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4일 오후 서촌의 조용한 카페에서 구수정씨를 만났다.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베트남전 사죄운동의 계기를 만들었던 그는 “학살의 기억을 가진 분들이 이제 몇 안 남았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들의 고통이 별반 달라진 게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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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베트남 평화활동가 구수정
“차라리 총을 쏴서 깨끗하게 죽이지, 차라리 날 선 칼날로 심장을 찔러 한 방에 죽였으면 그래도 덜 고통스러웠을 텐데…. 한국군 총검은 날이 무뎠다오. 그러니 네살배기 나는 아홉 방을 찔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흘 밤낮을 피를 흘리면서도 물 한 방울 못 먹고, 고통으로 온몸을 뒹굴면서 그렇게 죽어갔다고요.”(구수정의 페이스북, 베트남 푸옌성에서 만난 생존자 ‘크엉’의 구술기록)
구수정(48)이 전하는 베트남인들의 이야기는 처참하고 섬뜩하다. 박영한이나 안정효, 황석영처럼 소설을 통해 월남(베트남)전의 진실을 알려온 이들이 대개 월남전 경험이 있는 남성이어서일까,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남자일 거라고 지레짐작해온 내가 머쓱해졌다. 경복궁 담장이 마주 보이는 서촌의 조용한 카페에서 만난 구수정의 첫인상은 수더분하고 차분했다. 15년 전, <한겨레21>을 통해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양민학살 사건을 최초로 발굴 취재했을 때 그는 호찌민대 역사학과 석사과정 학생이었다. 2008년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그는 여전히 베트남의 오지를 찾아다니며 전쟁과 살육의 광기를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는 왜 잊혀져 가는 과거사의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고 다니는 걸까? 아픈 상처를 헤집어 그가 굳이 찾아내고자 하는 진실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베트남전 참전 50주년이 되는 올해, 그에게 베트남이란 어떤 의미인지 묻고 싶었다.
“거긴 아직 전쟁 중 아니냐?” 어머니의 단식 만류 뒤로하고
대책 없이 향한 베트남에서 찾은
베트남전쟁의 숨겨진 이야기
한국사회 사죄운동 단초가 되다
피맺힌 그들의 증언 수집할 때
열명 넘게 죽은 유족 앞에서
차마 이야기 못 꺼내던 할머니
“난 한명… 내 유일한 아이가…”
그들의 울음 꾸역꾸역 삼키다 ‘불멸의 불꽃처럼 살아’에 매료되어… -한국엔 자주 오시나? “일년에 한번 정도? 보통 이맘때쯤 나온다. 겨울엔 엄두가 안 나고.” -겨울엔 왜? “난 추운 게 제일 싫다.(웃음)” -계속 베트남에 머물 생각인가? 한국에 돌아올 생각은 없나? “2008년 박사논문 끝났을 때 잠깐 생각한 적 있고, 그 이후로 한국 와서 살까 하는 생각을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엔 어째서? “지난 17년간 뭔가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피해자 얘기도 많이 듣고 이런저런 사업도 많이 벌이고…. 그런데 막상 (학살피해 현장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이 사는 걸 보면 하나도 변한 게 없다. 그리고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 지난 1999년도에 처음 취재할 때 만났던 분들 대부분이 지금은 돌아가셨고 학살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은 이제 몇 안 남았는데, 내가 그분들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그들의 고통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그걸 보면서 한계를 많이 느낀다.” 그가 느끼는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구수정의 글이 베트남과 한국 사회 양쪽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그의 기사로 말미암아 한국의 청년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베트남 양민학살에 대한 사죄운동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고, 이 열기는 평화박물관과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등 평화운동단체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베트남의 유력 언론 <뚜오이째> 등이 그의 기사를 받아 대서특필하면서 구수정은 ‘한국의 양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떠올랐고, 지금까지 한국과 베트남 간 민간교류의 중요한 다리 구실을 맡아왔다. 2000년 베트남 외무장관 응우옌지니엔은 구수정의 “아름답고 존경받을 만한 행동”에 감사하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우리가 베트남전의 진실에 대해 아는 것의 절반은 구수정 박사한테서 나온 것”이란 얘길 들었다. 베트남에 관한 독보적 전문가로 꼽히는데 비결이 뭔가? “모르겠다. 비즈니스나 학계 쪽은 따로 전문가가 계실 테고 나는 자신을 ‘활동가’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 테두리 안에서 베트남 사람하고 소통하는 능력은 있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은 일정 부분 구수정이라는 개인을 하나의 ‘통로’로 믿고 있는 것 같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든 전달해주는 통로.” 구수정이 처음 베트남에 발을 디딘 것은 1993년, 만 스물일곱살 때였다. 한신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진보적 학술잡지 <사회평론>에서 일하다가, 선배를 따라 김대중 선거캠프에 잠시 몸담았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한 번도 디제이가 최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막상 선거에서 지니 “차선도 안 되는 세상에서” 사는 게 문득 역겨워졌다. 베트남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거기 아직 전쟁 중인 나라 아니냐”며 단식까지 하고 만류하셨지만 구수정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90년대 초반, 러시아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게 붐이었다. 왜 베트남을 택했나? “왜 베트남을 고집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한국을 떠나야지 생각할 때 머리에 떠오른 게 베트남뿐이었다.” -평소 베트남에 관심이 많았나? “베트남어도 할 줄 모르고 아무 연고도 없었다. 다만 학교 다닐 때 베트남에 대해서 공부를 좀 했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책이 <사이공의 흰옷>과 <불멸의 불꽃으로 살아>라는 소설책이었다. 특히 <불멸의 불꽃으로 살아>(원제: 그대처럼 살리라)는 항미전사 응우옌반쪼이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었는데 그 표지사진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총살을 당하면서도 ‘눈가리개를 벗겨라. 내 조국의 청명한 하늘을 보고 싶다’고 말하고 마지막 구호를 외치며 죽었다는 이야기가 굉장히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사회주의 베트남에서, 정치적 폐쇄성이 강한 역사학과에 외국인 신분으로 입학한 건 구수정이 최초였다. 당시 <시사저널> 보도에 따르면, 구수정은 석사과정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고도 당국의 입학허가를 얻지 못해 여덟번이나 하노이 교육부를 찾아가 장관 면담을 했다고 한다. 대학원에 들어간 지 2년8개월이 지나 뒤늦게 공식 입학허가를 얻은 데는, 그의 뛰어난 학업 성적도 한몫을 했다. 베트남 민속학 시험에서 역사학과 개설 이후 최초로 10.0 만점을 받아 교수위원회 심의에 회부되는 일도 있었을 정도로, 구수정은 베트남 학생보다 뛰어난 베트남사 연구자였다. 너무 끔찍해서 도저히 믿지 못했던 이야기 -언제부터 한국군 민간인학살을 연구하게 되었나? “처음엔 민간인 학살을 가지고 논문을 쓰게 될 줄 몰랐다. 1997년에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에 관한 논문을 쓰려고 백방으로 자료를 찾다가 하노이 외무부 국가문서보관센터에서 어렵사리 문건 하나를 입수했다. 제목이 <남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인데 일부러 출처가 적힌 부분도 찢어버리고 여러번 복사를 했는지, 판독도 어려운 40쪽짜리 문건이었다.” -입수 경로가 불투명한, 출처 불명의 자료라면 학술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출처 확인을 여러번 했는데, 1980년대 초반 베트남 정치국에서 전쟁범죄 조사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만들어진 자료일 거다, 이 정도로 확인이 되었다. 어쨌든 베트남 국가 차원에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최초의 조사였고 통계까지 나와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이 자료를 읽으면서도 그 내용을 믿지 못했다.”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반신반의했단 얘긴가? “반신반의가 아니고… 아예 믿지를 않았다.” 문건의 내용을 의심하며 일년쯤 묵혀만 두고 있었는데, 1998년 일본의 피스보트를 타고 우연히 한국군 학살지역을 둘러보게 된 작가 강제숙, 김현아가 큰 충격을 받고 구수정에게 달려왔다. 구수정은 그들에게 가지고 있던 자료를 처음 내보이며 “나도 믿기진 않지만 사실 확인이라도 해보자”고 다짐했다. 한달 뒤, 봉고차 한 대를 빌려서 자료 하나 달랑 들고 문헌에 나온 옛 지명을 찾아 탐사를 시작했다. 45일간 새벽 네시부터 밤 열한시까지 혼자서 하루 세 마을 이상 도는 강행군이었다. 관광지도 아닌 곳에 외국인이 나타나 인터뷰를 하고 다니니 공안에 잡히기도 여러 차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기도 수차례 거듭했다. -마을 사람들 반응은 어땠나? “학살 이후 30년 만에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나게 되니, 쫙 소문이 돌아 가지고 내가 가면 마을마다 100여명이 달려 나왔다. 모든 사람이 일제히 손을 들고 ‘카이, 카이!’ 하면서… ‘카이’는 ‘진술한다’는 뜻인데 좀 공식적인 의미가 있다.” 수십년간 묻어두었던 피맺힌 사연들이 쏟아져 나왔다. 민간인 학살과 강간, 영아 살해와 방화, 암매장…. 카인호아성에서 시작해서 푸옌성을 거쳐 꽝남성까지 한국군 주둔지를 따라 올라가는 동안 수천명의 끔찍한 학살담을 듣고 또 듣다 보니 “이제는 도저히 더 이상 들을 수가 없다”고 주저앉고 싶을 정도에 이르렀다. -정서적으로 감당이 안 되었겠다. “시간이 없으니 한 사람당 5분에서 10분씩 듣는 건데 그 시간 동안 들을 수 있는 얘기가 빤하지 않나. 한국군들이 토끼몰이를 했어, 다연발총을 발사하고 수류탄을 던져서 다 죽였어, 그래서 내 가족이 몇 명 죽었어…. 이 얘기를 수천번 반복해 듣다 보니 결국 모든 이가 똑같은 말을 되뇌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서적으로뿐만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정말 감당이 안 되었다.” 빈딘성 박물관에서 한국군 관련 아카이브를 발견한 건 큰 수확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채록하고자 했던 내용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고 희생자 명단과 학살의 동선까지 기록된 자료를 보고 나니 “사람이 약아져서” 꾀가 났다. 이후부터는 마을에 가면 노트부터 나눠주고 각자 거기 학살피해를 써내라고 했다. 문맹이 태반인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대고 비뚤비뚤 진술서를 썼다. -그래서 수고를 좀 덜었나? “그래도 한두 사례는 들어야 하겠어서 ‘내게 두 분만 얘기를 해주시오’ 했더니 또 카이, 카이 하는데, 어떤 이가 ‘내 식구는 여섯명 죽었어요’ 하니까 여기저기서 ‘나는 열세명’, ‘열일곱’… 막 이렇게 소릴 지르는 거다. 그때 나도 모르게 ‘아, 열일곱? 그럼 이야기해 보세요’ 했다. 그렇게 얘길 듣는데, 맨 앞에서 계속 나랑 눈을 마주치려는 할머니가 하나 있었다. 너무너무 말씀을 하고 싶은 눈빛이었는데 애써 시선을 피하면서 ‘나는 이제 시내로 돌아가야 해요’ 그렇게 인사를 하곤 마을을 떠났다. 그러곤 한참 떨어진 차도까지 걸어 나오는데 그 할머니가 계속 날 쫓아오는 거다. 나는 또 붙들려서 얘기를 들을 수가 없는데…. 내가 뛰어가면 할머니도 뛰어오고 내가 멈추면 할머니도 멈추고, 그래도 나는 내 길을 가고 싶었다. 봉고차에 올라 문을 쾅 닫고 출발하는데 그 늙은 할머니가 차 뒤에서 따라 뛰는 게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할 수 없이 차를 멈추고 할머니한테 물었다. ‘뭐요? 도대체 왜요?’ 그러면 또 암말이 없었다. 그래서 화가 나서 다시 출발하면 또 따라오고, 멈추면 입을 닫고…. 그렇게 몇 번을 하다가 나중엔 너무 화가 나서 차에서 뛰어내려가 나도 모르게 할머니 멱살을 흔들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빨리 해요. 너무 늦었고 난 피곤한데…’ 그랬더니 할머니가 하셨던 말씀이….” -뭐라고 하시던가? “‘난 한명만 죽었는데….’ 그 한명이 할머니의 유일한 아이 하나였다. 그 상황이 너무 화가 나서(울먹) 또 할머니한테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한텐 그 하나가 전부인데… 왜 말을 못해? 왜!’” -…….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 나도 모르게 신발짝을 벗어서 땅을 치면서 엉엉….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는데 옆엘 보니 할머니도 나랑 나란히 신발 한 짝을 벗어서 땅을 치며 울고 계셨다. 그때 할머니한테 말했다. ‘할머니, 미안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말했다. ‘아가! 내가 다 안다. 갈 길이 먼데 이제 가라.’ 그렇게 돌아왔다. 그때 생각했다. 아, 내가 석사 하고 박사 하고 교수 하면 정말 이 이야기가 더는 안 들리겠구나. 공부를 멈춰야겠다.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해야겠다.” 구수정은 이후 한국의 대학에서 오라는 제안도 뿌리쳤다. 그 뒤로 지금까지 그는 학살 피해자들의 폐부에 쌓인 고통스런 기억을 듣고 또 듣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있다. 듣는 일은 힘겹다. 380명이 학살당한 고자이 마을에서 채 이름도 짓지 못한 채 죽은 영아가 50여명이란 얘기를 들으며, 온몸에 화상을 입고 죽어가는 딸아이를 찾아 두 다리가 잘린 채 무릎으로 기어 다닌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구수정은 그들의 울음을 꾸역꾸역 자기 안으로 삼킨다. “그들의 이야기가 내 안으로 들어오면 마치 무병이라도 앓듯 몸이 아프다. 먹으면 토하고 열이 오르고 오한이 들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온몸의 뼈 마디마디가 다 쑤신다. 이야기를 토해낸 그들도 아프고, 그 이야기를 받아낸 나도 아프다.”(구수정 페이스북, 2014. 5.14.) 둘이서 함께 연주하는 ‘아맙’처럼 -1999년, 당신의 글로 촉발되어 <한겨레21>이 피해자를 위한 모금운동과 함께 연재하기 시작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기사는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6월 ‘대한민국 고엽제후유의증 전우회’가 보도에 격분해서 한겨레 사옥에 난입한 일도 있었고, 2000년 제주인권학술회의에 당신이 발표하는 걸 막으려고 일부 베트남 참전 군인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나? “한겨레 난입이 있던 날, 한국의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는데 ‘난리가 났다’고. 집 주변 동네에 온통 빨간 칠을 하고 집 앞에 염산을 드럼통으로 세 통이나 놓고 갔다고 했다. 집 식구들은 오랫동안 고생들 하셨다. 나도 베트남에 있으면서 그 무렵엔 6개월 단위로 거처도 옮기고 한국인 거주 지역엔 가지도 못했다. 지금은 좀 바뀐 것 같다.” -지만원 박사 같은 사람은 당신 이름을 거론하며 이렇게 반문한다. “베트남 사람들도 들추려 하지 않는 주제, 국익에 역행하는 주제를 왜 제기하고 나서는가?” 당신은 뭐라고 답할 텐가? “베트남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소설 <머나먼 쏭바강>의 배경지가 되었던 푸옌성에 76년 두 개의 증오비가 들어섰다. 우리 전쟁 직후를 떠올려보라. 피죽도 못 먹는 상황인데. 그 긴 전쟁 치르고 나서 사람들이 마을에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이, 한국군에 대한 ‘증오비’를 세우는 일이었다. 한국군이 마을에 와서 어떻게 학살을 했는지 그림이나 글, 도표로 꼼꼼히 기록해두는 일. 베트남 정부도 이 일에 시멘트를 지원했다. 베트남 정부가 과거를 딛고 미래로 가자고 말하지만, 이렇게 증오비, 위령비가 세워지는 일을 막은 적은 없다. 실제로 민간인 학살 자료는 아카이브 자료로 남아 있다. 공식적 기억으로 간직하는 거다.” -우리의 치부를 들춰내 국익에 역행한다는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한국의 ‘나와 우리’라는 단체가 호찌민대 한국어학과 청년들 모임인 ‘굿윌’과 함께 지난 10년간 베트남 학살지역에 들어가 꾸준히 마을을 돕는 일을 해왔다. 거기서 먹고 자면서 집을 짓고 다리를 놓고 길을 내고…. 그런 지역은 한국인이 가도 마을 사람들이 다 튀어나온다. 서로 자기 집으로 끌면서 밥 먹고 가라고. 반면에 아무 작업도 못 했던 지역은 여전히 적대적이다. 동네 아이에게 사탕을 쥐여주어도 한국 사람이 준 거라며 뿌리친다. 최근 베트남에서 반중 시위가 나서 21명이 죽었다. 우리 기업을 중국 기업이라고 오해해서 피해가 컸다고 하는데, 현장의 분위기는 이 김에 그동안 쌓였던 (한국에 대한) 감정을 분출한 것이란 말도 있다.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을 억누르면 억누르려 할수록 반감은 더 커진다.” 구수정은 2011년 지인들과 함께 한국-베트남 간 공정무역과 공정여행을 위한 기업, 아맙(AMAP)을 설립했다. 아맙은 베트남 민속악기로, 아맙나무 대롱을 잘라 양쪽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을 맞춰야 비로소 소리가 난다. 구수정에게 베트남이란, 우리가 외면했던 우리의 민낯을 보여주는 거울이자, 마주 보고 아름다운 소리를 함께 만들어야 할 아맙의 파트너다. 그는 스스로 아맙의 대롱이 되려 한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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