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2.03 16:19
수정 : 2018.12.03 21:10
CNN, ‘사우디 왕세자 비판’ 메시지 내용 보도
“빈 살만 팩맨 같아…희생자 삼킬수록 더 많이 원해”
캐나다 망명객과 메신저, 살해 사건 밝힐 실마리 되나
온라인 반체제운동 논의 중 동료 휴대폰 해킹 당해
두달 뒤 카슈끄지 사우디 덫에 걸려 살해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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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자말 카슈끄지·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33) 왕세자. ‘자말 카슈끄지 를 위한 정의(Justice for Jamal Khashoggi)의 페이스북 갈무리.알제/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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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힘과 압제를 좋아한다.(…) 희생자를 잡아먹을수록 더 많은 희생자를 원하는 야수 ‘팩맨’ 같다.”
꼭 두 달전 터키 주재 자국 영사관에서 살해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비판적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자국의 무함마드 빈 살만(33) 왕세자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해온 메신저 메시지가 무더기로 공개됐다. 미국 <시엔엔>(CNN) 방송은 3일 캐나다에 거주하는 사우디 망명객 친구와 왓츠앱 메신저로 주고받은 400여건의 메시지를 단독 입수해 보도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8월까지 두 사람이 거의 매일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면, 카슈끄지는 반체제 온라인 운동 조직의 결성도 추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빈 살만 왕세자가 최고위 지시자로 의심받는 카슈끄지 살해 사건의 진실 규명에 새로운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사우디 유학생 출신으로 2014년 캐나다에 망명한 반체제 활동가 오마르 압둘아지즈가 <시엔엔>에 제공한 메시지들에는 음성 파일과 사진, 동영상들도 포함돼 있다. 방송은 이 메시지들이 카슈끄지가 생전에 사우디의 젊은 실세인 빈살만 왕세자의 성마르고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몹시 곤혹스러워 했음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카슈끄지는 “(비판적 인사들의) 체포는 부당하며 그(왕세자)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데, 폭압에 논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힘과 압제의 과시를 좋아한다”고 썼다. 나아가 “그는 희생자를 집어삼킬수록 더 많은 희생자를 원하는 야수 ‘팩맨’ 같다”며 “심지어는 자신에게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폭압이 미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신이 아신다”라고 했다. 지난 5월 사우디 당국이 남녀 인권활동가 8명을 “왕국을 불안하게 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혔으며 헌법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체포한 직후다. 카슈끄지가 빈살만 왕세자를 비유한 ‘팩맨’은 일본산 아케이드 게임의 캐릭터로, 몬스터를 피해 모든 쿠키를 먹어치우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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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초 터키 주재 자국 영사관에서 살해된 사우디아라비아의 비판적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와 캐나다에 망명한 사우디 반체제인사 오마르 압둘아지즈가 온라인메신저로 주고 받은 대화의 일부. 〈CNN〉 누리집 갈무리 (*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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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메시지에 압둘아지즈가 “놀랍다. 그가 왕위에 오르면 자비심을 과시하는 제스처로 (수감자들을) 사면할 가능성이 있을까”라고 묻자, 카슈끄지는 “논리적으론 그렇다. 하지만 난 그 남자의 생각을 분석할만큼의 신뢰가 더는 없다”며 부정적 시각을 내비쳤다. 두 사람은 사우디의 온라인 청년운동을 조직할 계획에 대한 의견도 주고받아, 메시지가 차츰 ‘대화’에서 ‘행동’으로 진전했음을 보여준다고 <시엔엔>은 보도했다. 압둘아지즈는 <시엔엔>에 “당시 카슈끄지는 ‘빈살만 왕세자가 문제다. 이 친구는 제동이 걸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털어놨다. 앞서 카슈끄지를 비롯한 반체제 인사들은 자신들을 겨냥한 사우디 당국의 ‘트위터 부대’에 맞서 ‘사이버 비즈'(Cyber Bees)’라는 온라인 운동 조직을 구성하려 했다.
올 상반기 들어 ‘사이버 비즈’ 계획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척됐던 것으로 보인다. 압둘아지즈가 메신저 대화에서 카슈끄지 에게 “전자 군대의 작업에 관한 간략한 아이디어를 보냈다”고 쓰자, 카슈끄지는 “멋진 보고서다. 자금을 마련해보겠다. 우린 뭔가를 해야 한다”고 화답했다. 그는 또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가끔 그들의 (사이버) 공격에 영향을 받아, 트위터 이용을 싫어한다”고 말해, 통신보안에 대한 불안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압둘라지즈는 5000달러가 자신에게 이체됐음을 메신저로 알렸고, 카슈끄지 는 양손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것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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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끄지 와 압둘아지즈가 자신들의 메신저 대화가 사우디 당국에 감청되고 있음을 눈치챈 뒤 주고받은 대화에 불안감이 드러나 보인다. 〈CNN〉 누리집 갈무리 (*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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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즈음 둘의 메신저 대화를 사우디 정보당국이 감청한 것으로 보인다. 카슈끄지 가 덫에 걸려 살해당하기 두 달 전이다. 대화 감청 사실을 눈치챈 카슈끄지는 “신이 우리를 도우시기를”이라며 “‘비즈’에 대해서는 인스타그램에서도 얘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압둘아지즈는 “내 휴대폰이 해킹 당한 게 카슈끄지 피살에 주요한 원인이 됐다. 정말로 미안하다, 죄책감에 죽을 지경이다”라고 괴로운 심정을 밝혔다.
앞서 지난달 압둘아지즈는 캐나다 토론토대의 인터넷 리서치 그룹인 시티즌 랩으로부터 자신의 휴대전화가 군사용 수준의 스파이웨어에 해킹을 당했다는 통보를 받은 뒤 처음으로 카슈끄지와 접촉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시티즌 랩의 한 연구원에 따르면, 문제의 스파이웨어는 이스라엘 업체 엔에스오(NSO) 그룹이 개발했으며 사우디 정부의 요청으로 사용된 것으로 파악됐다. 압둘아지즈는 3일 이 소프트웨어가 인권 침해해 사용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폭압적 정권에 판매함으로써 국제법을 위반했다며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변호인을 통해 엔에스오(NSO) 그룹을 고소했다. 이에 대해 엔에스오 그룹은 성명을 내어, 자신들의 기술은 정부들이 범죄와 싸우는 걸 지원하며 이스라엘 정부의 면허를 받고 철저한 점검도 받는다고 해명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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