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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6.02 15:30 수정 : 2016.06.02 15:37

1일 일본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노동과 관련해 3천명 이상의 중국인 피해자들에게 1인당 10만위안(약 1800만원)의 사죄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한 가운데, 중국 베이징에서 피해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채 울면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베이징/AP 연합뉴스

미쓰비시, 중국 강제노동 피해자들에 10만위안 화해금
청구권 협정으로 한국 피해자 배상 종결된 것으로 간주
청구권 일방적으로 포기한 중국에 대해선 부채의식 남아

1일 미쓰비시머티리얼(옛 미쓰비시광업)이 중국 강제노동 피해자들에게 한 사람당 10만위안(약 1800만원)의 화해금을 지급했다는 소식이 한국에서도 여러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미쓰비시는 이날 베이징에서 미쓰비시에서 강제노동을 당한 3명의 노동자에게 1인당 10만위안을 지급하는 것을 뼈대로 한 화해협의서 조인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 참여한 기무라 히카루 미쓰비시머티리얼 상무는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심심한 사죄의 뜻”도 밝혔다. 미쓰비시는 앞으로 다른 노동자와 유족들도 발굴해 같은 조건으로 화해를 추진할 계획이다. 미쓰비시는 그 밖에 기념비 건설(1억엔)과 피해 노동자 발굴(2억엔) 등의 사업도 추진할 예정이다. 보는 한국인들이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차별 대우하고 있다고 받아들여도 무리는 아니다.

중국은 교전국, 한국은 ‘제국의 일부’?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뭘까.

첫째, 당시 한국과 중국 노동자들의 법적 지위다. 당시 조선인은 일본 제국의 일부로 일본의 국가총동원 체제 아래 있었다. 그래서 1938년 국가총동원 체제가 만들어진 뒤 처음엔 ‘모집’, 다음엔 ‘관 알선’, 마지막엔 ‘징용’이라는 형태로 조선의 젊은이들이 일본에 강제동원 한다. 이는 한국 입장에서 보기에 ‘자신의 의사에 반한 강제동원’지만, 일본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합법적인 노동력의 활용이었다.

이에 견줘 당시 중국인들은 일본과 전쟁을 벌이던 교전국이었다. 교전국의 국민 또는 전쟁 포로를 일본에 끌어와 강제노동을 시켰으니 둘 차이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고 일본은 받아들인다.

두번째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1972년 중-일 공동선언 사이의 차이다. 한국과 일본이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국교를 정상화하며 일본은 한국에게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등의 자금을 지원했다. 명목은 독립축하금이었지만 사실상 청구권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이를 통해 양국은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중국은 1972년 중-일 공동선언을 통해 양국 간 국교 정상화를 하며 중국이 지난 전쟁으로 인한 피해나 청구권을 ‘일방적’으로 포기했다. 일본은 이 선언으로 “중-일간의 청구권 문제는 해결됐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중국에 대해선 일본으로 인해 막대한 전쟁 피해를 입고도 “이를 무상으로 탕감해 줬다”는 부채 의식을 안고 있다. 일본의 이런 인식은 1980년대 이후 일본이 중국에서 시행한 막대한 정부개발원조(ODA) 등으로 이어진다. 이번 미쓰비시의 결정도 이 같은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역시 한국과 중국의 국력 차이다. 미쓰비시의 경우 자신들이 과거에 저지른 중국인에 대한 ‘죄악’을 해결하지 않고선 중국 시장에서 기업 활동을 이어가기가 어렵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래서 지난해 8월 미쓰비시와 피해자들이 1차적으로 ‘화해’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중국의 민간관계자와 일본 기업 사이의 민사소송에 대해 정부가 코멘트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며 이를 사실상 용인하는 자세를 보인다.

물론, 한-중 사이엔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한국 피해자들이 “배상 또는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순 없는 노릇이다. 피해자들은 적극적인 법적 투쟁을 이어왔다. 근로정신대로 미쓰비시의 나고야 공장으로 강제동원됐던 양금덕(86) 할머니 등은 지난 1999년 3월 나고야 지방법원에 강제노동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일본 법원은 할머니들이 주장하는 사실관계는 인정하면서도 “청구권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며 2008년 11월 최종 패소 판결했다. 이 과정에서 기업 쪽은 할머니들과 조정 과정에서 화해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지만, 일본 외무성의 개입으로 좌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좌절에 빠져 있던 피해자들에게 변화의 계기가 생긴 것은 2012년 5월 한국 대법원이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기 어렵다”는 판결을 내놓은 뒤다.

대법, 최종 판결 내놓지 않고 있어

할머니들은 2012년 10월 한국 법원에 다시 소송을 내 2014년 4월 1심, 이후 지난달 24일 2심에서 잇따라 승소했다. 대법원은 아직 이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놓지 않고 있다. 과거사 문제가 한-일 양국 사이의 외교 문제로 발전해 양국 관계에 또 한번 큰 부담을 안기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양 할머니는 지난해 8월 도쿄를 방문해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나는 강제노동을 당했다. 아침 7시 반부터 하루에 10시간 넘게 맞으면서 일했다. 일본 아이들과는 업무도, 밥도, 변소 가는 데도 차별을 받았다. 내 목숨을 걸더라도 내가 당한 것은 강제노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차이로 한국인 피해자들에게 중국과 같은 방식이 적용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요미우리신문>은 2일 “이번 화해를 계기로 한국 국내에서 배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가속될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기업 경영의 ‘리스크’가 되는 과거사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고 싶겠지만, 최종적으로 일본 정부가 허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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