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지난달 17일 서부 자바의 푸르와카르타에서 차창을 내리고 지나가는 유권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푸르와카르타/이맘 에스 <템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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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쏙] 인도네시아 정권교체 이끈 조코위 신드롬
1985년 족자카르타의 가자마다대학교 임학과를 졸업한 뒤 맨손으로 시작해 가구 수출업자로 성공한 조코위는 2005년 고향인 중부자바의 솔로(수라카르타) 시장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20년 사업 경력으로 익힌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을 시정에 적용했다. 성공적인 식사 자리는 계약과 함께 끝난다는 ‘식탁 로비’가 그것이었다. 빈민가 출신 자수성가 사업가서정치입문 10년만에 대통령 당선
사람들 마음 움직이는 ‘밥상 정치’
특권버린 검소·소탈한 이미지에
시민들 모금·SNS 통해 선거운동 부패·결탁·족벌주의로 대표되던
수하르토 정권 ‘신질서’와 결별
인니 ‘민중의 승리’로 한껏 들떠 당시 솔로 시의 최대 현안은 포화상태인 노점을 재배치하는 문제였다. 조코위는 노점상들과 직접 만나 밥을 먹었다. 상인들을 시장 관사로 초대하거나, 직접 노점으로 찾아갔다. 53번이나 함께 밥을 먹었지만, 노점 재배치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마침내 상인들과 마음이 통했다고 판단한 조코위는 54번째 점심식사 후 상인들에게 “선생님들, 나는 노점을 재배치할 겁니다”고 말했고, 상인들은 모두 동의했다. 이후 조코위는 시의회의 동의를 얻어 무료 매대을 만든 뒤, 물리적 충돌 없이 노점을 재배치하고 전통시장을 부활시켰다. 이같은 서민친화적 리더십과 ‘블루수칸’(불시에 현장을 방문한다는 뜻의 자바어)으로 불리는 현장형 업무스타일이 그가 대권을 거머쥘 수 있게 만든 핵심 자산이다. 조코위는 1961년 6월21일 솔로 도심 강가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쫓겨나고 이사하기를 반복하며 자랐다. 서민 출신의 성공한 수출업자에서 지방도시의 시장으로, 이어 수도 자카르타의 주지사를 거쳐 마침내 대통령이 된 ‘조코위 서사’는 인도네시아 정치의 새 시대를 상징한다. 유권자들이 조코위에게 열광한 가장 큰 이유는 ‘나같은 보통사람’이라는 점이다. 시타 데위 <자카르타 포스트> 기자는 “선거운동 구호로 정한 ‘조코위는 우리다’가 당락을 갈랐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여성과 결혼한 뒤 욕심없이 간소한 삶을 살고 있는 조코위는 인도네시아 정치권에서 전에는 볼 수 없던 인물”이라고 평했다. 서민층이 조코위를 자신들의 요구를 이해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봤다면, 중산층은 자신들이 내는 세금을 허투루 쓰거나 뒷돈을 챙기지 않을 사람으로 보고 그를 지지했다. 젊은층은 록 메탈 음악을 들으며 ‘헤드뱅잉’을 하는 그에게서 ‘쿨한 정치인’을 봤다. 관영 <안타라> 통신의 이다 누르차흐야니 기자는 “브랜드 없는 운동화를 신고, 자카르타에서 가장 흔한 차종인 도요타 ‘키장 이노바’를 타고 다니며, 격식없이 사람들을 만나는 조코위를 시민들은 ‘나와 비슷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정치권 진출 10년도 안돼 그가 대선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대중적 인기 때문이었다.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투쟁민주당 대표는 애초 자신이 직접 세번째 대권 도전에 나설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자카르타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내 원로와 중진들이 조코위를 후보로 지명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메가와티 역시 “조코위를 보면 아버지(수카르노 초대 대통령)가 떠오른다”는 말로 당원들의 요구에 호응했다. 지난 3월14일 공식 대선 후보로 확정되기도 전에 조코위의 지지율은 40%에 육박했다. 일간 <코란템포>는 “조코위를 투쟁민주당 대선 후보로 만든 것은 시민들이다. 그들의 강력한 지지가 세번째 대권 도전을 노리던 메가와티의 마음을 돌렸다”고 전했다. 지지율 등락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선거를 앞두고 조코위의 당선을 의심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격차를 줄이지 못한 프라보워 쪽은 서부 자바를 중심으로 조코위가 ‘중국계 기독교인’이라는 내용의 흑색선전물을 뿌리고, 일부 지역에선 돈까지 뿌렸다. 소식이 알려지자 조코위의 지지자들은 자발적으로 모금을 해 ‘모두를 위한 이로움’이란 선전물을 찍어 배포했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5일 자카르타의 붕카르노 경기장에서 록그룹 슬랭크 등 가수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콘서트에 12만여명이 운집하기도 했다. 2014년 인도네시아 대선은 한국의 2002년과 2012년 대선을 동시에 떠오르게 한다. 맞붙은 두 후보 조코위와 프라보워가 상징하는 바가 그렇다. ‘특권과 작별한 시민중심 참여형 리더십’을 내세운 조코위의 등장에 열광한 시민들은 그를 대권 후보로 끌어올렸다. 2002년 대선 당시 불었던 한국의 ‘노무현 열풍’을 떠오르게 한다. ‘수하르토 시대의 부활’을 꿈꾸며, 강력한 국가 주도형 리더십을 강조한 프라보워의 선거운동은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를 연상시킨다. 수하르토 묘지 참배로 선거운동을 시작한 프라보워는 지금은 헤어진 전 부인 티틱(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둘째딸)을 대동하고 전국의 유세장을 돌았다. 당선되면 수하르토를 국가영웅으로 추대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수하르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골카르당의 아부리잘 바크리 당대표는 프라보워 선거유세에 나서 경제적으로 풍족했던 수하르토 집권 당시의 ‘좋은 시절’로 돌아가자고 호소했다. 조코위 열풍에 내내 시큰둥했던 부동층이 막판 대거 투표장으로 몰린 것도 이같은 ‘수하르토의 화신들’이 부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신 질서 시대여, 안녕.’
이슬기 <템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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