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15㎞ 떨어진 도시 박타푸르의 차타포 마을에서 대지진으로 엄마와 외할머니를 잃은 라즈 타차모(15·왼쪽)와 그의 여동생 로자 타차모(10)가 자신들이 살던 부서진 집을 배경으로 섰다. 라즈는 전날 화장터에서 어머니 푸르나 락스미(41)와 외할머니 크리슈나 마야 고사인(76)의 주검에 직접 불을 붙였다. 네팔에선 부모의 주검에 불을 붙이는 일을 아들이 직접 해야 부모가 내세에 편하게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진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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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 네팔 소년 라즈 타차모 이야기
한국인 119 구조대가 가족 주검 찾아준
15살 소년 라즈 타차모와 함께한 사흘
지난달 29일 낮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차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도시 박타푸르는 흡사 전쟁터 같은 분위기였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폭격을 맞은 듯 허물어진 벽돌집들이 눈에 띄었다. 박타푸르는 카트만두에 비해 복구가 더뎠다. 주민들은 굳은 얼굴로 무너진 벽돌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대체 그 많은 신들은 어디로 간 거야?”
기자와 동행한 네팔 엔지오 ‘수카와티’의 대표 미노드 목탄(44)이 한숨을 쉬었다. 네팔은 ‘신들의 나라’로 불린다. 다양한 힌두교 신들이 사람들과 함께 산다고 이들은 믿는다. 심지어 작은 돌에도 신이 깃들어 있다는 게 네팔 사람들의 철학이다. 그런데 25일 벌어진 대지진의 재앙 앞에서 신은 눈을 질끈 감은 것일까.
열다섯 소년은 박타푸르 거리의 한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물 흐르듯 흘렀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딸꾹질을 하며 그억그억 소리를 냈다. 괴로운 표정의 소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엄마가 없어졌어요. 엄마가 돌 안에 있어요. 아직 못 찾고 있어요.”
소년의 이름은 라즈 타차모. 라잔의 엄마 푸르나 락스미(41)와 외할머니는 닷새째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진이 났을 때 엄마는 외할머니와 함께 집에 있었다. 소년은 바깥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어 화를 면했지만, 엄마와 외할머니는 집 안에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분명 집에 계셨는데 사람들이 못 찾고 있어요.”
무너진 벽돌 더미 안에 숨을 쉴 만한 공간이라도 있다면. 그 틈으로 엄마가 살아있다면. 라즈의 눈물이 땅바닥에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엄마 찾았대!”
친척 형인 비노드 바이나토(30)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다. 라즈의 집은 이날 오전부터 한국 정부가 파견한 119 국제구조대가 수색하고 있었다. 수색 몇 시간 만에 성과가 난 것이다. 라즈의 일그러진 얼굴은 그러나 펴지지 않았다.
“저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라즈가 비노드 형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즈가 사라진 뒤 갑자기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고 거센 비가 내렸다.
<한겨레>는 지난달 29일부터 1일까지 사흘 동안 라즈 타차모와 그의 동생 로자 타차모(10)와 함께 보내며 대지진 이후 네팔인들의 고단한 삶을 목격하고 기록했다.
지난달 29일 차타포 마을 화장터에서 소리내 울고 있는 라즈를 친척이 위로하고 있다. 사진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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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주검에 직접 불을 붙이는 라즈.(오른쪽 둘째) 사진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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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 엄마 푸르나 락스미는
외할머니와 꼭 끌어안은 채
주검으로 발견되고 말았다
한국군 구조대에 의해서였다 라즈는 친척어른 지시에 따라
활활 타오르는 나무 막대기 들어
엄마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것은 온전히 아들의 몫이다
그래야 좋은 데 간다고 믿는다
화장터 밖에서 울고 있는 라즈의 모습. 사진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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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씻겠다며 친구들과
집 밖에서 카드놀이 중이었죠
엄마는 4층 부엌에 있었어요
갑자기 집이 무너져내렸어요” 외할머니집에 얹혀살던 가족
짐꾼인 아버지도 청각장애인
전교 10등의 괜찮은 성적이지만
진학의 꿈은 접어야 할 것 같다
며칠 새 갑자기 어른이 돼버렸다 “좋은 집 구해 과일나무 심자 했는데…” 주민들에게 외국인 기자의 방문은 신기한 구경거리다. 라즈, 로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스무명 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구경했다. 라즈, 로자와 천막을 나섰다. 10여분 걸어가자 남매가 다니는 6층짜리 바게스와리(bageswari) 학교가 나왔다. 이 학교에선 초·중·고등 교육이 함께 이뤄진다. 마침 학교 앞 간이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다. 함께 밥을 먹었다. 라즈가 입을 열었다. “저희 집은 5층짜리 건물이에요. 지진이 났을 때 엄마와 외할머니는 4층에 계셨어요. 할머니는 옷을 꿰매고 계셨고 엄마는 부엌에 있었어요. 저는 엄마가 씻으라고 했는데 나중에 씻겠다고 하고 집 밖에서 친구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갑자기 땅이 흔들리더니 집이 무너져 내렸어요.” 지진이 닥친 25일 오전 11시56분의 상황을 라즈는 똑똑히 기억했다. “집이 무너졌어요. 3층까지는 그래도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었어요. 4층과 5층은 무너지고 없었어요. 3층에 올라 할머니를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어요. 다시 땅이 흔들렸어요. 집을 다시 나와 외삼촌 사티아 람에게 엄마와 외할머니가 4층에 계셨다고 말했어요. 외삼촌은 제가 더이상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어요. 하지만 일요일(4월26일)과 월요일(27일)에 계속 삼촌 몰래 집에 가보았어요. 저는 엄마가 돌아오시기를 계속 기다렸어요.” 엄마 이야기를 꺼내면서 라즈는 다시 눈물을 쏟았다. “저에게 엄마는 세상의 전부예요. 학교 숙제도 도와주셨어요. 엄마는 말을 못하는 장애가 있어요. 아빠도 같은 장애가 있고요. 사람들은 엄마 말을 못 알아들어요. 하지만 저는 알아들어요. 엄마는 우리 남매에게 나중에 꼭 좋은 집을 구해 마당에 과일나무도 심고 행복하게 살자고 했어요.” 남매의 집은 풍족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짐꾼으로 일하며 하루하루 근근이 버텼다. 가족은 외할머니 집에 얹혀살았다. 그런 집마저 이제 사라지고 외할머니도 돌아가셨다. 라즈는 이제 9학년(고등학교 1학년)이고 동생 로자는 5학년(초등학교 5학년)이다. 남매는 둘 다 학교에서 10등 정도 했다. 한 학년에 150여명 정도 있다고 한다. 이 정도 성적이 10학년까지 이어지면 대학 진학도 가능하다. 네팔에서는 10학년 때 에스엘시(SLC·일종의 수학능력시험)를 치르고 2년 더 공부한 뒤 대학 진학 시험을 치른다. 그러나 라즈는 진학의 꿈을 접은 듯 보였다. 소년은 며칠 새 갑자기 철이 들어버렸다. “저는 과학 공부를 좋아해요. 하지만 10학년까지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둬야 할 거 같아요. 큰이모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서 장학금까지 받고 공부했지만 결국 돈이 없어 졸업을 못했어요.” 라즈는 자신이 대학을 갈 수 없는 형편이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집까지 무너진 상황에서 당연한 판단일 것이다. “외삼촌은 호텔 버스를 운전해요. 친척들이 저를 어딘가에 취직시켜주지 않을까요?” 속눈썹이 긴 라즈가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말했다. 라즈 옆에서 음료수를 홀짝홀짝 마시던 동생 로자가 갑갑한 듯 몸을 꼬았다. 로자가 입고 있던 후드티의 목 부분이 찢겨 있었다. 집이 무너질 때 로자의 옷이 다 사라져 친척 오빠가 입던 옷을 빌려 입었다고 했다. “저는 의사가 되고 싶어졌어요. 다친 사람들 많이 보니까 치료해주고 싶어요.” 가재도구 챙기러 집에 갈 필요가 없네 아이들과 차타포 마을에 있는 집에 갔다. 10여분을 함께 걸었다. 마을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무너진 벽돌더미들이 남매의 집 50여m 앞부터 쌓여 있었다. 무릎 높이까지 쌓인 벽돌더미를 올라 집 앞으로 걸어갔다. 마을 주민들은 무엇 하나라도 더 건질까 싶어 무너진 집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집의 폭이 5m 남짓 될까. 좁은 터에 5층까지 올려진, 아니 이제 허물어져 3층까지만 남아 있는, 폐허의 벽돌집이 남매가 살던 집이었다. 1층의 출입문은 벽돌더미에 파묻혀 반 정도만 공개돼 있었다. 허리를 숙여 반파된 건물 안으로 잠시 들어가보았다. 2층에 올라서자 흙먼지가 낀 구두 한 켤레가 보였다. 주전자와 냄비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라즈의 가족들이 다른 이웃들처럼 열심히 가재도구를 챙기러 오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집에는 원래부터 값나가는 살림살이가 없었다. “더르락처.”(무서워) 로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얼른 주운 것들을 집어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구두를 건네자 라즈가 “제가 학교 갈 때 신는 구두예요”라고 말했다. 남매를 데리고 집터를 떠났다. 엄마와 외할머니는 4층에서 숨졌다. 4층 천장이 무너졌을 뿐 나머지 아래층은 멀쩡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구조대가 투입돼 엄마를 발견했더라면 혹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라즈가 말했다. “내가 분명 엄마가 저 위에 있다고 말했는데 어른들은 제 말을 듣지 않았어요.” 얇은 슬리퍼 위에 맨발을 얹은 라즈가 진흙탕이 된 골목길을 걸어가며 말했다. 오후 5시. 하늘에 석양이 깔렸다. 들판의 벼들은 익어가고 멀리 보이는 산은 푸르렀다. 염소들은 느긋하게 들판에서 낮잠을 잤다. 자연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지만 사람들만 혼란 속에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진이 다시 찾아온다는 말이 전해졌다. 지진은 예고가 없다. 괴소문이지만 주민들은 불안했다. 타차모 남매의 가족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 사당으로 갔다. 주검의 화장은 끝났지만, 아직은 장례 기간이다. 남매의 몸에 다시 카스토라고 불리는 하얀 천이 씌어졌다. 사당 앞마당에는 짚 돗자리가 깔렸다. 마을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각각 다른 돗자리를 깔고 앉았고, 여자들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로자의 눈에도 금세 눈물이 맺혔다. 남자들은 손에 쥔 하얀 쌀을 조금씩 먹었다. 사당 한가운데 돌탑에 새겨진 힌두신 조각상이 황망한 애도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의식이 끝난 뒤 라즈가 말했다. “많이 아프지 말고 편하게 가시라고 했어요.” 13일 동안 라즈는 고기, 렌즈콩 등 음식을 먹지 못한다. 1년 동안은 우유도 먹을 수 없다. 힘겨운 저승길에 오른 어머니를 생각해 자식도 최소한의 고통을 나누는 것이라고 취재에 동행한 미노드 목탄이 말했다. 타차모 남매는 기자를 남겨두고 또다른 의식을 치르기 위해 사당을 떠났다. 곧 해가 졌다.
주민들이 라즈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주검을 옮기고 있다. 사진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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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113997-18-482
(Chijman gur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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