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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4.07 22:14 수정 : 2017.04.07 22:26

1968년 1월18일 발생한 라토 학살의 생존자 타이브이가 당시 비참하게 죽었던 어머니 응우옌티옌의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토요판] 커버스토리
처음 밝혀지는 사건들

1968년 1월18일 발생한 라토 학살의 생존자 타이브이가 당시 비참하게 죽었던 어머니 응우옌티옌의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아침에 포 소리가 났어요. 한국 군인들이 온다는 소문이 나면서 마을의 남자들은 다 도망갔죠. 아버지도 피난을 갔고 엄마랑 저, 동생들만 남았죠. 엄마는 베트콩한테 음식을 해주는 일을 했지만 설마 여자와 아이까지 죽이랴 싶었나 봐요. 저는 그때 12살이었어요. 포 소리가 더 커지더니 큰비가 쏟아지는 듯했어요. 옆집 방공호로 내려갔어요. 저희 가족 포함해 9명쯤 있었던 걸로 기억나요. 포 소리가 그쳐 방공호에서 나왔어요. 밖을 슬그머니 내다보는데 한국군이 왔어요. 한국군은 대뜸 집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유탄발사기를 쐈어요. 저는 귀에 작은 파편이 박혔어요. 잽싸게 방공호로 되돌아갔는데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어요.”

타이브이(61)는 라토 학살의 생존자다. 라토 마을은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호아사에 있다. 지난 2월19일, 퐁니·퐁넛 학살의 라토 마을 희생자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다른 사건을 겪었던 타이브이를 만났다. 라토 학살은 퐁니·퐁넛보다 이른 1968년 1월18일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43명이 죽었다는 게 타이브이의 주장이다. 라토 학살은 소문으로만 떠돌아왔는데, 생존자의 증언으로 확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퐁니·퐁넛 조사하다 우연히 접한
1968년 1월18일의 라토 학살 사건
당일 밤에 주검 43구를 후다닥
마을 공터에 묻었다는 기막힌 사연

9000명에 이른다는 희생자 통계
일부는 터무니없는 숫자라 반박
어쩌면 정말 터무니없을 수도
많아서가 아니라 정반대 이유로

“한국군이 집에 불을 붙였어요. 저는 무서워서 방공호에 계속 있었어요. 주변이 대나무 숲이었는데 대나무 타는 소리는 총소리만큼이나 컸지요. 탕, 탕, 탕, 정말 장난이 아니었어요. 한참 뒤 조용해져 바깥으로 나왔어요. 엄마(응우옌티옌·당시 36살)는 한국군이 들어올 때 남동생을 안고 있었는데, 뒤채 쪽에 혼자 계셨어요. 팔과 다리가 모두 잘려 나간 상태였죠. 숨은 붙어 있었어요. 남동생(타이바끄어이·당시 4살)은 집 밖으로 나와 바나나나무 밑에 쓰러져 있었고, 여동생(응우옌티뿜·당시 7살)은 현관 쪽에 있었어요. 둘 다 죽어 있었죠. 이웃집 가족은 불에 타 새까맣게 그을렸어요. 피투성이가 된 엄마를 끌고 방공호로 다시 내려왔어요. 엄마는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어요. 피를 너무 흘렸어요. 무서웠어요.”

1965~73년 파병 기간, 한국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베트남 민간인은 얼마나 될까. 이 문제를 1999년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알린 구수정 박사(당시 <한겨레21> 통신원, 현재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의 취재와 연구에 따르면, 중부 5개 성 80개 마을에서 9000여명이 죽었다. 참전군인 단체 등에서는 터무니없는 숫자라고 반박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터무니없는 숫자다.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그 반대다. 9000명은 실제보다 적은 숫자일 수 있다. 라토 학살처럼 새롭게 밝혀지는 사건을 주목하는 이유다.

“외부와 연결된 방공호 출구를 통해 집 밖으로 나가봤어요. 엄마를 구해줄 사람은 없었어요. 저 말고는 아무도 살아 있지 않았던 거예요. 엄마는 비명을 지르다가 힘이 없어 신음만 흘렸어요. 나중엔 저를 초점 없는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어요. 방공호 밖을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엄마의 숨은 끊어졌어요. 저는 밤길을 걷다가 어떤 아주머니를 만나 그 집에서 잤어요. 다음날 오후 길에서 아빠(타이쭉·당시 29살)를 우연히 만났어요. 부둥켜안고 서럽게 엉엉 울었죠.”

라토 학살 이틀 뒤인 1968년 1월20일엔 서남쪽 2㎞ 거리에 위치한 디엔토사 투이보 마을에 한국군이 들어왔다. 이날 145명이 주검으로 발견됐다. 디엔토사는 사건 현장 주변에 위령비를 세웠고, 상급기관인 디엔반현 문화통신청은 1990년대 중반 직원을 마을에 파견해 조사 작업을 벌였다. 라토 마을 주민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이유다. 라토는 본래 디엔안사 소속이었다가 디엔호아사로 편입되었다. 주민들은 디엔호아사 인민위원회의 무관심을 원망한다. 라토 학살이 역사에서 지워졌다고 여긴다.

“제가 엄마를 잃고 밤길을 떠도는 사이 아빠가 마을에 왔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어요. 그날 밤 아버지는 너무 기가 막혀 슬퍼할 겨를도 없었대요. 산에 있는 유격대원들을 불러 밤을 새우며 거리의 공터에 43명의 주검을 묻었어요. 낮에 묻다간 한국군에게 잡혀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관은커녕 돗자리도 없었죠. 무덤엔 아무런 표지도 안 했다고 해요. 가족별로 구분해 묻는 자리만 기억해뒀대요. 나중에 가족별로 다시 이장을 했다죠.”

베트남전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 한베평화재단은 최근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아카이브 작업을 벌이고 있다. 해병 제2여단이 1968년부터 주둔했던 꽝남성부터 사건 통계를 다시 내는 중이다. 베트남 신문과 연구 논문, 전화 인터뷰, 현장 답사 등을 토대로 확인한 결과 2017년 4월 현재까지 56건의 학살이 집계됐다. 이는 1999년 통계치 25건의 두 배를 넘는다.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는 “내년이면 학살 50년이 되는데 여전히 조사를 할수록, 모르는 학살이 지천”이라고 말했다. 한베평화재단은 올해 꽝남성 학살 50주기 사업을 준비하고, 학살 위령비에 관한 구글 앱 지도와 순례길 프로그램 등을 순차적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라토 학살은 제가 유일한 생존자예요. 다른 가족은 생존자가 한명도 없어요.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도 못하죠. 엄마가 비참하게 죽던 날 한국 사람을 생전 처음 만났어요. 군인들이었죠. 그리고 오늘 두번째로 보네요. 49년이 흘렀어요.”

타이브이는 반세기 만에 만난 한국인 방문객에게 기어코 늦은 점심을 대접했다.

꽝남 디엔호아(베트남)/글·사진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한베평화재단 후원계좌: KB국민은행 878901-00-009326 한베평화재단(문의 : 02-2295-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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