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4.14 05:00
수정 : 2018.04.14 10:43
[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11) ‘소금우물’ 마을 반보루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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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했던 소금의 시대가 저물면서 반보루엉 소금우물의 운명도 흔들리고 있다.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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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가던 길을 멈춘다. 산이 구름을 안았는지 구름이 산을 품었는지, 강이 골짜기를 따르는지 골짜기가 강을 쫓는지, 내가 숲을 바라보는지 숲이 나를 쳐다보는지 헤아릴 것도 따질 것도 없다. 아름답다고 소리치거나, 달리 무릉도원을 빗대는 일도 부질없다. 그저 모든 게 있을 자리에 있고, 그 꽉 찬 어울림이 고마울 뿐이다. 가슴으로 받은 풍경이 눈가로 올라와 느닷없이 작은 개울을 만든다. 빗물이 정답게 다가와 나를 감춰준다.
반파숙을 떠나 국도 1081을 타고 북쪽 마을 반남리빳따나로 가는 산길은 딴 세상이다. 비에 씻긴 산들은 올찬 초록빛을 터트리며 눈앞에 성큼 다가온다. 화전이 낳았던 잿빛 연기도, 누런 먼지 때도, 희뿌연 해도 사라졌다. 찐득대던 더위도 온데간데없다. ‘빨갱이마을’ 반파숙에서 들고 온 복잡한 심사도 날려버린다.
30킬로미터쯤 달렸을까, 이정표에 보끌르아가 나타난다. 문득 떠오른 27년 전 기억을 따라 여정을 깨고 길을 튼다. 동쪽으로 라오스의 사인야불리주와 국경을 맞댄 보끌르아는 때 묻지 않은 도이푸카 국립공원을 꼈지만 관광객 발길이 뜸한 두메산골이다. 길이 멀고 험한데다, 1990년까지 정부군과 공산당이 치고받았던 곳이라 꺼림칙하게 여기는 이들이 적잖은 탓이다.
커피숍에 위성접시 즐비한 마을
기억을 더듬어 들어선 마을은 반보루엉이다. 우리로 치면 군쯤 되는 보끌르아의 서른아홉 개 마을 가운데 하나다. 타이 말로 ‘보’는 우물이고 ‘끌르아’는 소금이다. ‘반보루엉’은 우물 중심지란 뜻이다. 그러니 지명에서 정체도 위치도 모두 드러난 셈이다. 말 그대로 여긴 소금우물이 있는 마을이다. 27년 전 라오스의 몽족 반군 취재 길에 이 소문을 듣고 잠깐 들렀던 곳이다. 674미터 산골 우물에서 소금을 긷는다는 건 흔치 않은 이야깃거리임에 틀림없었지만, 그 시절 내 머릿속엔 온통 반군뿐이라 쪼들리는 시간을 핑계 삼아 취재를 훗날로 미뤘다. 그게 27년이 지났다.
산골 전통마을이었던 반보루엉은 그사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마을 안팎으로 포장도로가 깔렸고 집들도 다 시멘트로 바뀌었다. 커피숍에다 현금자동지급기에다 위성접시에다 와이파이가 터진다. 겉보기엔 치앙마이 변두리쯤과 다를 바 없다. 기억과 딴판인 반보루엉의 변화가 낯설기만 하다. 세월 따라 세상도 변하는데 나만 그 기억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라오스와 국경 맞댄 보끌르아에서
소금우물로 유명한 반보루엉 동네
과거 흔적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현금자동지급기에 와이파이까지
전략물자이자 물물교환의 밑감
지배자들은 소금 팔고 세금 뜯어
타이 정부 반공전선의 주요 무대
민간 신분인 자경단까지 용병 투입
변화를 잘 못 쫓아가는 내 버릇을 탓하며 소금우물을 찾아간다. 허름한 창고 같았던 옛터엔 이제 마당과 가게가 들어섰다. 땅바닥에 있던 우물은 재단처럼 꾸며 2미터쯤 높여놓았다. 우물 둘레에는 단지를 걸고 플라스틱 파이프를 꽂아 가마까지 물길을 이었다. 그 앞엔 얄궂은 시멘트 소 세 마리가 서 있다. 이 서름한 풍경은 모두 관광객을 부르는 손짓일 텐데, 차라리 시끌벅적했더라면 보는 마음이라도 편했을 것을.
들머리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소금우물’이란 간판도 붙여두었다. 엉터리는 아니지만, 사실은 소금우물이 반보루엉에만 있는 건 아니다. 난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매남와(와강)를 따라 큰 우물이 둘 있고, 매남난(난강)을 따라 큰 우물 다섯과 작은 우물들이 늘렸다. 돈이 안 되니 퍼내지 않을 뿐. 난주 북쪽 땅 속에 소금층이 있다는 말이다. 옛날엔 여기도 바다였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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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보루엉의 소금우물.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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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 얽힌 수많은 전설들
역사를 훑어보면 보끌르아는 15세기에 처음 등장한다. 치앙마이에 뿌리를 둔 란나왕국의 멩라이왕조 제9대 왕이자 전쟁광으로 이름난 프라짜오 띨록까랏(1441~1487)이 소금우물을 차지하고자 난타부리라는 작은 군벌 연합체가 지배하던 난을 점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게 1449년이었다. 그 시절 소금은 군사 전략물자로서뿐 아니라 물물교환에 중요한 밑감이었다. 그래서 바다와 멀리 떨어진 중국 윈난과 광시를 비롯해 버마 샨주에서도 소금 대상들이 난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난 지배자들은 저마다 그 소금을 팔고 세금을 뜯어 부를 챙겼다고 하니 한때는 이 소금우물이 엄청난 밑천이었던 셈이다. 반보루엉 사람들이 여태 이 소금우물을 성스럽게 여기는 까닭이다. 해마다 2월이면 이 우물에 닭과 돼지를 바치고, 매 3년째는 물소를 잡아 닷새 동안 제사도 올린다. “여긴 짜오 상캄과 낭 으앗이라는 남녀 수호신이 있다.” 소금꾼 마 욧와릿(70) 이야기다. “남끌르아(우물에서 길은 소금물)를 끓이다 잠들었더니 그 수호신이 나타나 제시간에 깨워주더구먼. 몇 번이나 그랬어.” 그이는 따우(솥을 건 가마) 뒤로 지나가는 그 수호신을 보았다고도 한다. 반보루엉 사람들은 이 우물에 혼이 있다고 믿는다. 공무원 시험이나 입학시험 때면 멀리 난에서까지 찾아와 이 우물에 빌고 한다니 신통력이 영 없지는 않은 듯. 단, 이 우물물을 바깥으로 퍼갈 수는 없다. “옛날에 이 우물물을 마을 밖으로 퍼가다 호랑이한테 물려죽은 사람이 있어. 몇 해 전엔 관개국 공무원 둘이 이 물을 퍼가다 교통사고로 죽었지.” 욧와릿 말을 굳이 따질 건 없다. 이 우물물이 아주 귀했던 시절 훔쳐가지 말라는 뜻에서 비롯되었겠지만 마을 사람들 믿음이 그렇다면 따르면 된다. 소금물 한통에 목숨 거는 쓸데없는 모험까지 할 일은 아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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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수익 기껏 8만5000원인 소금꾼한테 전통문화를 지키라고 윽박지르는 세상, 바로 국경 사람들의 삶이다.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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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군, 반공작전 제1선에 총알받이 투입
흐르는 세월에 밀려 반보루엉의 시대도 한물갔다. 본디 아홉이었던 이 마을 우물도 이젠 둘만 남았다. 소금 긷는 사람도 서른 명쯤 뿐이다. “지천에 깔린 게 소금이라 세상이 그 값을 안 쳐주니 어쩌겠어. 여섯 시간 걸려 남끌르아 두 솥 끊여내면 신따오(암염) 60킬로그램이 나와. 1킬로그램에 12밧(400원)이니 720밧(2만4000원)인데, 땔감만 400밧(1만3000원)이 들어. 한 달에 2500밧(8만5000원)쯤 벌려나.” 욧와릿은 소일거리밖에 안 된다면서도 열심히 불을 땠다. “이게 내 대에서 끝날지도 몰라. 요즘 애들이 이런 일에 안 덤비니.” 대물림을 걱정하던 그이는 자식들한테 바라는 마음을 슬쩍 내비쳤다. “아들은 경찰이고 딸은 선생이야. 우리 애들은 일곱 살 때부터 이 일 거들었으니 마음만 먹으면 할 수는 있어. 모르지 나이 들면.” 아버지한테 소금 일을 배운 욧와릿도 사실은 늘그막에 우물로 돌아왔다고 한다. “젊었을 땐 전쟁터 다녔고, 그 뒤론 일용 잡직 공무원으로 이것저것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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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우물은 반보루엉 사람들의 삶이자 신앙이었다. 우물물을 긷는 마 욧와릿의 몸짓 하나 하나는 마치 제의식 같았다.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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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우물에 빠져 잠깐 잊었던 전쟁을 욧와릿이 되살려냈다. 1965년부터 1990년까지 타이 정부가 반공전선을 펼쳤던 난주에서 전쟁을 빼고 인생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공산당 마을을 찾아다니는 이번 난주 여행에서 뜻밖에 반공 전사를 만났다. 욧와릿은 ‘꽁 아사 락사 딘 댄’ 출신이다. 본디 1954년 국경초계경찰(BPP)을 돕는 마을 자경단으로 창설한 이 조직을 타이군은 1970년대 반공작전 제1선에 총알받이로 투입했다. “1966년, 열여덟에 자경단에 들어갔지. 우리 마을에서도 전투가 벌어져 경찰이 총 맞아죽고 할 때였어.” “반보루엉도 공산당마을?” “여긴 반공마을이었어. 주민 가운데 공산당은 다른 마을로 다 옮겨갔고.” “이 마을은 몇 명이나 자경단에?” “나까지 마흔 명인데 서른 명이 죽었어.” “정부가 자경단한테 돈을?” “한 달에 900밧(현재 가치로 9만8000원) 받았지.” 듣고 보니 그 900밧은 그즈음 타이 정부가 반공 용병으로 부려먹었던 국민당 잔당 월급과 같다. 이건 정부가 마을 자경단도 용병 취급했다는 뜻이다. “마지막 전투는?” “1981년 펫차분전투였어.” 그이 입에서 타이 현대사가 숨겨온 비밀 한 토막이 튀어나왔다. 타이군이 반공작전 최후, 최대 전투였던 펫차분에 난주 출신 마을 자경단까지 투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건 알려진 바 없는 새로운 사실이다. 펫차분은 반보루엉에서 자동차거리로 530킬로미터나 떨어진 중부의 한 주다. 외국 군대인 국민당 잔당과 더불어 민간 신분인 자경단을 반공 용병으로 전선에 투입한 대목은 여전히 타이 현대사에 공백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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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한테 일을 배운 소금꾼 마 욧와릿(70)은 이제 대물림을 걱정한다.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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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란 건 아직도 15세기 군주 흉내나…
그렇게 15년 동안 반공전선을 달린 욧와릿은 버스와 병원 반값이라는 은혜를 입었다. 버스도 없고 병원 갈 일도 없는 산골마을에서. 라오스와 국경을 맞댄 난주에서는 전직 공산당도, 전직 자경단도 시민 대접을 못 받긴 다 마찬가지다.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전통문화도 딱 그 짝이다. 소금우물도 그 가운데 하나다. 문화적인 도시 정치는 국경 사람들을 향해 전통문화를 지키라고 다그쳐왔다. 지켜주지 못하면서 윽박지르는 전통문화는 또 다른 차별이고 박해다. 욧와릿이 정부에 낸다는 연간 우물세 200밧(6800원)이 그래서 참 언짢게 들린다. 350가구 3000여 주민을 지닌 반보루엉이 1년에 거두는 신따오가 10톤이고 돈으로 치면 기껏 12만밧(400만원)이다. 땔감으로 7만밧을 빼고 나면 인건비도 안 나온다. 늙은이 몇몇이 그 우물을 지키고 소금을 긷는 판에 정부란 건 아직도 우물세, 소금세를 받던 15세기 군주 시절 흉내나 내고 있다. 그 정부는 보끌르아 소금우물을 타이에서만 볼 수 있는 전통문화라고 떠들어대며 관광 상품으로 팔아먹는 데만 온 정열을 바쳐왔을 뿐, 소금꾼들 인생은 돌아본 적 없다. 국경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소금우물의 운명과 소금꾼의 일생이 아리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필자의 요청으로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정문태 ▶ 1990년부터 타이를 근거지로 삼아 일해온 국제분쟁전문기자.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코소보를 비롯한 40여개 전선을 뛰며 압둘 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 등 최고위급 정치인 50여명을 인터뷰했다. 저서로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 취재 기록> <현장은 역사다> <위험한 프레임>이 있다. 매주 우리가 몰랐던 국경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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