총장 서니와 버마 행정구역을 따지는 데 그이가 끼어들었다. “까야라 한 적 없는데?” “방금 그랬잖아.” “아, 그건 버마식으로.” “버마식이 어디 있나. 이 세상엔 까레니 뿐이야!” 이게 버마의 고민이고 현실이다. 군사정부가 옛 지명을 바꿔버린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국경뿐 아니라 버마 시민사회는 옛날을 입에 달고 산다. 민족해방·민주혁명 진영에서는 더 그렇다. 버마(미얀마)로, 랭군(양곤)으로 통한다.

바뀐 지명, 달라지지 않은 현실

비투는 타고난 군인이다. 좀 거칠긴 하지만 말도 눈길도 돌리는 법이 없다. 오랫동안 봐온 그이는 한결 같다. “뭘 더 들을 게 있다고, 오늘 정치 얘기는 안 한다.” “비도 오고 하니 숨겨 놓은 까레니 비사나 들어 봅시다.” 그렇게 꼬드겨 그이 말문을 열었다.

1955년, 텅스텐 광산으로 이름난 까레니주 모찌에서 태어난 그이는 열일곱 되던 해 까레니군에 뛰어들었다. “어릴 때 밀림학교로 찾아와 역사를 가르친 이웃 까렌민족해방군(KNLA) 전사들이 멋지게 보였지. 자라면서 버마가 까레니를 함부로 대한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 거야.” 그렇게 전사의 길로 들어선 비뚜는 1975년 까레니 해방구를 뒤흔든 이른바 야도전투를 이끌었다. “버마 정부군 제26대대를 공격해 대위 포함 19명을 날렸어.” 그 일로 버마 정부군이 마을 24개를 보복 공격하면서 까레니 전역으로 전선이 퍼져나갔다.

1977년으로 넘어가면서 비투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동지 104명과 버마공산당(CPB) 본부였던 샨주 빵샹으로 무기 얻으러 갔는데 살윈강에서 샨주진보당(SSPP)한테 막혔어. 통신도 끊기고 먹을거리도 바닥난 채 아홉 달 동안 죽을 고생했고.” 그 시절 공공의 적인 군사정부에 맞서 소수민족해방군들이 버마공산당과 선을 달았던 건 역사다. 그러나 까레니군이 버마공산당한테 무기를 받았다는 건 알려진 바 없는 비사다. 비투는 내친김에 다 풀겠다는 듯 1986년을 입에 올렸다. “만샤(까렌민족연합 전 사무총장) 알지?” “잘 알지요.” “그이와 함께 민족민주전선 이름으로 버마공산당한테 무기 받아오다 매사이 국경에서 타이군한테 걸렸지. 나중에 풀려나고 무기도 돌려받았지만.” 민족민주전선이 버마공산당한테 무기를 받았다는 것도 새로운 사실이다. 버마현대사를 통째로 받은 기분이다.

46년을 전선에서 보낸 비투한테도 후회가 없진 않았다. 1986년 부사령관이던 그이는 티데구전선에서 옷을 벗었다. “공격당한 버마 정부군이 버리고 간 무기를 거두려고 했는데, 사령관이 위험하다며 말리는 바람에 열 받아 물러났지.” 그 일로 사령관도 함께 물러났다. “딱 한번이야. 군인이 된 걸 후회했던 게.” 그리고 그해 비투는 사령관으로 되돌아왔다.

“최대 승리로 꼽을만한 전선은?” “1992년 후아이 뽈라오. 정부군 18명 날리고 28명 포로로 잡았잖아. 국제적십자 중재로 풀어줬지만.”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줏대로 삼은 까레니군한테는 결코 흔치 않은 전과였다. “요즘 까레니군은 몇이나? 한 500은 되려나?” “그건 말 못해.” “1990년대 중반 정점일 때가 1000이었으니?” “그땐 그랬지. 우린 50명만 있어도 싸울 수 있어. 로이꼬까지 칠 수 있어.”

“내 운명과 내 자존심”

여동생은 마을에서 정부군 총에 맞아 죽었고, 남동생은 정부군이 깐 지뢰를 밟아 숨졌다. 소수민족 까레니에서 흔히 벌어져온 이런 비극은 비투라고 비껴갈 수 없었다. “다시 태어나도 버마가 안 변하면 또 총 들 수밖에. 까레니로 태어난 내 운명이고 내 자존심이다.” 비투는 “어제는 오늘이고 오늘은 내일이다”고 한다. 1948년 독립 뒤부터 소수민족을 무력으로 짓밟아 온 버마 정부를 내일도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버마 정부는 지금껏 맺었던 휴전을 늘 깨트렸다. 믿음 없는 버마 현대사, 아직은 평화가 멀기만 한 까닭이다.

정문태 국제분쟁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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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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