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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4.07 22:12 수정 : 2017.04.07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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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퐁니·퐁넛·퐁룩 학살의 또다른 증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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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룩 마을의 쌔는 왜 퐁니·퐁넛 학살 희생자 명단에 있는가.’ 의문의 출발점이었다.

퐁니·퐁넛 사건은 1968년 2월12일 꽝남성(도) 디엔반현(군) 타인퐁사(읍. 현 디엔안사) 퐁니·퐁넛 마을에서 벌어졌다. 최근 한국인들의 여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베트남 중부 도시 다낭과 호이안에서 승용차로 30분 거리다. 나는 2000년부터 퐁니·퐁넛 마을을 취재했다. 2001년에 이어 2013, 2014년에도 각각 일주일간 마을에 들어가 생존자와 목격자, 희생자 유가족을 인터뷰했다. 이 사건과 관련한 인물 대부분을 만났다고 여겼다. 구멍이 있었다. 2016년 가을의 어느 날 디엔안사 인민위원회가 발행한 자료집의 사망자와 부상자 명단을 살펴보다 이름 뒤에 붙은 주소에 눈길이 멎었다. 사건 현장인 퐁니·퐁넛 마을에 적을 두지 않은 이들이 꽤 많았다. 쌔를 포함해 디엔탕사 퐁룩을 주소지로 둔 사람이 12명이나 되었다. 디엔프억사 라호아 마을과 농선 마을, 디엔호아사 라토 마을 사람까지 합하면 20여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어쩌다 남의 마을에 와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그 궁금증을 안고 지난 2월 6, 7일과 18, 19일 현지 취재를 했다.

베트남 중부지방의 농촌 사회는 한국보다 덜 해체됐다. 49년 전 주민들 대부분이 대를 이어 살고 있었다. 각 사 인민위원회 도움을 얻어 명단 속 사람들을 찾아나섰다. 90%에 가까운 희생자들의 사연과 마지막 순간에 관한 증언을 들었다. 그 결과 세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새롭게 밝힌 한국군의 퐁룩 진입
퐁니·퐁넛·퐁룩 학살로 다시 불러야
라호아·농선·라토 마을 사람들은
퐁니·퐁넛을 지니다가 비명횡사

첫째, 퐁니·퐁넛 사건은 퐁니·퐁넛·퐁룩 사건으로 다시 불러야 한다. 해병 제2여단 1대대 1중대가 1968년 2월12일 퐁니·퐁넛을 거쳐 퐁룩에서도 살상행위를 한 것은 이번에 처음 밝혀졌다. 국방부가 펴낸 <파월한국군전사>의 사건 당일 기록을 봐도, 해병들은 퐁넛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곳은 퐁룩일 가능성이 높다. 퐁니·퐁넛보다는 적지만, 희생자 규모도 10명이 넘는다.

둘째, 퐁룩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희생자 대부분은 다낭을 오가기 위해 퐁니·퐁넛 현장을 지나다가 변을 당했다. 취재 전 추론했던 대로였다. 그중에는 베트콩 활동과 연계된 이들이 없지 않았지만, 모두 비무장 상태의 노인이나 여성이었다.

셋째, 퐁룩을 비롯한 이 지역의 생존자들과 피해자 유족들은 사건 이후 49년 동안 마을에 들어온 한국인을 처음 접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퐁니·퐁넛 사건이 한국 사회에 알려진 뒤 시민단체 ‘나와 우리’는 2004년 퐁니 마을 입구에 한국인들의 성금을 모아 위령비를 세웠다. 매년 기일(음력 1월14일)이 다가오면 10곳 넘는 시민단체들이 위령비에 조화를 보낸다. 쌔가 죽음을 당한 퐁룩 마을 등은 베트남 평화기행을 비롯해 한국-베트남 간의 과거사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려는 한국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정리해보았다. 굳이 왜 기록하는가. 전쟁의 기억에 대한 성찰과 환기에 앞서, 잊힌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꽝남 남디엔탕(베트남)/글·사진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한베평화재단 후원계좌: KB국민은행 878901-00-009326 한베평화재단(문의 : 02-2295-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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