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의 가계부채는 1997∼98년 금융위기 이후 닥친 경기 침체를 개인소비 확대로 극복하려는 정책에 의해 가중됐다. 사진은 98년 2월 국제통화기금 체제에서 경제사정 악화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시위 장면. 방콕/AF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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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신 치나왓 총리가 이끄는 타이 정부가 가계부채와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도저히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극빈층을 위한 탕감책을 내놓는가 하면, 농민들에게는 또다른 구제책을 약속했다.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선의’라는 옹호론과 모든 국민을 채무자로 만드는 ‘실수’라는 비판론이 엇갈리고 있다. 탁신 정부는 지난 19일 20만바트(570만원) 이하의 빚을 진 개인들에게 부채의 절반을 탕감해주는 것을 뼈대로 한 70억바트(2천억원) 규모의 구제책을 발표했다. 이들에게 은행에서 빌린 원금의 절반과 밀린 이자를 면제해주고, 나머지 원금을 내년 1~6월에 갚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마저 갚기가 곤란하면 정부가 운영하는 금융기관에서 3년짜리 저금리 융자를 지원하기로 했다. 탁신 정부는 이번 조처로 대략 10만명의 빈곤층이 혜택을 볼 것으로 예상했다. 탁신 정부 570만원 이하 빚 절반 탕감 정책 발표‘신용 파괴·도덕적 해이’ 저항 은행들 결국 백기
농민들 “농가빚도 해결을” 농성 총리 만나기로 탁신 정부의 이런 조처는 시행 전부터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개인이 진 빚을 정부가 나서 탕감해주는 게 과연 옳으냐는 지적이 잇따랐다. 타이 중앙은행까지 나서 이런 조처가 신용경제의 기반을 파괴하고 도덕적 해이를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타리사 왓타나-가세 부총재는 은행에 빚을 떠넘기는 조처라며, 이 조처를 ‘단발령’에 빗대기도 했다. 그는 “누구도 공짜로 점심을 먹을 순 없다”며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탁신 정부는 개인들도 파산보호 신청을 할 수 있도록 파산법을 개정하겠다며 은근히 은행들을 압박했다. 국민들에겐 세금을 한 푼도 더 걷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결국 은행들은 몇 차례의 회의 끝에 신용카드 부채나 농업자금 대출에 대해선 이번 조처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확답을 받고 동의했다. 차르트신 소폰 파니크 타이 은행연합회장은 비장한 어투로 “부담을 기꺼이 안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농민들이 들고일어섰다. 5000여명의 농민들은 25일 정부 청사 앞에 몰려가 농가부채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탁신 총리의 공약을 지키라고 촉구했다. 탁신 총리는 지난 7월 농가부채 구조조정 기금을 마련해 60일 안에 농민들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소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정부 청사 앞 도로에 텐트를 치고 장기농성에 들어가려던 농민들은 이를 막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다 탁신 총리 면담을 약속받고 해산했다. 탁신 총리의 이런 정책을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타이의 가계부채가 탁신 정부의 무책임한 선동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한다. 탁신 정부가 외환위기 이후 경기 침체를 개인소비 확대를 통해 극복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개인들에게 무분별하게 신용카드 사용과 은행 대출을 장려했다는 것이다. 타이 일간지 <더 네이션>은 “탁신 정부는 2001년 총선에서 6개월마다 개인소득이 올라 2008년엔 이 땅에서 빈곤이 사라질 것이라고 선전했다”며 “이 때문에 국민들이 부채에 대한 경각심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가계부채에 발목이 잡힌 타이 경제는 올 들어 국제적인 유가 인상까지 겹쳐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다. 타이 중앙은행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3.5∼4.5%로 예측했다. 이는 타이의 지난해 성장률 6.1%를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 <더 네이션>은 22일 “경기가 나쁘고 빚이 는다고 걱정하지 말라. 빅 브라더가 다시 너희에게 도움을 손길을 건넬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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