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8.03 16:43
수정 : 2016.08.03 21:17
경찰뿐 아니라 괴한도 가담…초법적 즉결처형 급증
국제 인권단체들 “유엔이 나서서 막아달라” 공동서한
“마약왕은 없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만 희생” 비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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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두테르테(왼쪽) 필리핀 대통령이 마닐라 대통령궁에서 경찰관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필리핀 대통령실이 1일 공개했다. 마닐라/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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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밤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마이클 시아론(29)은 인력거를 몰고 손님을 찾고 있었다. 아버지가 하는 과일 행상에 들러 “한 명만 더 태우고 집에 가겠다”고 말하고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시아론은 이날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있던 괴한이 시아론에게 총을 쐈고, 시아론은 길거리에 쓰러졌다. 괴한은 시아론의 주검 옆에 ‘푸셔’(pusher·마약 밀매업자)라고 쓴 종이를 놓고 갔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아론의 아내 올라이레스는 주저앉은 채 주검을 안고 흐느꼈다. 올라이레스는 “남편이 필로폰을 투약한 적은 있지만 마약 밀매를 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시아론의 마지막 모습은 ‘징벌자’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당선 뒤 필리핀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마약 용의자 즉결 처형의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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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괴한에게 살해당한 필리핀 남성 마이클 시아론의 주검을 부인이 끌어안고 흐느끼는 모습이 실린 <필리핀 데일리 인콰이어러>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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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는 시민단체인 국제마약정책컨소시엄(IDPC)과 공동으로 필리핀 두테르테 정권이 마약 범죄 관련 의심이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즉결 처형해 시아론 같은 희생자들이 나오는 것을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가 나서서 막아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공개했다. 두 단체는 공동 서한에서 “유엔마약범죄사무소는 마약 투약과 거래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필리핀에서 벌어지는 초법적 살인을 규탄하고 이런 살인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행동을 즉시 취해달라”고 밝혔다.
필리핀에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두테르테가 지난 5월10일 대통령에 당선된 뒤 마약 범죄 관련 의심을 받은 이들이 살해당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 두테르테는 선거운동 때부터 취임 6개월 이내에 범죄자 10만명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마약 범죄 용의자를 발견하면 현장에서 사살해도 좋다며, 마약 범죄자 즉결 처형을 독려했다. 실제로 두테르테는 대통령이 되기 전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의 다바오시 시장을 20년 넘게 지내며 암살단을 운영해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두테르테가 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다바오시에서 암살단에 살해당한 이들만 1000명이 훌쩍 넘는다는 조사가 있다.
두테르테 당선 뒤 필리핀 전역에서 다바오시에서처럼 경찰이 아니라 괴한들이 마약 범죄 관련성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필리핀 <에이비에스-시비엔>(ABS-CBN) 방송에 따르면, 두테르테 당선일인 5월10일부터 8월2일까지 마약 관련 혐의가 있다는 의심으로 살해당한 사람이 771명에 이르렀다. 이 방송은 경찰 기록과 언론 보도 등을 종합해 통계를 냈는데, 771명 중 경찰 작전 중 사살된 이가 472명, 신원을 알 수 없는 이에게 살해당한 경우가 228명이었다. 마약 범죄자라고 쓴 종이 등과 함께 주검이 발견됐을 뿐이라 희생자가 마약 범죄 용의자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경우도 71명에 이르렀다.
필리핀 언론은 살해당한 시아론은 가난하지만 평범한 인물이었다고 전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시아론은 날품팔이를 하다가 최근 인력거를 몰기 시작했는데, 많이 벌어야 하루 수입이 200페소(약 4800원)에 불과했다. 쓰레기가 떠다니는 개울 옆 헛간 같은 판잣집에서 부인과 함께 살았다. 임대료가 한달에 500페소(약 1만2000원)에 불과한 집으로, 화장실도 없고 지붕에 구멍이 나 비가 새는 곳이었다. 부인 올라이레스는 “남편은 단순한 사람이었다. 하루 세끼 먹으면 만족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개의치 않았다. 올라이레스가 시아론의 주검을 안고 있는 사진을 두고 “멜로드라마”라고 말했다. 경찰은 지난달 범죄가 13% 줄었다며 두테르테 당선 이후 성과를 자랑했다. 또 두테르테의 지지율은 90%에 육박하고 있다. 살해당한 시아론도 두테르테를 찍었다.
하지만 인권단체들은 필리핀의 마약 범죄 용의자 즉결 처형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마약 범죄와 관련이 없거나 관련이 있어도 하수인에 불과한 이들만 살해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휴먼라이츠워치의 아시아지부 부국장 필림 카인은 “살해당한 이들 중에 필리핀 마약 공급을 주도하는 부유하고 힘있는 마약왕은 없다”고 지적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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