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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23 20:27 수정 : 2018.10.23 21:53

미국과의 관계 악화 속에서 위기에 빠졌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에게 최근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쇼기 살해 사건은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AP 연합뉴스

터키 대통령, 사우디 국왕에 범인들 송환 요구
“소수 요원들에 책임 돌려 끝날 사안 아냐”
의회 연설로 통해 사우디 정부에 강한 압박
“치밀한 계획”, “암살조가 숲 탐사하기도”

트럼프·빈살만 주도의 중동 질서 재편에 쐐기
미국과 관계 위기 넘어 중동 영향력 회복 기도
빈살만은 왕위 계승까지 부정적 영향

미국과의 관계 악화 속에서 위기에 빠졌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에게 최근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쇼기 살해 사건은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AP 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피살 사건 범인 18명을 인도하라고 사우디 국왕에게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전모를 끝까지 파헤치겠다는 터키 정부의 태도에 따라 사건을 둘러싼 긴장감은 계속 고조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3일 의회에서 사건 개요를 설명하면서 살만 빈 압둘아지즈 사우디 국왕에게 18명의 사우디인을 터키에서 재판하도록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사우디인 3명이 사건 며칠 전 영사관에 도착해 범행을 준비했고, 추가로 15명이 당일인 지난 2일 이스탄불에 도착해 카쇼기를 ‘흉포하게’ 살해했다고 밝혔다. 또 계획적 살인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갖고 있다며, 암살조가 사전에 영사관 주변 숲을 탐사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사우디 정부에 카쇼기의 주검이 어디에 있는지 밝히라고도 요구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범인들에게 외교관 면책 특권을 규정한 빈 협약은 적용되지 않는다며, 사우디 국왕이 송환에 협력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사건에 대해 소수의 (사우디) 보안·정보 요원들을 비난하는 데 그치면 우리나 국제사회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했다. 사우디 정부의 ‘꼬리 자르기’ 시도를 거부한다는 의사를 명확히 한 것이다. 앞서 사우디 정부는 카쇼기가 영사관에서 살해됐다는 것을 부인하다가, 터키 쪽이 근거를 하나씩 흘리자 ‘몸싸움 중 발생한 우발적 살인’이라며 관련자들을 징계하고 처벌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사우디 정부가 보낸 암살 요원 15명 중 한 명(오른쪽)으로 지목된 인물이 자말 카쇼기가 피살된 2일 가짜 수염을 달고 영사관을 나와 이스탄불 거리를 걷는 모습이 시시티브이에 잡혔다. 왼쪽은 카쇼기가 당일 영사관을 들어갈 때 모습이다. 터키 수사 당국은 이 요원은 카쇼기를 살해한 뒤 그가 영사관을 무사히 빠져나간 것처럼 거짓 해명을 하기 위해 동원한 대역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시엔엔’ 누리집 갈무리
에르도안 대통령은 앞서 사건의 ‘적나라한’ 진실을 의회에서 밝히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의회에서 △카쇼기가 영사관에서 살해된 것은 분명하고 △범행은 치밀하게 계획됐고 △범행 직후 사우디 요원이 카쇼기가 무사히 영사관을 나간 것처럼 위장하려고 ‘대역’을 맡았다고 밝혔다. 이런 내용은 그동안 미국과 터키 언론을 통해 공개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국가 수반이 단건의 살인 사건과 관련해 의회에 나와 제3국에 범죄인 인도를 요구하며 진상을 철저히 밝히겠다고 선언한 것은 이례적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행동을 두고 중동의 역학 관계를 바꾸려는 의도가 담겼다는 해석도 나온다. 그는 지난달만 해도 미국인 앤드루 브런슨 목사의 신병 처리를 둘러싼 미국과의 갈등으로 최악의 위기에 빠져있었다. 8월 초 브런슨 목사의 석방을 거부한 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제 보복으로 터키 리라화 가치는 연초 대비 최대 40%까지 급락했고, 물가가 급등했다.

카쇼기 사전 이후 모든 게 변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사우디 당국이 카쇼기를 살해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음성 자료 등 증거를 확보한 뒤 사우디를 압박했다. 22일에는 <시엔엔>(CNN)이 당일 카쇼기로 위장한 인물이 영사관을 빠져나가는 장면이라며 동영상을 공개했다. 계획적 살인임을 시사하는 자료다. 터키 언론은 또 유력한 배후로 지목된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최측근인 사우드 카타니가 카쇼기가 감금됐던 영사관 방으로 인터넷 전화를 했다고 보도했다. 터키 정보 당국 관계자는 카타니가 통화에서 “그 XXX 머리를 나에게 가져오라”고 말했다고 <로이터> 통신에 밝혔다.

터키의 집요한 증거 흘리기는 처음엔 미국의 경제 제재를 풀려는 ‘거래용’이란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최근 태도는 중동 질서를 주도하려는 빈살만 왕세자에게 타격을 입혀 중동의 정치적 역학을 바꾸려는 의도라는 분석까지 나온다. 미국 워싱턴연구소의 터키프로그램 국장인 소네 카잡타이는 “에르도안의 야망과 빈살만의 야망 사이에서 전략적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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