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6.15 21:46
수정 : 2018.06.15 22:14
[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19) ‘까레니 보급기지’ 타이 매홍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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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부터 버마 정부에 맞서 소수민족 까레니 해방을 위해 싸워온 까레니군. 정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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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주남부군(SSA-S) 본부가 자리 잡은 버마의 샨주 로이따이렝에서 새벽녘 짙은 안개를 가르며 타이 국경을 넘는다. 타이 최북단 마을 반빵캄으로 내려와 숨을 고른 뒤, 14㎞ 무인지대를 지나 반빵마파로 되돌아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10㎞ 남짓 떨어진 버마 국경을 오른쪽에 끼고 국도 1095를 따라 서남쪽으로 달린다. 아름답기로 따지면 반빵마파에서 매홍손에 이르는 이 64㎞ 산길이 타이에서 으뜸 아닌가 싶다. 겹겹이 이어지는 파도 같은 산세에 홀리다 보면 꼬부랑길의 괴로움 따위는 쉽사리 잊어버린다.
두어 시간 산길 내내 오락가락하던 비가 타이 북서부 중심도시 매홍손에 닿을 때쯤 억수로 변한다. 열대 사바나의 장마철을 알리는 신호다. 어딜 가나 비를 몰고 다니기로 소문난 나는 이번 여행에서도 제 몫을 한 셈이다. 하루 전만해도 죽을 만큼 더웠다는 매홍손 사람들한테는 그렇다는 말이다.
민족 20%가 난민인 사람들
매홍손주의 주도로 6천 주민을 거느린 매홍손은 자연과 어우러진 아주 예쁜 도시다. 북쪽으로 버마의 샨주와 서쪽으로 까레니주와 국경을 맞댄 매홍손은 본디 샨주에 속했으나 19세기 말 앵글로-시암(타이)국경위원회 결정에 따라 타이 영토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샨(Shan)과 까레니(Karenni) 사람들이 매홍손에 넘치는 까닭이다. 특히 1948년 버마 독립 뒤부터 해방투쟁을 벌여온 소수민족 까레니한테는 이 매홍손이 그야말로 보물단지다. 그동안 까레니 해방투쟁을 이끌어온 까레니민족진보당(KNPP)과 그 군사조직 까레니군(KA)이 바깥세상에 선을 대는 통로로, 또 보급기지로 삼아온 게 바로 매홍손이다.
타이 정부와 군은 알게 모르게 이 까레니군 뒤를 받치며 버마 정부군과 사이에 국경 완충지대를 만들어왔다. 그런 과정에서 타이 정부는 1990년대 중반 버마 정부의 강제 이주정책과 내전을 피해 국경을 넘은 까레니 사람들을 난민으로 받아들였다. 매홍손에서 북서쪽으로 20㎞, 까레니 국경에서 1.5㎞쯤 떨어진 국경지대에는 여태 고향으로 못 돌아간 1만4000난민이 살고 있다. 까레니 국경지역으로 빠져나온 국내실향민(IDPs) 3만5000을 합하면 5만에 이르는 까레니 사람들이 버마와 타이 어느 쪽 시민도 아닌 국경 유령으로 떠도는 실정이다. 이건 25만쯤으로 헤아리는 까레니 인구의 20%가 난민이라는 뜻이다. 인류 역사상 한 인종공동체가 이처럼 단기간에 해체당한 경우는 없다. 온 세상이 난민 문제로 떠들썩한 판에 이 사람들은 눈길 한번 제대로 못 받았다. 국제사회도 언론도 모조리 난민 ‘수’에만 매달렸지 그 난민 ‘비율’을 눈여겨 본 적 없다. 비에 젖은 까레니 난민촌이 더 아리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국경지대에 귀향 못한 5만 난민
비율로 보면 유례없는 민족 해체
소수민족 앞세운 영국의 분할통치
오늘날까지 이어진 민족분쟁 뿌리
2012년 개별휴전협정 서명했으나
3년 뒤 전국협정엔 빠진 까레니
‘까레니 고집’ 상징 에이벌 트윗
“버마 정부를 어떻게 믿나?”
‘붉은 까렌’이란 속뜻을 지닌 까레니는 말 그대로 소수민족 까렌(Karen)과 친척뻘이며 기원전 7세기 무렵 버마 땅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까레니는 그동안 자치와 연방제를 내건 여느 소수민족해방 세력들과 달리 처음부터 독립을 외쳐왔다. 1875년 버마를 식민통치했던 영국과 버마의 민돈민 왕이 까레니의 독립을 보장한 협약이 그 근거였다. 그 무렵 까렌, 까레니, 까친(Kachin), 친(Chin)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앞세운 이른바 분할통치로 다수 버마족을 제압했던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독립을 미끼로 소수민족 지원을 받았다. 이게 바로 상호 불신감을 걷어내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버마의 민족분쟁 뿌리다.
6월10일, 사흘째 멈추지 않고 비가 내린다. 매홍손에서 직선거리로 12㎞ 떨어진 까레니군 본부 냐무로 들어갈 약속을 잡아둔 채 하늘만 쳐다본다. 장마철에 대비해 지난주 이미 3개월짜리 보급투쟁을 마친 냐무는 서서히 고립 속으로 빠져 들고 있다. 냐무 뒤로 잡았던 약속을 당겨 까레니 국경 마을로 에이벌 트윗(73·까레니민족진보당 의장)을 찾아간다. “냐무, 자동차로는 힘들어. 벌서 진흙탕이래. 전투도 없는데 왜 갈려고? 수도 없이 다녔잖아.” “휴전협정 뒤론 못 봤으니.” “걷긴 힘들겠지? 진흙탕이니 하루는 잡아야겠는데.” 장마철 냐무행은 지옥이다. 20년 전쯤 장마철에 걸어서 냐무로 가며 다짐했다. ‘죽어도 이 길을 다시 걷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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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정부군 공격을 피해온 1만4000에 이르는 까레니 사람들이 20년 넘도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타이 국경에서 난민으로 살고 있다. 까레니난민촌. 정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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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중의 소수
랭군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한 해박한 지식에다 까레니군 사령관을 지낸 에이벌 트윗은 그동안 여느 소수민족해방군과 늘 다른 길을 걸어온 ‘까레니 고집’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그이는 까렌민족연합(KNU) 전 부의장 데이빗 탁까보, 신몬주당(NMSP) 부의장 나이홍사와 함께 버마 소수민족해방전선에서 ‘삼고집’으로 통하는 강경파 가운데 하나다.
“왜 전국휴전협정(NCA) 서명 안 하고 버티나?” “서명한들 한 발짝이라도 나갔나?” “까레니 9개항 전제조건이 전국휴전협정 그룹 의제와 같은데 들어가서 힘 모우는 게 옳지 않겠나?” “버마 정부 어떻게 믿나? 서명하기 전에 못 박자는 뜻이야.” 2011~2012년 사이 버마 정부와 개별 휴전협정을 맺은 8개(현재 10개) 소수민족해방군이 2015년 전국휴전협정에 서명했으나 다음 단계인 정치회담으로 못 나가는 상황을 오늘 화두로 삼았다. 이건 현재 내전 종식과 민주 연방제를 내건 버마 정치를 읽는 가장 중요한 잣대이기도 하다. 특히 2012년 개별 휴전협정을 맺었으나 전국휴전협정에 아직 서명하지 않은 까레니를 놓고 정부와 소수민족해방군들 사이에도 말들이 많다.
그동안 까레니는 소수민족해방군 동맹체인 민족민주전선(NDF)과 버마민주동맹(DAB)에 참여해왔고, 1997년 독립 포기와 민주 연방 참여를 선언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늘 독단적인 길을 걸어왔다. 소수민족 해방세력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까레니가 지닌 피해의식과 보호 본능이 그 바탕에 깔린 게 아닌가 싶다. 두어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고 일어설 즈음 에이벌 트윗이 묻는다. “자네는 정치회담 어떻게 보나?” 그이 눈에서 까레니의 외로움이 묻어난다. 소수에 또 소수인 까레니가 애처롭기만 하다. 버려둔 소수에 대한 미안함이 빗길을 쫓아 멀리까지 따라붙는다.
▶ 정문태
1990년부터 타이를 근거지로 삼아 일해온 국제분쟁전문기자.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코소보를 비롯한 40여개 전선을 뛰며 압둘 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 등 최고위급 정치인 50여명을 인터뷰했다. 저서로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 취재 기록><현장은 역사다><위험한 프레임>이 있다. 매주 우리가 몰랐던 국경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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