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현지시각) 타이 방콕 에라완 사당 근처에서 경찰관들이 폭발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타이 언론과 경찰은 이날 오후 6시30분 내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던 에라완 사당 근처에서 폭탄이 터져 16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방콕/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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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50) 방콕 폭탄공격
타이 안팎 언론들이 다투어 보도했듯이 17일 저녁 7시 무렵 방콕 한복판 에라완 사당에서 폭탄이 터져 사망자 20명에다 부상자 125명이 났다. 그동안 타이에서 무슨 폭탄이 터질 때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정부와 언론이 수사를 앞질러가며 혼란을 부추겼다.
하루 뒤인 18일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아직 수사도 조사도 제대로 된 바 없는 마당에 총리 쁘라윳 짠오차는 일찌감치 기자들한테 용의자를 “동북부 반정부 그룹으로 본다”고 내질렀다. 그 동북부란 건 2006년 쿠데타로 쫓겨난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정치적 요새로 군부를 거부해온 레드셔츠 운동의 심장부를 말한다. 쁘라윳은 육군총장 시절이던 2014년 쿠데타로 탁신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 전 총리를 몰아내고 지금 정권을 쥐고 있는 주인공이다.
쁘라윳은 소셜 미디어 사용자들한테 확인 안 된 정보를 흘리지 말라고 경고하며 언론한테는 책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오후 기자회견에서 폭탄사건 배경이 “국내 정치인지 국제 분쟁인지 또렷지 않다”고 말을 바꿨다. 육군총장 우돔뎃 시따붓은 “관점이 다른 분자들” 소행이라 했고 국방부 대변인 콩칩 딴뜨라와닛 소장은 “정치적 이권을 잃은 자들이 타이 시민의 행복한 시간을 깨뜨리겠다는 짓”이라고도 했다. 경찰청장 솜욧 품판무앙도 “범죄자가 현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신임을 깨겠다는 목적을 지녔다”며 거들고 나섰다. 저마다 에둘러 말했지만 ‘반군부·친탁신’ 진영을 겨냥한 속내였다. 굳이 따진다면 부총리이자 국방장관인 쁘라윗 웡수완 정도만 “현시점에서 정치적 동기란 증거가 없다”고 되박았을 뿐이다. 권력을 쥔 자치고 한마디 안 내뱉은 이가 없었는데 이쯤 되면 일찌감치 수사 가이드라인이 나온 셈이다.
쿠데타 인정하는 헌법의 위기
저녁나절엔 언론이 나섰다. <채널3>을 비롯한 방송과 <타이랏> <카오솟> <방콕 포스트> 같은 신문들이 앞다퉈 에라완 사당 둘레 시시티브이에서 뽑은 용의자라며 노란셔츠 사나이 사진을 올렸다. 흐릿한 그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은 오히려 유럽인처럼 보였지만 언론사들은 하나같이 ‘아랍인 닮은’ ‘중동인 인상’이라는 사족을 달았다. 그동안 무슨 범죄만 터졌다 하면 ‘외국인’을 먼저 용의자로 꼽아왔던 타이 경찰의 전통을 마구잡이 배달해왔던 언론사들 버릇은 무슬림을 향한 편견과 맞물려 이번에도 어김없이 도졌다.
여기에 중국 언론까지 뛰어들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에라완 사당이 타격점이었던데다 적잖은 중국인 희생자가 나면서 웹 포털 <시나>를 비롯한 중국 언론은 위구르 무장단체 짓이라고 떠들어댔다. 이내 영국 신문 <가디언>을 비롯한 외신들이 받아 날렸다. 곧장 타이 경찰 쪽에서도 중국 정부로부터 자치독립을 외쳐 온 “위구르 무장조직들의 복수극”이라는 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타이 언론은 부랴부랴 ‘위구르’를 실어 날랐다. 타이 정부는 지난 6월 위구르 난민 109명을 중국 정부에 넘기면서 인권단체와 국제사회로부터 큰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러자 이번에는 타이 총리실 장관 수와판 딴유와타나 같은 이들이 나서서 “위구르 소수민족은 중국 밖에서 폭탄을 사용하거나 작전을 한 적이 없다”며 그 복수극 가능성을 되받아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초법적 ‘위기위원회’ 끼워넣은헌법초안 찬반투표 20일 앞두고
시위대 유혈진압해 90여명의
사망자 낸 곳에서 폭탄 터졌다 위협용 아닌 인명살상용 폭탄
그 프로페셔널은 누구일까
누가 폭탄으로 이익을 볼까
정치적 동기 없이 짐작 힘들다 하루 뒤인 19일 오후 타이 경찰은 시시티브이에 찍힌 그 노란셔츠 외국인을 몽타주로 만들어 돌렸고 100만밧(330만원쯤) 현상금까지 걸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경찰 부청장 쁘라웃 타원시리는 용의자가 “백인, 아랍인 또는 혼혈”이라고 밝혔다. 쁘라웃은 뒤가 켕겼던지 “타이 사람이 외국인처럼 위장했을 가능성도 있다”며 빠져나갈 구멍도 잊지 않았다. 그즈음 경찰은 이미 위구르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나나 지역을 뒤지고 있었다. 근데 총리 쁘라윳은 “만약 그이들(위구르인)이 저질렀다면 지금쯤 자신들 책임을 선언했을 것이다. 3일짼데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다. 지금 그이들이 나선다면 나는 믿지 않을 것”이라며 경찰의 위구르 용의자 추정에 찬물을 끼얹었다. 사람들은 또 헷갈렸다. 이게 폭탄이 터진 뒤 이틀 동안 방콕 모습이었다. 온갖 소리들이 튀어나왔지만 시민사회는 심사만 복잡할 뿐 범인이나 사건 배경을 어림칠 만한 밑감을 못 얻었다. 다만 몇 가지 의문 속에 답이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먼저 폭탄을 따져볼 만하다. 지금껏 타이에서 터졌던 폭탄사건들이 거의 위협용에 지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대놓고 인명 살상을 노린 공격용이었다는 게 무엇보다 눈에 띈다. 경찰 발표대로라면 이번 폭탄이 3킬로그램짜리 폭약을 사용한 이른바 급조폭발물(IED)인데 이런 건 특수한 조직에서 특별한 훈련을 받은 이들이 아니면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흔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쪽 반군들이 미군 탱크를 공격할 때 써 왔던 것들과 맞먹는 수준이다. 타이에서는 군대와 남부 무슬림 분리주의 무장투쟁 세력들을 빼고는 그런 사제 폭탄을 다룰 만한 프로페셔널도 조직도 없다. 근데 남부 무슬림 무장 세력들은 지금껏 방콕을 겨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다 에라완 사당 폭발 현장 조사를 마친 타이 군과 경찰도 남부 쪽과 기폭장치가 전혀 다르다며 그 개입 가능성을 일찌감치 접었다. 그렇다면 그 프로페셔널은 누구일까? 공격 시점과 타격 지점도 마땅히 따져볼 만하다. 요즘 타이 정치판은 아주 날카롭게 돌아가고 있다. 2014년 쿠데타 군인들이 끌어온 헌법초안작성위원회(CDC)가 새 헌법에 이른바 위기위원회(crisis committee)란 걸 집어넣겠다고 우기면서 지난주부터 난리가 났다. 이 위기위원회란 건 폭동사태가 벌어질 낌새가 보이면 총리, 상·하원 의장, 합참의장, 육군총장, 공군총장, 해군총장, 경찰청장, 전직 총리, 전직 하원의장, 전직 대법원장에다 11명 하원의원을 포함한 22명 구성원이 입법, 사법, 행정을 모조리 장악하는 절대 권력을 뜻한다. 한마디로 헌법이 쿠데타를 인정하겠다는 이 발상을 놓고 정치권과 사회 각 부문이 거센 비난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동안 잠잠했던 탁신과 잉락 두 전 총리도 소셜 미디어에 나타나 국민투표로 헌법 초안을 심판하자며 거들고 나섰다. 이 논쟁적인 새 헌법 초안은 9월6일 국가개혁위원회(NRC)의 찬반 투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쁘라윳 총리의 개각 하루 전인 17일 폭탄이 터졌다. 그 타격 지점은 상업 중심지이자 외국인 관광객들이 들끓는 랏차쁘라송 거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에라완 사당이었다. 그 랏차쁘라송은 2010년 친군부 민주당 정부를 반대하던 레드셔츠 시위대를 군인들이 유혈진압하면서 90여명의 사망자를 냈던 곳이다. 정치적 동기나 배경 없이 이번 폭탄사건을 어림잡기 힘든 까닭들이다. 그렇다면 17일 폭탄공격으로 정치적 이문을 챙길 자는 누굴까? 유령만 날뛰는 타이 정치판 “드러나지 않은 혐의자는 내 마음속에 있다.” <네이션> 국제면 편집장으로 일하는 내 친구 수팔락 깐짜나쿤디 말마따나 모든 타이 사람들 마음속에는 이미 범인이 그려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2월 에라완 사당 인근 쇼핑센터 시암파라곤에서 폭탄이 터졌을 때도, 4월 관광지로 이름난 섬 꼬사무이의 쇼핑센터 센트럴페스티벌에서 폭탄이 터졌을 때도 정치적 배경을 놓고 온갖 소문만 어지럽게 나돌았다.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그 사건은 풀릴 낌새도 없다. 그때도 사람들 마음속에는 저마다 혐의자가 있었다. 친탁신 레드셔츠는 군부를 겨눴고 반탁신 옐로셔츠와 군인정부는 레드셔츠를 가리켰다. 10년 넘도록 두 동강 난 타이 사회에서 정치가 주범인 것만큼은 또렷하지만 누가 폭탄을 터뜨린 대리범인지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때마다 ‘블랙셔츠’를 범인이라 우기며 서로를 향해 삿대질만 부지런히 해댔을 뿐이다. 타이에서는 누가 그 블랙셔츠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렇다고 아는 사람도 없다. 아마, 그 블랙셔츠들도 자신들의 진짜 정체를 모르지 않을까 싶다. 유령만 날뛰는 타이 정치판에서 벌써부터 에라완 사당 폭탄사건도 영구미제로 끝날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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