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4.08 20:36
수정 : 2015.04.08 21:58
‘아시아 재균형’ 정책 성과에
한-일 갈등이 걸림돌 판단
미국이 한-일 과거사 갈등과 관련해 ‘일본 편들기’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올해 초부터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월 초 새해 기자회견에서 올해 8월 내놓을 ‘아베 담화’에 전쟁에 대한 반성과 함께 앞으로 아시아와 세계에 어떻게 공헌할지 등을 담겠다고 밝혔는데, 미국은 이를 건설적인 방향이라고 평가했다. 최근 아베 총리가 <워싱턴 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인신매매의 희생자”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도 미국은 여기엔 성노예도 포함된다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아베 총리가 과거사 문제에 어느 정도 성의 표시를 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충격적”이라고까지 표현하면서 일본을 압박하던 모습을 올해 들어선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오히려 웬디 셔먼 국무부 정무차관이나 애슈턴 카터 국방장관의 발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제 과거는 뒤로하고 미래를 향해 함께 가자’는 메시지를 던지는 데 주력하고 있다.
미국의 이런 태도 변화에는 임기를 1년9개월가량 남겨둔 오바마 대통령의 조급증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은 핵심 외교정책인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발표한 지 4년이 다 돼 가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군사·외교·경제의 중심을 아시아로 이동하겠다는 이 정책은 실제로는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이 정책은 미국에 대한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특정 지역에서 패권국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전통적 대외전략인 ‘세력균형론’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최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 문제에서 본 것처럼 미국은 오히려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는 데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동아시아 최대 동맹국인 한·일이 과거사 문제를 놓고 몇년째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을 더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인식이 워싱턴 조야에서 커진 것은 이런 상황과 관련돼 있다. 미국은 군사적으로 한-미-일 삼각 안보협력 체제를 강화해 대중국 견제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으나, 한-일 갈등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집단자위권 확대와 군비 증강 등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확실한 ‘대리인’이 되겠다는 아베 총리의 행보에 미국은 반색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아베 총리는 오는 26일 미국을 방문해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티피피) 타결이라는 전략적 이해관계가 걸린 두가지 사안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내놓을 것으로 전망된다. 방위협력지침에 대해선 양국간의 의견 조정이 상당히 마무리된 것으로 관측된다. 카터 장관은 8일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일본이 이 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안전에 공헌하기 위해 더 적극적인 역할을 다하려는 노력을 환영하고 지지한다”고 밝혔다. 다만 티피피 타결을 위해 일본이 어느 정도 양보를 할지는 아직 분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일본은 지난해 4월 오바마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에 대한 미국의 방위 공약을 이끌어내고도 티피피에 대해 미국이 원하는 답변을 내놓지 않아 미국의 애를 태운 바 있다.
한-일 과거사 문제는 미국의 전략적 이해가 걸려 있는 이런 사안들에 견주면 미국엔 부차적이다. 미국 주류 사회는 한-일 과거사 문제는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미국이 1905년 필리핀의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인정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나 독도 분쟁의 씨앗을 뿌린 1953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지금의 한-일 갈등이 생기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아는 미국인은 역사학자나 일부 양심적 지식인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워싱턴·도쿄/박현 길윤형 특파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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