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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23 17:08 수정 : 2018.10.23 19:53

미국과의 관계 악화 속에서 위기에 빠졌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에게 최근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쇼기 살해 사건은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AP 연합뉴스

에르도안, 사우디 국왕에 범인 송환 요구
트럼프·빈살만 주도의 중동 질서 재편에 쐐기
미국과 관계 위기 넘어 중동 영향력 회복 기도
빈살만은 왕위 계승까지 부정적 영향

미국과의 관계 악화 속에서 위기에 빠졌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에게 최근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쇼기 살해 사건은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AP 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의 비판적 언론인 자말 카쇼기의 ‘끔찍한 죽음’이 중동의 두 실력자인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정치적 운명을 갈라놓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3일 터키 의회에서 카쇼기 살해 사건의 개요를 설명한 뒤 살만 빈 압둘아지즈 사우디 국왕에게 이 사건에 관련된 18명의 사우디인들이 터키에서 재판을 받도록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사우디인 3명이 사건 전에 이미 입국해 범행을 준비했고, 추가로 15명이 사건 당일인 지난 2일 이스탄불에 도착해 카쇼기를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서 “흉포하게” 살해했다고 밝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외교관들에 대한 면책 특권을 규정한 빈 협약은 살인자들한테는 적용되지 않는다며, 사우디 국왕이 이들의 송환에 협력줄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앞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의회에서 카쇼기 살해 사건의 ‘적나라한’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는 이날 사건의 구체적 정황에 대해 추가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이 사건과 관련해 사우디 당국의 연관을 거론하며 압박을 가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사우디 국왕까지 지목하며 압박하는 것은 최근 이 사건을 통해 중동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바꾸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단연 에르도안 대통령이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에르도안 대통령은 미국인 앤드루 브런슨 목사의 신병 처리를 둘러싼 미국과의 갈등으로 위기에 빠져 있었다. 8월 초 브런슨 목사의 석방을 거부한 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무자비한 경제 보복으로 터키 리라화 가치는 연초 대비 최대 40%까지 급락하고 물가가 급등했다.

2일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카쇼기가 잔혹하게 살해된 뒤 모든 것이 변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사우디 당국이 카쇼기를 살해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음성 자료 등 ‘모든 증거’를 확보한 뒤 사우디를 압박했다. 사우디는 “카쇼기가 제 발로 대사관을 떠났다”는 거짓 해명으로 사태 무마를 시도했지만, 제 무덤을 팔 뿐이었다. 사우디의 잇따른 해명은 터키의 자료 공개로 하나둘씩 거짓으로 드러났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주도한 터키 당국의 집요한 ‘증거 흘리기’로 인해 사우디 당국은 19일 카쇼기가 주먹싸움 끝에 숨졌으며, 이는 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은 ‘불한당들의 공작’ 때문이었다고 인정했다. 사우디는 “빈살만 왕세자는 이 사건을 몰랐다”는 선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치고 있다.

<시엔엔>(CNN)은 22일 터키 당국에서 입수한, 사건 당일 카쇼기로 위장한 인물이 영사관을 빠져나가는 동영상을 공개했다. 카쇼기가 영사관에서 변을 당하지 않고 영사관을 제 발로 걸어나갔다고 주장하기 위해 대역을 동원했다는 내용이었다. 카쇼기 살해가 우발적 사건이 아닌 기획된 사건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터키 언론은 또 빈살만 왕세자의 최측근 보좌관인 사우드 카타니가 카쇼기가 감금됐던 영사관 방으로 스카이프 인터넷 전화를 했다고 전했다. 터키 정보 당국의 한 관계자는 카타니가 통화에서 “그 XXX 머리를 내게 가져오라”고 말했다고 <로이터> 통신에 밝혔다.

터키의 집요한 증거 흘리기는 처음엔 미국의 경제 제재를 풀려는 ‘거래용’이란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끝장을 보려는 터키의 태도는 그 이상의 지정학적 동기가 작용한 것일 수 있다. 중동 질서를 주도하려는 빈살만 왕세자를 약화시켜, 중동의 정치적 역학을 바꾸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터키와 사우디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불가근 불가원의 관계였으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로는 명백한 긴장 관계로 바뀌었다. 사우디의 빈살만 왕세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 아래 반이란 연대를 명분으로 중동 수니파 국가들의 맹주로 오르려 했다. 터키는 국경을 맞댄 이란과의 관계악화를 원치 않는 데다, 중동의 맹주를 꿈꾸는 사우디의 영향력 확장도 거부해왔다.

봉건적 왕국 체제인 사우디와는 달리, 터키는 이슬람 국가 최초의 세속 공화국 체제인 데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세속적 이슬람주의’ 정치인이기도 하다. 지난해 6월 사우디가 자국 말을 듣지 않는 카타르에 대한 단교 및 봉쇄를 주도하자, 터키는 카타르의 후원국이 됐다. 애초부터 친미적이지 않은 이슬람주의 성향의 에르도안 정부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가 올해 8월 브런슨 미국 목사의 구금 문제로 제재를 가하자 양국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번 사건은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계기다. 터키 쪽이 공언한 대로 빈살만 왕세자 등 사우디 최고위층이 개입된 것이 명백해지면 미국 조야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빈살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가 힘들어진다. 사우디 왕가 내의 치열한 권력 암투를 감안하면, 빈살만의 왕세자 지위 역시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이는 빈살만 왕세자와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동 질서 재편 동력을 현저하게 위축시킬 것이다.

미국 워싱턴연구소의 터키프로그램 국장인 소네 카잡타이는 “중동에 대한 에르도안의 야망과 빈살만의 야망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략적 투쟁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빈살만-아부다비 왕세자 무함마드 빈자예드-이집트의 압둘파타흐 시시 대통령’ 연대 축에 맞서 중동에서 세속적인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야망이 충돌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우디의 성지 메카의 지사인 칼레드 파이잘은 최근 에르도안 대통령과 면담한 뒤 “에르도안은 꿈쩍도 하지 않고, 우리가 말하는 어느 것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국왕은 위기에 빠졌다”고 보고했다고 <가디언>이 사우디 왕가 관계자를 인용해 전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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