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5 20:05
수정 : 2014.02.06 10:29
지난해 ‘여권 신장법’ 부결시킨 의회
가해자 가족 증언 못하게 형법 바꿔
아내 가혹 행위 당해도 진실 못 밝혀
미국 등 나라 밖 눈 의식하던 대통령
나토 철수 임박해 보수세력 눈치만
“난 그들이 감옥에 가기를 원한다.”
2012년 1월, 성매매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남편 등 시댁 식구들한테 잔혹한 고문을 당한 아프가니스탄의 15살 소녀 사하르 굴은 구출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2011년 5000달러에 팔려 시집온 굴은 6개월 동안 시댁 지하에 갇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손톱을 뽑히고 전깃줄로 얻어맞았다. 그는 시댁을 방문한 친정 삼촌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지옥’에서 벗어났다.
<가디언>은 가해자의 가족·친척들이 범죄 행위에 대해 증언을 할 수 없도록 하는 형법 개정안이 아프간 의회를 통과했다며 앞으로 가정폭력을 휘둘러도 처벌받지 않을 수 있게 됐다고 4일 보도했다.
아프간인 대부분은 친척과 함께 확대가족을 이뤄 살기 때문에, 친척이 입을 다물면 아내가 남편한테서 가혹행위를 당하더라도 진실을 가릴 방법이 별로 없다. 앞으로 굴과 같은 피해자가 나와도 사실상 사법적 정의를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형법 개정안은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의 서명 절차만 남겨놓은 상태다. 카르자이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 아프간 여성의 운명이 갈리는 셈이다.
여성·인권 단체들은 “치졸하기 짝이 없다”며 법 개정안을 맹비난했다. 이들은 카르자이 대통령이 법안 서명을 보류하도록 압력을 넣을 계획이다. 이들은 2009년 카르자이 대통령을 압박해 ‘아내 강간’을 남편의 권리로 인정하는 악법을 완화하는 데 성공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지금 카르자이는 보수세력의 눈치를 보며 미국과 아슬아슬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어,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많다. <가디언>도 악법 저지는 5년 전의 일이라고 짚었다. 당시엔 탈레반이 몰락한 직후라 아프간의 처참한 여성 인권 문제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의 지원으로 권력을 잡은 카르자이도 이런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토군이 철수하는 일정표가 나왔고 보수세력은 힘을 불렸다. 여성의 권리 신장 같은 의제가 더는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아프간 의회는 여성의 기본권을 확대하는 내용의 여권신장법안이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고 여성의 불복종을 부추긴다며 부결했다. 이 법안은 조혼과 강제결혼을 범죄로 정하고, 여성을 사고 파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의회는 지방 의회의 여성 의원 할당 비율도 축소했다.
이번에 형법 개정안이 통과되는 과정에서도 보수세력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애초에 상원에선 ‘원하지 않으면 가족·친척의 일을 증언할 의무를 면제한다’는 쪽으로 형법을 개정하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실제 상하원을 통과한 법은 ‘모든 진술’을 금지했다.
‘아프간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보호·옹호 그룹’ 사무국장인 셀라이 가파르는 “보수세력은 처음엔 언론을 두려워했지만 이젠 정부가 별로 민주적이지도 않고 여성의 권리에 그다지 관심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구 행동한다”고 비판했다.
상황은 비관적이다. 휴먼라이츠워치의 아프간 연구자인 헤더 바르는 “아마도 새 형법 개정안은 발효될 것”이라며 “(나토군이 철수한) 2015년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여성의 권리 신장에 반대하는 이들은 지금이야말로 여성 정책을 되돌릴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