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5.10 20:40
수정 : 2015.05.11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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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네팔 구르카족 군인의 영국군 복무 200돌 기념행사에서 한 군인이 구르카 군인 동상 앞에 헌화를 하고 있다. 동상 옆에는 구르카족 군인이 서 있다. 영국군 구르카여단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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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구르카족 전사’ 유명
영국 용병으로 고용되기 시작
세포이 항쟁·2차대전 전장 누벼
인도·싱가포르서도 용병·경찰로
파괴된 마을엔 퇴역병·여자들만
“전쟁에 나설 때는 총과 총알이 있어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진과는 싸울 방법이 없다.”
18살 때부터 영국군에 입대해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 홍콩에서 복무했던 퇴역 군인 발바하두르 구룽(77)은 지진으로 폐허가 된 고르카 지역의 바르파크에서 이렇게 한탄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최근 전했다. 이 마을의 또다른 퇴역 군인 다니람 갈레도 지진으로 집을 잃었다. 그의 이웃들은 건물 더미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갈레는 30년 동안 인도군에 복무하면서 받았던 메달도 지진으로 잃어버렸다며 “나에겐 가장 소중한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찾을 길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네팔을 강타한 규모 7.8의 지진은 용맹한 군인들의 고향으로 이름난 고르카(구르카) 지역을 뒤흔들었다. 이번 지진의 진앙지가 고르카 지역이었다. 도로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지역이라, 인도군이 헬리콥터를 동원해 물자 배급을 도왔다. 지진 직후 인도군의 헬리콥터를 타고 고르카 지역을 내려다본 인도 기자는 “마을들이 완전히 파괴됐다. 어떤 의미에선 네팔 지도에서 지워져버렸다”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에 전했을 정도다.
현재 구르카 용병이라고 하면 네팔 전역에서 뽑혀 외국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을 통칭하지만, 기원은 구르카족 전사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영국은 1814~16년 네팔과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구르카족 전사들의 전투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후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기 시작했다. 구르카 용병은 세포이 항쟁 때 영국 편에서 싸웠으며, 이후 인도뿐만 아니라 미얀마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활동했다. 구르카족 용병은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과 미얀마의 정글에서 싸웠고, 시리아와 그리스 등 2차 대전 전장 곳곳을 누볐다. 구르카 용병들이 사용하는 날이 휘어진 모양의 단검인 ‘쿠쿠리’는 구르카 전사들의 상징 같은 것이다. 2010년 인도군에서 복무했던 구르카족 퇴역 군인이 기차 안에서 소녀를 성폭행하려는 괴한 40명에게 쿠쿠리를 휘둘러 괴한 3명을 죽이고 8명을 다치게 한 일도 있었다.
구르카 용병은 영국군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인도에도 있으며, 싱가포르는 구르카 경찰을 운영하고 있다. 영국은 포카라 사무실에서 한해 약 200명을 군인으로 모집하고 있으며, 인도군도 네팔 전역에서 한해 3000명 정도를 군인으로 뽑고 있다. 구르카 용병의 역사가 깊은 영국은 2009년 모든 구르카 용병들에게 영국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지난달 30일에는 구르카 용병의 영국군 복무 200주년 기념 행진이 벌어졌다. 구르카 여단 3000명 중 200명이 행진에 참여했는데, 행진에 참여한 군인 중 한명은 “오늘은 기쁘면서 슬픈 날이다. 지진 때문에 1년 전에 계획된 행사를 취소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군인이며 이 상황을 견뎌야 한다”고 말했다고 <비비시>는 전했다. 영국과 인도는 구르카 용병 중 일부를 네팔로 보내 지진 피해 복구를 돕게 하기도 했다.
네팔에서 고르카 지역 사람들만 용병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국외에서 군인이 되는 네팔인 중 상당수가 고르카 지역 출신들이다. 고르카 지역 사람의 가족들 중 누군가는 대부분 군대와 관련이 있을 정도라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전했다. 고르카 지역 젊은이들은 군인이 아니더라도 이 지역의 일자리가 적기 때문에 외국으로 나간 경우가 많다. 바르파크에서 지진으로 집을 잃은 산타쿠마리 구룽(63)은 인도군에 복무했던 남편은 자신을 버렸고, 아들 둘은 말레이시아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아들도 여기 없고 형제도 여기 없다. 남편도 없다”며 “나는 이 지옥에서 내내 혼자 있었다. 아무도 내 곁에 없다”고 울면서 말했다. 바르파크 마을에는 젊은이가 필요하지만, 젊은이들은 돈을 벌러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는 게 이 마을의 풀기 힘든 문제라고 신문은 전했다.
조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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