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3.23 21:02
수정 : 2015.03.23 21:28
23일 타계 리콴유가 남긴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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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타계한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가 2013년 3월20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스탠더드차타드 포럼에 참석했을 때의 모습. 싱가포르/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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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 전 총리가 23일 세상을 떠났다. 싱가포르 총리실은 이날 “리 전 총리가 싱가포르 종합병원에서 새벽 3시18분에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향년 91.
리 전 총리는 지난달부터 폐렴으로 건강이 악화돼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싱가포르 정부는 장례식이 거행되는 29일까지를 국가 애도 기간으로 선포했다. 많은 싱가포르인들이 리 전 총리가 입원했던 병원 앞 등에 헌화하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리 전 총리의 아들인 리셴룽 총리는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연설에서 “많은 싱가포르인들에게 리콴유는 싱가포르 자체였다”고 말했다.
부유한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원형을 설계하고 만든 리콴유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논쟁적인 지도자였다.
30여년 재임 총리 물러난 뒤에도
원로장관·고문 등 맡으며 쥐락펴락
현 리셴룽 총리도 그의 아들
“싱가포르 자체였던 인물” 평가
작은 섬나라를 금융허브로 키워
1인당 GDP 550달러5만달러로
규제 완화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
언론 자유는 억압 권위주의 통치
90년대 DJ와 아시아적 가치 논쟁
중국 이민자 4세로 태어난 리 전 총리는 1959년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싱가포르가 자치권을 획득했을 때 총리가 됐으며,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독립한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를 맡아 1990년까지 통치했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2004년까지 ‘원로장관’이란 직함을 가지고 내각 각료직을 유지했고, 그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2011년까지 고문장관(minister mentor)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퇴임 뒤 원로장관이던 그는 고촉통 2대 총리를 “나의 총리”라고 불렀다.
그는 현대 싱가포르를 탄생시키고 키웠다. 그는 애초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연방의 구성원으로서 영국에서 독립하려는 청사진을 그렸다. 하지만 중국계가 다수인 싱가포르에서 중국계와 말레이계 사이에 인종적 갈등이 폭력사태로 번지자,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사실상 추방해 버렸다. 서울보다 약간 큰 면적에 천연자원도 거의 없는 싱가포르가 주권국가로 생존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는 믈라카(말라카) 해협의 요충지라는 특징을 살려 싱가포르를 물류·금융의 허브로 키우는 성장전략을 구상해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1950년대 550달러였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그가 총리에서 물러난 1990년 5만달러 수준으로 도약했다. 싱가포르는 선박 연료 적재량 기준으로 세계 1위의 항구이며, 2014년 1인당 국내총생산은 세계 8위(5만6113달러)다. 관료들의 급여를 민간기업 수준으로 유지하는 대신 부패를 철저히 처벌하는 정책 등을 펴 관료들의 부패가 드문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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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가 별세한 23일, 그가 폐렴 치료를 받은 싱가포르종합병원에 마련됐던 ‘쾌유 기원 장소’에 사람들이 애도를 표시하기 위해 모이고 있다. 싱가포르/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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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경제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적 유산을 두고서는 논란이 많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그가 이룩한 싱가포르 모델을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로 평가했다. 그는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와 세금 감면으로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었으나, 언론 자유를 억압했으며 민주주의도 경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는 청년 시절 싱가포르 등을 점령한 일본군의 선전활동 담당부서에서 일한 경험도 영향을 미쳤다. 자서전 <싱가포르 스토리>에서 그는 “3년 반 동안의 일본군 점령 시절은 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정부의 절대적 필요성, 그리고 권력이야말로 혁명적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점은 내가 점령 시절을 겪지 못했더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나는 언제나 마키아벨리가 옳다고 여겼다. 아무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가치가 없다”고 말한 적도 있다.
특히 인민행동당(PAP) 일당 통치가 독립 뒤 60년 동안 계속되고 있으며, 야당의 활동을 제한하고 반체제 인사를 탄압해왔다. 인권단체들은 리 전 총리가 경제적 발전이라는 성과를 이뤘지만, 정치적 반대자들을 투옥하거나 추방하는 등 철권통치를 펼쳤다고 비판한다. 싱가포르 의회에서 60년간 야당 출신 의원은 12명밖에 없었다. 리 전 총리는 자신의 통치 아래서 민주화가 정체되고 자유가 억압받았다는 비판에 대해 2007년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며 “싱가포르의 생존 자체가 우리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했다.
1994년 그와 김대중 전 대통령 사이에 벌어진 아시아적 가치 논쟁은 유명하다. 리 전 총리는 당시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와의 인터뷰에서 “서구적 의미의 민주주의 개념은 동아시아에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포린 어페어스> 기고를 통해 “아시아의 문화가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뿌리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반박했다.
리 전 총리는 침 뱉지 말기 같은 각종 규칙을 만들어 국민의 일상생활에도 국가가 강력히 개입하도록 했다. 이런 규칙을 어기면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존재한 태형 등으로 처벌한다. 1994년 기물 파손 등의 혐의로 체포된 미국 청소년 마이클 페이에 대해 싱가포르 정부가 태형을 집행한 것은 국제적 논란을 일으켰다.
리 전 총리 사후 싱가포르는 국가 발전 방향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지게 됐다. 올해 독립 50돌을 맞는 싱가포르는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2.9%에 머무는 성장의 정체와 소득불평등 심화 같은 문제를 안고, 정치적 자유 확대에 대한 욕구가 분출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리셴룽 정부는 최근 부유층의 세금을 인상해 이를 의료 등 사회보장 확대에 쓰기로 하는 등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각국 지도자들의 애도 메시지도 잇따르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리 전 총리가 “역사의 진정한 거인이었다”고 했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국제사회에서 전략가이자 정치인으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었다”고 애도했다.
조기원 석진환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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