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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09 11:43 수정 : 2018.06.09 11:55

장교교육과정 개회식에서 연설하는 욧석 장군(샨주복구회의 의장·샨주남부군 사령관) 정문태

[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장교교육과정 개회식에서 연설하는 욧석 장군(샨주복구회의 의장·샨주남부군 사령관) 정문태

“5년쯤 전 아내와 딸과 함께 서울 구경 다녀왔어.” 여태 산악전선을 누벼온 ‘반군’ 지도자한테 들은 말치고는 가장 ‘반란적’이었다. 반군 지도자들이 바깥세상으로 비밀스레 정치적 나들이를 해온 것과는 결이 다르다. “한국 가수나 배우들은 어떻게 태어나나?” 이쯤 되면 신세대 게릴라 지도자상이 나온 셈이다. 그이는 1959년 샨주 남부 몽냐웅에서 났으니 우리로 치면 올해 환갑이다. 80대 언저리가 주류인 버마 소수민족해방전선 지도자들 속에서 가장 어린 욧석 장군이 그렇다는 말이다. 1948년 버마 독립 뒤부터 소수민족해방전선을 이끌었던 1세대 지도자들은 모두 사라졌고, 이제 2세대 지도자들도 저물어 가는 판이다. 그이를 2.5세대쯤으로 부를만하다.

“한국 가수는 어떻게 태어나나?”

열일곱 되던 1976년 샨연합혁명군(SURA)에 뛰어든 욧석은 꼬박 42년을 전선에서 보냈다. 전선 50년이 기본이라는 버마 소수민족해방전선 전설급으로 들어설 날도 머잖았다. 그이가 밟아온 길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만큼 곱잖게 바라보는 눈길도 싹 가시진 않았다. 그이 팔자는 1985년과 1996년 두 해에 결판났다. ‘1985년’. 1950~1990년대 중반까지 ‘아편왕’ 별명을 달고 국제마약시장을 주물렀던 쿤사가 샨주 독립투쟁을 외치고 나섰다. 이어 쿤사의 샨연합군(SUA)과 샨연합혁명군의 한 갈래로 모헹이 이끈 따이혁명회의(TRC)가 뭉쳐 몽따이군(MTA)을 창설했다. 따이혁명회의에 몸 담았던 욧석 운명이 꼬였다. “조직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애초 나는 장사꾼인 쿤사를 안 믿었고 인정 안 했다.” 이미 얼룩져버렸다. 몽따이군이 샨주 독립투쟁보다 오히려 쿤사의 마약군사조직 노릇을 했으니. “아픈 데를 건드려 미안하다. 아무튼, 그 뒤로 샨주남부군도 몰래 아편 만진다는 의심 받아왔는데?” “우리가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와 함께 아편 뿌리 뽑겠다고 나선 걸 잘 알면서 그런 말을. 아편은 버마 군부한테 따져봐라. 그쪽 사업이잖아.”

‘1996년’. 욧석한테 1985년이 묻혀간 인생이라면 1996년은 오롯이 제 몫이다. 쿤사가 버마 군사정부에 투항하면서 2만 가까운 몽따이군도 모두 손을 들었다. 욧석은 투항을 거부한 옛 따이혁명회의 출신 300여 군사를 이끌고 샨주남부군를 만들었다. 이어 1999년 본부를 로이따이렝으로 옮긴 뒤 2000년 상위 정치조직인 샨주복구회의를 창설했다. 그로부터 욧석은 까렌민족해방군(KNLA)을 비롯한 소수민족해방군들과 손잡고 군사정부에 맞섰다. 여기가 샨 해방전사 욧석으로 환생한 지점이다.

욧석은 표정 없는 얼굴이고 잘 웃지도 않는다. 말도 쓸 만한 것만 골라서 한다. 한마디로 읽기 만만찮은 인물이다. 이번 취재에서 이틀 동안 같이 먹고 같이 다녔고, 또 인터뷰라고 따로 두어 시간 마주 앉았지만 늘 꼿꼿했다. 그 전에도 그랬다. 지금껏 나는 딱 두 대목에서 짧은 순간 맥 빠진 욧석을 보았다. ‘쿤사’와 ‘아편’을 입에 올렸을 때다. 목소리까지 낮추는 걸로 봐서 그이가 이 둘을 멍에로 안고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한 게 아닌가 싶다. 그 속내까지 후벼 파기는 너무 잔인한 것 같아 멈췄다. 내 직업적 권능은 여기까지다.

“몇 해 전 버마 망명 언론들이 ‘샨주남부군의 대민 징세와 강제 징병 포기 선언’을 보도한 적 있는데?” “우린 강제 징병 없다. 여긴 샨주복구회의 헌법을 따르는 독립해방구다. 남성 군복무 5년은 의무다.” “어기면?” “법과 사법위원회판단에 따라 처벌한다.” “국경지역 대민 징수는 어디든 해묵은 문젠데?” “주민들한테 왜 세금 뜯나. 우린 법에 따라 사업가들한테만 세금 걷는다.” 국경 소수민족해방전선에서 몇 안 되는 언론친화적 인물로 꼽을만한 욧석이지만 이 대목에서는 언론을 향해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확인도 않고 기사 쓰는 당신들이 문제야. 여기 와 본 기자가 몇이라고, 웬 전문가들이 그렇게 많은지.”

먹구름 낀 버마의 앞날

샨주남부군는 2011년 테인세인 대통령 정부와 휴전협정을 맺은데 이어, 2015년 휴전협정에 서명한 8개(현재 10개) 소수민족해방군과 버마 정부 사이에 전국휴전협정(NCA)까지 맺었다. 그 다음 단계가 정치회담이고 그 다음이 연방으로 가는 길인데 지금껏 정치회담이 제자리걸음이다. “연방은커녕 죽기 전에 정치회담이나 보겠나?” “2~3년 안에는 힘들다. 빵롱협정으로 돌아가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다.” 빵롱협정은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앞둔 버마의 아웅산장군과 소수민족 샨, 친(Chin), 까친(Kachin)이 자결권과 자치권을 인정한 버마연방 창설 합의다. 이 협정은 10년 뒤 소수민족의 선택에 따른 연방 탈퇴 권리까지 담았다. “테인세인 준군사정부와 지금 아웅산수찌 정부, 어느 쪽이 편한가?” “불편한 건 둘 다 똑같다.” 짧은 욧석 한 마디에 어두운 버마 앞날이 밀려온다. 로이따이렝을 삼킬 것 같은 먹구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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