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10) 반파숙 주민들의 외로운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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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공산당 무장투쟁에 참여했던 반파숙 마을 사람 150명은 1980년부터 38년째 정부의 보상금 약속을 기다리고 있다. 오른쪽 문서 든 이가 보상금 투쟁을 이끌어온 사띠엔 짜이삥이다.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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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강 기슭 치앙콩에서 남동쪽으로 167킬로미터를 달려 라오스와 국경을 맞댄 난주로 넘어온다. 난에서 반파숙이라는 마을을 찾아가는 길이 또 만만찮다. 반파숙을 속 시원히 찍어줄 만한 사람을 만나기조차 쉽지 않다. 국도 101을 따라 잠깐 북으로 달리다가 이내 동쪽으로 꺾어 국도 1169, 1081, 1333으로 정신없이 옮겨 탄다. 타이에서 가장 가난한 주로 소문난 난은 돈줄이 넘치는 치앙마이주나 치앙라이주와 견줘 길부터가 다르다. 게다가 제대로 된 이정표가 없어 지도를 쫓아가는 여행이 고달프기 짝이 없다. 두 번씩이나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면서 물어물어 찾아가는 산골마을 반파숙이 좀체 모습을 안 드러낸다. 난에서 직선거리로 기껏 30킬로미터 남짓한 길을 두 시간 넘도록 달린다. 산은 깊고 길은 갈수록 멀어지는 느낌이다. “난에 넘치는 건 산과 빨갱이뿐이다.” 예부터 입에 오르내린 이 말이 우스개만은 아니었다.
아침 해를 보고 떠난 길이 반파숙에 닿고 보니 해거름이다. 마을 사람들과 인사만 나누고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푼다. 3월 말로 접어든 타이 북부는 벌써 38도를 오르내리지만 반파숙의 밤은 아직도 찬 기운을 뿜어댄다. 하루 종일 더위에 지쳤던 몸이 오그라들며 만세를 부른다. 두꺼운 이불을 턱밑까지 당기며 불을 끈다.
“처음엔 다 의심스럽기만 했지”
짙은 안개에 가려 있던 반파숙이 9킬로미터 떨어진 라오스 국경에서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받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동쪽 어귀를 휘감아 도는 매남와(와강)와 800미터 도이푸램(푸램산)에 둘러싸인 반파숙의 고요한 아침을 가슴에 담는 동안 통역으로 함께 온 쪼이의 전화가 울린다. 통화를 마친 그이가 조심스레 묻는다. “인터뷰하면 돈 줘야 하는지 묻는데?” “누가?” “마을 사람이.” “나한테 달라는 건데 잘못 들은 거겠지?” “아니. 마을 사람이.” 30년 가까이 현장을 뛰었지만 취재원이 기자한테 돈을 줘야 하는지 묻는 건 또 처음이다. 급히 마을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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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와 국경을 맞댄 난주는 1960~1980년대 타이공산당 무장투쟁 격전지였다. 반파숙은 공산당 마을로 이름을 떨쳤다.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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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격인 사띠엔 짜이삥부터 찾았다.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전화 이야기부터 캐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돈은 뭐고?” 그이는 겸연쩍게 웃었다. “전에 어떤 기자가 인터뷰하더니 돈 달라고 해서.” “왜?” “산 개간 허가 받아주겠다며.” 요즘 어딜 가나 기자가 불신당하는 판에 나도 한통속쯤으로 보일 텐데, 그이를 달래야 할지 같이 화를 내야 할지 참 난감했다. 세상 어디든 못된 놈들이야 있겠지만 이 깊은 산골까지 찾아와 해코지할 줄이야. 결국 난데없이 사기꾼을 대신한 사과로 아침을 연다.
타이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난주’
‘반파숙’은 소문난 빨갱이 마을
1942년 태어난 타이공산당 주축
“난에 넘치는 건 산과 빨갱이뿐”
약속대로 사띠엔 집에는 예닐곱 늙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전직 ‘빨갱이’들이다. 130가구에 540명이 사는 반파숙은 우리로 따지면 군쯤 되는 보끌르아에서 나봉, 후아이롬, 후아이로이, 후아이미와 함께 소문난 빨갱이 마을 다섯 가운데 하나다. 사람들이 사하이 팟(팟 동지)이라 부르는 사띠엔은 올해 쉰다섯인데 반파숙에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후아이락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 따라 아홉 형제가 모두 타이공산당(CPT)에 참여한 골수 빨갱이 집안 출신이다. 그때가 1973년이었으니 타이 전역이 공산당 무장투쟁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형들과 함께 중국으로 가서 군사훈련을 받고 돌아온 사하이 팟은 열다섯 되던 해인 1978년부터 무장투쟁 전선에 올랐다. “그렇게 어렸는데 진짜 공산주의자는 맞나?” 실없는 소리로 들렸는지 그이는 물끄러미 쳐다봤다. “세상을 알고 뛰어든 게 아니니까 처음엔 다 의심스럽기만 했지. 하나씩 배우면서 공산주의자가.” “주로 어디 전선에서?” 전선 이야기가 나오자 점잖은 사하이 팟 눈에서 강한 빛이 튀었다. “케엣3(공산당 제3구. 난 남부지역) 산띠숙 전선과 난 도심을 들락거리며 게릴라전을.” 그이가 당장이라도 전선을 뛸 것 같은 기운을 뿜어 마치 그 시절 기록영화를 보는 듯했다. “모스로 중국에 있던 사하이 캄딴(파욤 쭐라논 타이인민해방군 사령관) 명령 받아 전하는 통신병 노릇 했어.” 사하이 캄딴을 말할 때는 큰 자부심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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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공산당 무장투쟁에 참여했던 반파숙 마을 사람들. 오른쪽 셋째가 보상금 투쟁을 이끌어온 사띠엔 짜이삥.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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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1만9060명 보상금 받아
이쯤에서 잠깐 타이공산당 역사를 짚고 가야 뒷이야기가 편해질 듯싶다. 1942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 삼아 창설한 타이공산당은 1965년부터 무장투쟁에 뛰어들어 1970년대 중반 1만2천 병력과 400만 웃도는 당원을 지니기도 했다. 크기로 따지면 베트남공산당에 이어 동남아시아에서 두 번째였다. 여기까지는 역사인데, 타이공산당 해체는 아직도 논란거리다. 타이군은 1981년 10월 말쯤 북부와 동북부의 타이인민해방군 주요 거점을 모두 점령했고 실질적인 공산당 무장투쟁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타이 정부는 1980년 공산당 사면과 보상안을 담은 쁘렘 띤나술라논 총리의 법령 제65/23과 제66123에 따라 대거 투항한 1983년을 타이공산당 해체로 여겨왔다. 그러나 이때 투항한 이들은 이른바 ‘헷깐혹뚤라’(10월6일 사건)라 부르는 1976년 탐마삿대학 학살 뒤 타이공산당에 뛰어든 학생과 지식인이 대다수였다. 이 헷깐혹뚤라 그룹은 1960년 타이공산당이 선언한 마오식 농민투쟁이 산업화로 접어든 타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며 국경 산악에서 지도부와 갈등을 겪기도 했던 이들이다.
“난 쪽에서도 1983년까지 거의들 하산했는데 당신은 언제?” “나는 1987년에.” “왜 그렇게 늦었나?” “쁘렘 정부를 믿을 수 없었으니까. 1983년 하산한 동지 가운데 우리 마을에서 3명, 반나봉에서 2명이 살해당했어. 그래서 1990년까지 산속에 버텼던 이들도 적잖았지.” 사하이 팟은 1990년까지 타이공산당이 살아 있었다는 전설을 사실로 증언했다. 근데 그 뒤가 없다. 타이공산당은 공식적인 해체 선언 없이 그냥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그 실체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그동안 숱한 공산당 지도부를 만났지만 모르긴 다들 마찬가지였다.
“1980년 쁘렘 총리가 농지, 집, 생필품, 직업교육 지원 약속을 했는데?” “거짓말이었다. 투항하고 한 1년쯤 쌀과 먹을거리 좀 보태준 게 다였다.” 10년 넘게 전선을 달린 피탁 피사짠(58) 말이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 사하이 팟은 마을 사람들 뜻을 들고 열댓 시간이나 걸리는 방콕 정부청사를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30년도 더 묵은 이른바 ‘보상금 투쟁’이었다.
보상 액수는 쁘렘 정부도 그 뒤 정부들도 또렷이 밝힌 적이 없었다. 그저 5라이(1라이는 1600제곱미터) 땅과 소 다섯 마리쯤을 기준으로 삼았을 뿐, 때마다 달랐다. 2000년대 전까지는 동북부 공산당원 806명이 8~15라이 땅을 받은 게 보상금의 다였다. 그러다 2007년 수라윳 쭐라논 군사정부가 2억3600만 밧(80억원)을 들여 2609명한테 12만5천 밧(420만원)씩을 보상했다. 이어 2009년 아피싯 웨차치와 정부가 9645명한테 22만5천 밧(760만원)씩을 보상하면서 21억7천만 밧(730억원)을 썼다. 그리고 지난해 6월21일 쁘라윳 짠오차 군사정부가 다시 14억 밧(470억원)을 들여 6천명한테 25만5천 밧씩을 보상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껏 공산당원 1만9060명이 보상금을 받았다.
“정부가 약속한 보상금은 그냥 돈이 아니다. 우리가 싸운 정당성을 인정받는 일이다.” 사하이 팟은 보상금 이야기를 꺼내자 방콕으로 들고 다녔던 서류 뭉치를 내보였다. 반파숙 사람 155명 이름을 담은 공산당 명부인 셈이다. “이 마을에선 지금껏 모두 몇 명이나?” “38명이 받았다.” “당신은?” “지난해 우리 마을에서 다섯 명이 받을 때 나도.” “그러면 이제 방콕 드나들 일 없겠네?” “아니지. 아직 150명이 남았으니.” “쁘라윳 정부는 이게 마지막 보상이라던데?” “끝까지 가야지. 그래서 동북부 쪽 동지들과 힘을 합치기로.”
“세상도 변하고 나도 변했지만…”
근데 정부가 내건 보상금 지급 규정에 따른 여덟 가지 자격과 세 가지 조건을 보면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전투요원’, ‘1가족당 1명’, ‘연 수익 6만 밧 미만’, ‘까룬야텝프로젝트(의식조정교육) 참여자’ 같은 것들과 다 맞아떨어져야 하는 까닭이다. “전투요원만으로 전쟁이 되나. 병참 없이 싸울 수 있나.” 30년 동안 공산당원으로 전선 보급투쟁을 했던 꽁 피짠(72)은 혀를 찼다. “간호사로 13년 동안 전선을 뛰었는데도 남편이 받았다고.” 솜밋 짜이삥(51)은 고개를 떨궜다. 반파숙의 탈락자들이다. 듣고 있던 사하이 팟은 “뒷돈 받아 챙기는 거간꾼들이 설치는데다, 전선을 뛴 적도 없는 가짜들이 숱하게 보상금 받아갔다”며 정부 규정뿐 아니라 집행도 큰 문제라고 거들었다.
공식 해체선언 없이 사라진 공산당
보상금 놓고 정부-주민들 ‘갈등’ 중
“농민들은 부쳐 먹을 땅도 없어
보상금 투쟁은 정의의 문제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삐딱한 눈길들이다. 시민사회는 “정치적 동기를 지닌 보상금이다”라며 정부와 옛 공산당원들을 싸잡아 욕하고, 한때 동지였던 이들 사이에도 “군부와 결탁했다”느니 “영혼을 팔아먹었다”느니 날 선 말들이 오갔다. 보상금 투쟁이 넘어야 할 산들인데 쉬워 보이지 않는다. “많이 배우고 도시에서 잘사는 이들과 우린 형편이 다르다. 자본가들이 모든 땅을 싹쓸이한 현실을 보라. 우리 같은 농민은 부쳐 먹을 땅도 없다.” 사하이 팟은 보상금 투쟁을 정의의 문제라고도 했다. 보상금 논란을 보면서 1970년대 타이공산당 내부 노선 갈등이 아직도 현실 속에 살아 있는 느낌을 받는다. 반파숙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풀 수 없는 의문만 들고 돌아 나온다. 말만으론 도시 사람들도 옛 동지들도 다 옳다. 그렇다면 이 가난한 전사들은 어떻게 하라는 건가? 아직 그 답을 내놓은 이는 아무도 없다. 정부한테도 옛 동지들한테도 치인 반파숙 사람들, 국경의 현실이다. “세상도 변했고 나도 변했지만 앞날은 알 수 없다.” 사하이 팟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우리가 내일도 공산주의자일지 아닐지는 정부한테 달렸다. 우리 심장 속에는 아직도 공산주의자 씨앗이 살아 있다.”
※필자의 요청으로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정문태 ▶ 1990년부터 타이를 근거지로 삼아 일해온 국제분쟁전문기자.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코소보를 비롯한 40여개 전선을 뛰며 압둘 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 등 최고위급 정치인 50여명을 인터뷰했다. 저서로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 취재 기록> <현장은 역사다> <위험한 프레임>이 있다. 매주 우리가 몰랐던 국경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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