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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09 21:16 수정 : 2015.11.10 15:39

8일 치러진 미얀마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이 압승할 것으로 전망된 9일 수치가 양곤에서 연설을 한 뒤 미소를 짓고 있다. 양곤/AP 연합뉴스

수치, 15년 가택연금 등 인생역정

25년 전이 떠올랐을까. 자신이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이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는데도 아웅산 수치(70)는 조심스러웠다. 그는 “우리 후보들에게 승리를 축하하기엔 아직 좀 이르다. 우리 후보들도 어떤 결과든 인정해야 하지만, 여러분이 패배한 후보들을 자극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1990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으나, 군사정부는 이를 무효화시킨 역사가 있다. 25년이 흐른 뒤의 수치는 승리를 확신하면서도 신중했다.

‘8888항쟁’ 뒤 민주화 투신
89년 첫번째 가택연금 불구
90년 총선서 392석 압승했지만
군부 선거결과 인정 안해
91년에는 노벨평화상 수상

수치, 총선 압승 예상되는데도
“승리 축하 아직 이르다” 신중

8일 치러진 미얀마 총선에서 민족민주동맹이 압승을 거둘 것이 확실시돼, 민주화 투쟁의 가시밭길을 걸어 국가를 이끄는 최고지도자가 되려는 수치의 꿈도 한발짝 눈앞으로 다가왔다.

수치는 독립영웅인 아웅산 장군의 딸로 태어났으며, 초기 그의 명성에는 아버지의 후광도 작용했다. 아웅산은 1940년 일본과 협력해 영국 식민지였던 미얀마의 독립을 꾀하다가 나중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해 다시 일본과 싸운 인물이다. 아웅산은 독립을 앞둔 1947년 암살당했으며, 배후에 영국이 있다는 추정도 있다. 불과 33살에 숨진 아웅산은 독립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아웅산의 딸로 유명했던 수치는 외교관이었던 어머니를 따라 인도와 네팔에서 생활했으며 영국 유학과 유엔본부 근무를 하며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했다. 수치는 198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 간호를 위해 입국했다가, ‘8888항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항쟁은 1988년 8월8일 일어난 민주화 시위를 군부가 유혈진압해 수천명의 사망자가 나온 사건이다.

수치가 처음 대중 연설을 한 1988년 8월25일에는 그를 보기 위해 수십만명이 모였으며, 집회의 안전을 책임진 승려와 학생들은 연단 주변에 인간띠를 쳐야 했다. 스웨덴 출신 언론인 베르틸 린트네르는 <아웅산 수치와 버마 군부>라는 책에서 수치가 이날 이후 “미얀마의 가장 대표적인 야당 지도자”라는 명성을 얻었다고 했다. 수치는 1년 뒤인 1989년 군부에 의해 첫번째 가택연금을 당했다. 수치는 민족민주동맹을 만들어 1990년 총선에서 전체 492석 중 392석을 휩쓰는 압승을 거뒀다. 하지만 군부는 1990년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2010년까지 한국의 12·12 쿠데타 뒤 만들어진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연상하게 하는 군사평의회 조직을 통해 의회 없는 통치를 강행했다.

명성이 커질수록 탄압도 거셌다. 수치는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노벨평화상을 받으러 가지 못했다. 노벨평화상을 받으러 노르웨이에 가면, 군부가 미얀마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수치는 1999년 영국인 남편이 사망했을 때도 귀국하지 못할까봐 남편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군부는 수치에 대해 가택연금을 반복해 그의 가택연금 기간을 합치면 약 15년에 이른다.

신군부는 2010년 단계적 민정 이양을 시작하면서 가택연금을 해제했지만, 2010년 총선에는 수치의 출마를 막았다. 선거 불공정 우려와 수치 출마자격 제한에 항거해 민족민주동맹은 2010년 총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수치는 2012년 보궐선거에 출마해 의원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현실정치에 발을 담갔으며, 이번에 총선 승리까지 이끌었다.

수치는 2010년 가택연금 해제 뒤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군사정권의 통치를 겪은 한국이 버마 민주화 투쟁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도울 수 있을 것”이라며 “버마 상황이 나아질 수 있도록 한국이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수치와 민족민주동맹은 현재 국호인 미얀마 대신 군사정권이 바꾸기 전 나라 이름인 ‘버마’를 사용하고 있다.

수치가 미얀마 주류 종교인 불교도와 다수 버마족을 의식한 행보를 하면서, 로힝야족 같은 소수민족 인권탄압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민족민주동맹은 이번 총선에서 무슬림 후보를 한명도 내지 않았다.

수치는 총선을 사흘 앞둔 지난 5일 양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나는 대통령 위의 존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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