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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12 13:51 수정 : 2018.05.13 14:13

[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⑭ 타이·라오스전 보급기지 반찻뜨라깐

타이와 라오스 국경 분쟁 지역인 푸소이다오 산악으로 해가 저문다. 정문태 제공

역사·문화·언어로 얽힌 두 나라
랑스 통치 때부터 사이 벌어져
친베-친중 엇갈리며 간극 심화
타이의 우월의식도 불만 자극

1987년 12월 롬끌라오 두고 충돌
동남아 현대사에서 드문 ‘화력전’
식민주의 침략이 뿌리가 되어
신화가 현실이 된 영토 전쟁

발리 “내 아우 수그리브는 왕국을 훔쳐갔다. 내 죄가 뭐냐? 내가 아우한테 죄를 지었더라도 당신이 나를 죽일 권리는 없다. 나는 락샤스의 라바나왕한테 납치당한 당신 아내 시따를 구할 때 도왔고, 당신 아버지 다샤라트왕은 내 아버지 인드라왕이 락샤스와 싸울 때 도왔다.”

발리 라마 “당신은 수그리브를 아들처럼 보살펴야 한다. 비록 아우가 실수하더라도 용서해야 옳다. 아우는 당신 인생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수그리브는 바라따왕한테 악을 벌할 수 있는 권능을 받았다고 한다. 당신은 마야비와 싸워 왕국을 잃었고 이제 왕이 아니다.”

아시아의 전통문화와 예술에 밑감이 된 힌두 서사시 ‘라마야나’에서 끼슈낀타의 왕 발리가 동생 수그리브와 싸운 뒤, 힌두신 비슈누의 아바타인 라마한테 살해당하기 전 주고받은 이야기 가운데 한 토막이다. 발리가 죽기 전 수그리브와 화해하면서 삶의 목적과 본질을 가르친다는 줄거리다. 이 이야기가 ‘라마야나’의 타이 버전인 ‘라마끼안’에서는 ‘팔리 손 농’(팔리가 동생을 가르치다)으로 전해진다. 신화시대부터 줄기차게 이어져온 형제싸움은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이야기 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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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간 형제애

5월6일 새벽, 형제싸움의 현장을 찾아 길을 떠난다. 타이 북부 치앙마이에서 잘 빠진 국도 11을 따라 남동쪽으로 240㎞ 떨어진 웃따라딧까지 신나게 달린다. 발효시킨 쌀 반죽말이인 웃따라딧 명물 카오판으로 아침을 때우고 에스프레소 한잔을 넘기면서 싸한 가슴으로 풍경을 담는다. 앉으나 서나 무선전화기만 닳도록 만지작거리는 운전기사가 고맙고, 뒤뚱대다 기어이 물잔을 엎지르고 마는 커피소녀도 고맙다. 당신들은 모두 내가 가는 아침 길을 빛낸 주인공들이니까! 영화 보듯 세상을 바라보고 떠오르는 대로 느끼면 그만이다. 여행의 즐거움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라오스와 국경을 맞댄 핏사눌록주의 반찻뜨라깐으로 가는 길이 만만찮다. 지방도 1244와 1214에 이어 1143으로 정신없이 갈아탄다. 이정표가 흐리멍덩해 위성지도는 아무짝에 쓸모없다. 묻고 물어 반찻뜨라깐에 닿고 보니 꼬박 여섯 시간이나 걸렸다. 치앙마이에서 기껏 310㎞를.

“왜 여기 왔나?” “어딜 가려고?” 반찻뜨라깐에서 만나는 이들이 하나 같이 묻는다. 바깥사람 발길이 잘 안 닿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관광객들이 구석구석 들쑤시고 다니는 타이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우리로 치면 면쯤 되는 찻뜨라깐의 9개 마을 가운데 중심지인 반찻뜨라깐은 한 때 타이와 라오스 형제싸움에서 보급기지 노릇을 했던 곳이다.

1810㎞ 국경선을 맞댄 타이와 라오스는 15세기 란상왕국(라오스)과 아유타야왕국(타이) 때부터 역사적으로 얽히면서 문화와 언어의 동질성을 지녀왔다. 특히 18세기 초까지 란상왕국 영토였던 오늘날 타이 이산(동북부) 지역은 메콩강을 놓고 동서로 나라만 갈라놓았을 뿐 사람들은 한 핏줄이다. 아직도 이산 사람들은 라오 말투를 지녀 두 쪽이 서로 어려움 없이 뜻을 주고받을 정도다. 한 핏줄에 말이 통하는 마당에 굳이 문화는 따질 것도 없다. 그러니 타이와 라오스가 형제라는 믿음은 두 나라 전설과 민화에서부터 현대판 노래나 문학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스며있다.

1988년 타이-라오스 국경전쟁에서 두 나라 격전지였던 롬끌라오로 가는 1268 산악길. 정문태 제공
문제는 정치였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식민 통치한 19세기부터 냉전이 날뛰던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라오스와 타이는 문을 걸어 닫았다. 그 사이 이 형제는 서로 등을 돌렸고 맘속엔 노여움이 자라났다. 무엇보다 라오스는 프랑스 식민 당국을 통해 빼앗긴 코랏고원(이산 지역)과 에메랄드 불상 반환을 타이에 요구했지만 먹히지 않으면서 국민적 상처를 입었다. 이어 1953년 독립을 선언한 라오스는 친베트남 사회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타이와 더 멀어졌다. 그러다 냉전이 시들해진 1990년대 들어 두 나라는 국경을 열었다. 그로부터 두 나라 사이에 형제라는 말이 다시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내 경험에 따르면 1990년대 중후반쯤 두 나라 정부가 정상회담이니 아세안회담 같은 국제정치판에서 ‘형제애’를 내세운 게 그 출발이 아니었던가 싶다. 두 나라 시민들 사이엔 여전히 냉소적 기운이 흐르는 가운데 정치적 용어로 먼저 튀어나온 셈이다. 실제로 형제란 말은 타이 사람들이 더 즐겨 쓰는 편이다. 내가 만난 라오스 친구들은 저마다 웃어 넘겼다. 타이 사람들이 말하는 형제 속에는 나라 덩치로 보나 살림살이로 보나 타이가 마땅히 형이라는 의식이 담긴 탓이다. 다른 말로 차별인데, 이건 적잖은 타이 사람들이 가난한 이웃 캄보디아나 버마를 대할 때도 흔히 드러내는 모습이다. 같은 이웃이라도 잘 사는 말레이시아를 대하는 태도와 사뭇 다르다. 대놓고 이 차별 문제를 건드리는 이들은 없지만 라오스, 버마, 캄보디아 사람들이 지닌 불만은 이만저만 아니다. 타이 정부와 시민사회가 이웃들의 반타이 정서를 눈여겨봐야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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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전투기 동원한 전쟁

꼭 30년 전이다. 신화 속 발리와 수그리브 형제가 권력을 놓고 싸웠다면, 현대판 타이와 라오스 형제는 국경선을 놓고 싸웠다. 이른바 ‘타이-라오스 국경전쟁’이었다. 1987년 12월부터 1988년 2월19일까지 타이와 라오스 정부군은 탱크와 전투기까지 동원해 반찻뜨라깐에서 북동쪽으로 70㎞쯤 떨어진 국경 롬끌라오 지역 점령전을 벌였다. 사회주의 형제국끼리 싸운 첫 전쟁이었던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빼고 나면 동남아시아 현대사에서 전투기까지 동원한 정규전은 이 타이-라오스 국경 전쟁 딱 하나뿐이었다.

롬끌라오로 들어가는 길목 삼거리 검문소. 정문태 제공

타이-라오스 국경전쟁은 앞선 1983~1984년 국경 충돌로 이미 도화선을 깔았다. 두 나라 정부군은 반롬끌라오에서 북쪽으로 60㎞쯤 떨어진 반마이, 반사왕, 반끌랑이라는 세 마을 영토주권을 놓고 치고받았다. 이 19㎢ 지대를 두고 타이 정부는 웃따라딧주의 반콕면이라 우겼고, 라오스 정부는 사인야불리주의 빡라이읍이라고 맞받아쳤다. 근데 이 지역은 무력충돌 전까지만 해도 두 나라 정부가 별로 눈여겨보지 않았다. 타이 정부는 1983년 들어서야 이 지역이 타이공산당(CPT) 작전지역이었으니 마땅히 타이 영토라고 우기며 길을 닦았다. 라오스 정부는 좀 더 이른 1979년 친중국 노선을 걷던 타이공산당을 쫓아내고 이 세 마을에 군인들을 깔았다.

그 무렵은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중국과 날카롭게 부딪치던 때였다. 라오스는 전통적으로 친베트남이었고 캄보디아는 친중국이었다. 1960년대부터 타이공산당이 무장투쟁 발판으로 삼았던 라오스에서 쫓겨난 까닭이다. 그러니 1984년 타이-라오스 국경분쟁은 총질보다 오히려 두 정부 사이에 말싸움이 더 치열했다. 타이 정부는 그 시절 라오스에 군대 4만을 깔아둔 베트남이 분쟁을 부추긴다며 대들었고, 라오스 정부는 중국이 베트남을 견제하고자 타이 뒤를 받친다며 삿대질했다. 저물어 가던 냉전의 시대에 타이-라오스 국경분쟁은 사회주의 형제국끼리 다투면서 복잡한 꼴로 국제정치판을 흔들어놓았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 국경선 원칙은 차오프라야강 지류와 메콩강을 잣대로 삼았다. 일찍이 14세기 란상왕국(라오스)과 짠왕국(베트남) 사이 협약에 이어 16세기 란상왕국과 아유타야왕국(타이) 사이에도 그랬다. 같은 원칙에 따라 인도차이나를 식민 통치했던 프랑스와 사이암왕국(타이)이 1902년과 1904년 두 차례 협약으로 오늘날 타이와 라오스 국경선을 그었다. 그 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타이가 라오스의 사인야불리주를 점령했던 1941~1947년을 빼면 1984년 무력충돌 때까지 세 마을을 낀 19㎢ 지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결국 여기도 제3세계 모든 국경분쟁과 마찬가지로 식민주의 침략이 문제였다. 프랑스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아우르는 거대한 인도차이나 전역을 총독 하나로 통치했으니 국경선 같은 예민한 문제까지 떠맡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한마디로 타이와 라오스 국경분쟁의 뿌리는 국경선을 책상머리에서 대충 그어놓고 사라져버린 프랑스 탓이었다. 1984년 타이와 라오스 국경분쟁에서 라오스 정부가 들이댄 지도란 게 바로 그 프랑스 식민당국이 만든 엉성한 1907년판이었다. 하기야 지도로 따지면 타이 정부도 할 말이 별로 없다. 타이 정부는 1965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만든 좀 더 상세한 축척지도를 들고 나섰다. 근데 그게 인가받지 못한 지도로 밝혀져 사과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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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 롬끌라오로

1988년 타이-라오스 국경전쟁 이해를 돕고자 찻뜨라깐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이제 진짜 전쟁터였던 롬끌라오로 간다. 찻뜨라깐에서 지방도 1237을 타고 북동쪽으로 60㎞쯤 달리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겉보기에도 제법 긴장감이 돈다. 가정집 같기도 하고 초소 같기도 한 이상한 집으로 군복을 안 걸친 군인들이 드나든다. 비무장지대에 들어섰다는 신호다. 한 군인은 묻지도 않았는데 군용지도까지 들고 나와 국경을 설명해준다. 친절하다.

날이 저문다. 마음도 바빠진다.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꺾어 지방도 1268을 따라 5㎞쯤 아주 험한 산길을 달린 끝에 롬끌라오에 들어선다. 당장 잠자리가 문제다. 국경초계경찰(BPP)을 찾아간다. 17명이 진 친 막사는 참호로 둘러싸였다. 여긴 더 친절하다. 핏사눌록주가 꾸려온 식물원에 전화를 걸어 잠자리와 저녁을 마련해준다.

식물원 산꼭대기에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루를 접는다. 12시간짜리 길에 지친 몸이 단박에 풀린다. 전쟁터였던 롬끌라오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는지, 내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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