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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25 17:38 수정 : 2006.04.26 15:14

2050 여성살이

다니엘 헤니의 인기가 생각보다 오래 간다 싶다. 30초짜리 텔레비전 광고에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의 모습은 언제 봐도 기분 좋다. 이국적인 용모, 외로워 보이지만 구질구질 하지 않은 분위기, 폭력적일 것 같지 않은 제스처, 여자들이 그에게 환호하는 이유는 대충 이렇다. 그런데 내 생각엔 그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한국말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다.

말을 잘 못하니 완벽하게 그와 의사소통해야 된다는 의무가 없다. 그의 말에 귀 기울여 마음을 살피려는 감정 노동도 애써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그가 여자의 마음을 모르느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드라마에서 어눌한 한국어로 한마디씩 던지는 그의 대사들은, 세상사에 지친 여자에게 눈물나도록 위로가 되는 무지개 같은 말들이다. 그건, 그 여자를 따뜻한 시선으로 늘 바라본 남자만이 할 수 있는 말들이라서 애틋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나는 늘 너만 바라봐”라고 우기지도 않으니 좋을 수밖에.

이런 남자에 대한 여자들의 욕망이 판타지인 것도 맞겠고, 정작 이런 남자와 ‘생활의 발견’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하면 관계가 꼬일 수 있다는 비애감도 틀리지는 않겠다. 그런데 그를 통해 느끼게 되는 의사불통의 매력은 아직도 의미심장하다. ‘잘생겨서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이유가, 그가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의사불통의 매력을 뒤집어 보면, 상대방과 처음부터 끝까지 늘 완벽하게 소통해야 된다는 강박관념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이 보인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자기가 저지른 일이 그의 마음에 들까 노심초사하는 소심하고 연약한 우리들의 모습이 말이다. 게다가 여자와 남자는 심지어 다른 별에서 왔다니 늘 마음을 살피고 헤아려야 한다며 애를 쓴다.

여자건 남자건 상대방을 더욱 많이 이해하려는 노력은 누가 뭐래도 소중하다. 누군가와 관계 맺고 싶은 이들의 영원한 숙제이니까. 문제는, 정작 잘하지도 못하는 소통의 중압감이 오히려 관계를 질식시키고 스스로도 괴롭힌다는 것이다. 대화라는 걸 한답시고 상대방을 더욱 다그치고 변화를 강요하다보면, 결국 ‘소통을 하고야 말았다’는 나홀로 행복감만이 남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문제는 계속 반복되니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게 외계인이라는 결론만 내리게 된다.

누군가가 열심히 만들어가는 삶이 나에게 온전히 이해되고 납득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지나친 욕심이다. 소통은 성취가 아니라 스며듬이니까. 누군가에게 스며든다는 것은 삼투압의 원리에 의해 나와 그 사람의 어떤 맥락이 황홀하게 중첩되는 것일 뿐, 온 삶이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관계의 틈새를 열어둘 때, 소통의 불가능성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지고 상대방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정박미경/ 자유기고가 chaos400@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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