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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02 17:45 수정 : 2006.05.03 15:18

불영사 연못 가를 지나다 잡초를 뽑고 있는 일운 스님. 불영사엔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동해 으뜸 사찰 불영사 일운 스님

지난 29일 푸른 물과 수정처럼 맑은 바위·모래가 어우러진 천혜절경 불영계곡 위로 아치를 그린 돌다리를 건넜다. 경북 울진 천축산 불영사 일주문에 들어선 것이다. 홍송의 짙은 향에 산벚꽃과 철쭉이 지천이다. 색색의 연등 따라 소나무 숲길을 벗어나니 갑자기 시야가 툭 터진다. 그림 같은 연못 속엔 천축산과 전각들의 자태가 꿈결인 듯 잠겨 있다. 세속 떠난 피안이 바로 여기인가.

비구니 스님들이 빠르되 조심스런 걸음걸이로 경내를 오고 간다. 대웅전 옆 아담한 처소에서 맞는 주지 일운 스님(54)의 활짝 핀 웃음이 바로 불영사의 얼굴이다.

그가 우리나라 최고 오지로 꼽히는 이 절 주지로 온 것은 세납 39살에 불과하던 1991년이었다. 당시 일주문 안 불영계곡엔 곳곳마다 야영장이 설치돼 있어 그야말로 경내는 난장판이었다. 대웅전과 요사채 뿐인 불영사엔 2~3명의 스님만이 지키고 있었다. 퇴락해 세속 야영객들이 점거하다시피 한 절은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서 면모를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런 불영사가 어떻게 동해 제일 사찰로 변모한 것일까.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오려면 차로 7~8시간이 걸리던 이 절의 면모를 개선하려면 이 절 사정을 외부에 알려 적극 도움을 받는데 힘을 쏟는 것이 정석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일운 스님이 취한 방식은 그 반대였다. 밖으로 힘을 쏟기보다는 오직 안을 가꾸는데 힘을 쏟았다.

그가 오자마자 계곡의 야영장을 모두 철거하고 경내를 깨끗하게 정비했기에 절의 면모는 일신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어 불영사를 널리 알리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반대했다. 이 오지에 있는 불영사만이라도 손 때 묻지 않은 ‘마음의 고향’으로 남겨두자는 게 그 이유였다.

대신 그는 대중살이에 더욱 철저했다. 새벽 3시부터 밤 12시까지 대중들과 일체를 함께 했다. 더구나 매일 오전에 500배 절을 하고, 오후엔 일체 음식을 들지 않는 오후 불식을 한 것이 10년째다.

야영장 난장판이던 천년고찰
정비하고 다음으며 철저히 대중과 삶 나누자
발길 잇는 참선도량 변모

불영사 공양간에서 직접 밥하고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는 비구니 스님들.
그의 철저한 삶이 블랙홀이 된 것일까. 이 오지까지 찾아든 여성들이 그를 스승 삼아 하나 둘씩 출가하기 시작했다. 12년 전엔 이탈리아에서 생물 교사를 하다가 한국에 놀러왔던 여성이 우연히 불영사에서 한달을 지낸 뒤 일운 스님 앞에서 “출가를 허락해 달라”며 무릎을 꿇었다. 이젠 한국말에 능수능란할 뿐 아니라 어느새 당당한 선객으로 자란 여웅 스님이다. 일운 스님이 이 절에 오기 전 타이완에 유학한 인연으로 대만인이 6명이나 그에게 출가했고, 러시아 여성 한 명도 이곳에서 머리를 깎았다.

“삶 속에서 깨어 있어야지요. 살아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숨이 끊어진 뒤 혼자 막막한 길을 갈 때 정신을 차릴 리 없지요.”

부드럽지만, 엄한 그의 경책은 바로 불영사의 대중살이로 이어진다. 공양간 옆 부엌을 들여다보니, 모두 먹물 입은 스님들 뿐이다. 스님들이 채소를 다듬고,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한다. 이곳엔 ‘공양 보살’(절에서 일하는 여성)이 한 명도 없다. 살림 일체를 스님들이 직접 한다. 이 좋은 세상에, 늦게까지 잠을 잘 수도, 앉아 쉴 수도 없는 이런 호된 절살이를 찾아 그의 밑으로 출가한 비구니가 50여명이다. 희한한 일이다.

일운 스님은 쌀 한 톨을 아끼면서도 공양물이 들어오면 인근에서 나물을 캐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쌀과 밀가루 등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절 행사 땐 늘 주민들과 함께 했다. 울진군 인구가 6만여 명에 불과하지만, 이 산속 불영사에서 열리는 축제와 행사 때면 종교와 남녀노소를 떠나 수천 명이 모여 함께 한다.

이곳에서 불영사를 외부에 알리지 않아도 우연히 절을 찾은 방문객은 이들의 이런 삶을 보고, 물심양면의 후원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래서 불영사엔 우리나라 비구니 선방으로선 둘째 가라면 서러울법한 천축선원까지 지어졌다. 불영사가 참선도량이 된 것이다.

복을 비는 여성 불자들이 대부분인 일반 사찰과 달리 불영사는 비구니 사찰인데도 참선 정진에 힘쓰는 남성 불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이런 수행 가풍 때문이다.

한 밤 연등불마저 꺼졌다. 초승달에 비친 천축산 돌부처만이 연못 속에서 합장한 채 삼매에 잠겨 있다.

“딱, 딱, 딱…”

새벽 3시. 도량석을 시작한 한 행자의 목탁소리가 깊은 삼매를 깨운다. 매일 아침 ‘부처님 오신 날’을 여는 소리다.

울진/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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