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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0.25 16:06 수정 : 2016.10.26 09:09

25일 방일 앞두고 <요미우리신문> 등과 인터뷰
중국과는 영토문제 보류, 미국과는 군사협력 중단
국익 내세운 독자외교 추진, 미국 외교엔 뼈아픈 패배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사흘간의 일본 공식 방문길에 오르기 위해 25일 마닐라의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마닐라/AP 연합뉴스

종잡을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미국의 애간장을 태우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균형 외교’ 노선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냈다. 미국에 대해선 이전과 달리 독자 노선을 추구하고, 중국과는 영토 문제를 보류해 교류·협력을 확대하겠다는 냉철한 실리 노선인 것으로 분석된다. 두테르테는 그러면서도 “동맹은 미국뿐”이라며 수위조절에도 나서려 한다. 하지만 이전까지 ‘친미’ 일색이었던 필리핀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모양새로 비친다. 두테르테의 ‘외교 모험’이 ‘국익’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선 의견이 나눠지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두테르테 대통령은 25일 일본에 도착해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과 만찬을 함께하는 등 27일까지로 예정된 방일 일정을 시작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방일을 하루 앞두고 24일 마닐라에서 진행한 <요미우리신문> 등과의 인터뷰에서 주변국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남중국해 정책과 대미·대중 외교 노선에 대해 비교적 분명한 어조로 소신을 밝혔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23일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여온 남중국해 스카버러 암초(중국명 황옌다오, 필리핀명 바조데마신록) 주변에서 필리핀 어선들의 조업이 다시 가능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태풍 피해 지역 카가얀주 투게가라오를 방문한 자리에서 지난주 중국 방문 때 이 문제를 거론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사진은 필리핀 어선이 지난해 9월 스카버러 암초 주변에서 조업하고 있는 모습. 마닐라/AP 연합뉴스
그는 먼저 미-중 힘겨루기가 이뤄지고 있는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지난 7월 국제상설중재재판소 판결의) 구속력은 있다. (그러나 20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에서) ‘지금은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적합한 때가 아니다’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는 스카버러 암초(중국명 황옌다오) 등을 둘러싼 양국간 영토 분쟁은 필리핀 주장이 정당하지만,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이 문제의 해결을 뒤로 미루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오른쪽)이 중국 방문 중이던 지난 19일 중국 베이징의 한 쇼핑몰을 나서고 있다. 베이징/AP 연합뉴스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어 “남중국해 문제는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군사적 선택지는 어리석은 얘기”라는 현실주의적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세운 게 미국 의존에서 탈피한 ‘독자 외교’ 노선이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미군의 필리핀 주둔에 대해 “어떤 외국 군대도 우리나라에 있길 원치 않는다. 미국의 활동은 멈춰져야 한다. 우리 스스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2014년 4월 미국의 재주둔을 허용한 양국간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은 필리핀의 요구에 따라 파기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필리핀 안보의 기축이 되는 미국과의 동맹관계에 대해선 “정부간 관계에 변화는 없다”고 명확하게 밝혔다. <교도통신> 등과의 별도 인터뷰에선 “미국과 동맹관계가 있으니 (중국 등) 타국과는 군사동맹을 맺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미국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안전판’을 내밀었다.

하지만 필리핀의 이런 외교 노선은 미국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남중국해 갈등의 당사자인 필리핀이 중국과 영토 문제를 보류하고, 미국과 군사적 협력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탓이다. 과거 미국의 식민지이기도 했던 필리핀은 1992년까지 대규모 미군 병력이 주둔하는 등 미국의 주요한 동아시아 군사기지 구실을 했다. 그러나 미군 철군 이후 1990년대 후반부터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군사적 압박이 강해지며 미군의 재주둔을 허용하는 등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가 다시 높아지던 상황이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러한 흐름에 쐐기를 박고 미국과 기존의 ‘군사동맹’만 유지하겠다며 선을 그은 것이다. 그로 인해 극동에선 한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와 미-일 동맹 강화, 동남아시아에선 필리핀을 중심으로 하는 남중국해 갈등을 활용해 중국을 압박하려던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큰 구멍이 뚫리게 됐다.

필리핀의 반미 시위대가 19일 마닐라에 있는 미국대사관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1천여명이 참가한 이날 반미시위는 필리핀 주둔 미군의 철군을 요구하는 한편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미국 의존 탈피 외교를 지지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알려졌다. 마닐라/AP 연합뉴스
미국 정부는 기민하게 대응했다. 존 커비 미 국무부 대변인은 24일(현지시각) 정례브리핑에서 존 케리 국무장관이 23일 페르펙토 야사이 필리핀 외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최근 도전들이 양국 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의사를 전했음을 강조했다. 사실상 ‘경고’에 가깝다. 대니얼 러셀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이와 별도로 24일 야사이 필리핀 외무장관과 만나 최근의 상황 변화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러셀 차관보는 이후 기자회견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의 결별 발언이) 필리핀 정부가 독립국가로서 독자적으로 외교정책을 결정한다는 의미라면 변경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미국과의 관계를 희생해야만 실현된다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발언 의도를 알 수 없고, 미국 이외의 국가들도 깜짝 놀라게 만들고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외교관의 공개 발언으로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이에 대해 야사이 외무장관도 “미국과의 동맹과 조약을 존중하고 관계 강화를 추진해가겠다. 그러나 국익에 반하는 결과를 불러온 의존이나 종속은 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다”고 말해 이전의 필리핀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대니얼 러셀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24일 마닐라에서 페르펙토 야사이 필리핀 외무장관을 만난 뒤 기자들에게 발언하고 있다. 마닐라/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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