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5.09 18:18
수정 : 2006.05.15 18:16
수술칼 버리고 만화로 ‘처방’하는 의사 정희두씨
의사를 형상화한 만화캐릭터 ‘닥터 두’의 얼굴엔 입도 코도 없다. 마치 환자들과 이심전심으로 통하고 싶은듯 커다란 두 눈을 껌뻑이고 있을 뿐이다. 닥터 두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듯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는 엷은 홍조가 코가 있음직한 자리를 중심으로 두 볼때기 부근까지 퍼져 흐르는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닥터 두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다.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의 의사와 환자, 어느쪽에서나 필요로 하는 도움은 무엇이든지 척척 해결해줄 수 있는 ‘인류의 건강 지킴이’가 되고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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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두씨는 자신을 닮은 의사인 ‘닥터 두’ 캐릭터를 등장시켜 의료정보를 알기 쉽게 설명해놓은 만화 홍보물을 만들어 널리 보급시키는 데 앞장 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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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세상은 이른바 ‘닥터 두의 설명처방’이 보편화될 때 구현될 수 있다. 의사들이 의약품만 처방하는게 아니라, ‘3분 진료’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만화와 플래시애니메이션 등을 이용해 한국어를 비롯해 여러 나라 언어로 미리 만들어놓은 ‘닥터 두의 설명처방’을 함께 제공하는 세상을 말한다.
그런 세상이 오면, 무슨 질병이든지 예방에서 원인, 치료 및 관리까지 모든 의료정보를 쉽고 충분하게 설명해놓은 닥터 두의 설명처방의 방대한 데이타베이스는 언제 어디서든지 휴대폰, 인터넷, 와이브로 등 모든 멀티미디어 수단을 통해 접할 수 있고, 멀티미디어플레이어에 휴대하고 다니면서 무한정 되풀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닥터 두 캐릭터를 개발한 사람은 한국과학재단 지정 의학연구정보센터(메드릭, www.medric.or.kr)의 정희두(35) 의료정보콘텐츠개발실장이다. 닥터 두의 두는 자기 이름의 맨 마지막 글자에서 따왔다. 수술을 전문적으로 한다고 해서 ‘칼잡이’로 불리는 외과전문의지만 환자 진료 대신 만화를 기반으로 의학적 지식을 쉽게 풀어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 ‘괴짜 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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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칼 버리고 만화로 ‘처방’하는 의사 정두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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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대부분 공부 잘 하는 모범생 출신 아닙니까? 범생이의 특징이 말 주변도 없고 천연덕스럽지도 못하다는 거지요. 때문에 의사 초년생들은 암 발견과 같은 진료 내용을 설명해야 할 때 자신이 죄를 진 것도 아닌데 곧잘 환자와 그 가족 앞에서 쩔쩔매면서 얼굴이 빨개지곤 합니다. 닥터 두는 그런 점을 염두에 둔 캐릭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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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두씨가 의학연구정보센터 회의실에서 이영성 센터소장(앞쪽 맨왼쪽)이 참석한 가운데 팀원들과 기획회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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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빠르게 의료정보 전하는게 의사로서 나의 사회적 구실이죠”
정희두씨의 여유있는 변신
대구에서 고교까지 다닌 정희두씨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한 어머니가 집에서 동네아이들을 모아 놓고 미술공부시키는 일을 도와주면서 어깨너머로 그림 그리기의 기초를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가필드’와 같은 명랑만화를 좋아했지만, 일본의 인기만화작가 도리야마 야끼의 ‘드래곤볼’과 ‘닥터 슬럼프’를 즐겨 본 것은 동시대 여느 아이들과 다름 없었다.
만화 그리기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서울대의대 90학번으로 진학해 의대학생회와 의료문제연구회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다.
“1991년 원진레이온 사건이 터졌을 때, 의료문제연구회는 의사의 전문성을 이용해 원진레이온 사건의 심각성을 사회에 알리는 일을 찾았어요. 이 때 약품의 유독성을 설명하는 삽화를 그렸어요.”
90년을 분수령으로 바뀐 의대학생운동이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노동현장에 뛰어드는 것 보다는 의사로서의 전문성을 길러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을 때, 원진레이온 사건이 하나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원진레이온 사건 이후 한 학기에 한 두 차례 여러 컷으로 구성된 만화를 꾸준히 그려 학생회 홍보물 등에 실었지만 만화는 취미활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그에게 서울대병원 전공의 3년차 시절인 2000년에 발생한 의사파업은 만화에 좀 더 깊게 빠져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대병원 전공의협의회 홍보부장이었던 그는 의사파업을 부른 의약분업의 문제점을 네 페이지짜리로 설명한 ‘허준 생각’이란 만화를 그렸는데 이것이 의사들 사이에서 널리 유포되어 인기를 끌자 만화의 위력과 매력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화는 일단 이해하기가 쉽고, 한번 붙잡으면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드는 장점이 있어요. 외과 전공의로서 수술동의서를 받아야 할 일이 많을 때였는데, 환자와 가족들에게 그림을 그려가면서 설명하면 쉽게 이해하는 경우도 많이 봤지요.”
‘허준 생각’이 뜨자 여러 언론매체에서 그를 불렀다. 2000년 7월부터 1년간 의료계 전문지에 건강보험의 여러 문제점을 지적한 ‘닥터 딜레마’라는 만화를 연재한 뒤, 곧이어 4개월간 한 중앙일간지에 의사들의 애환을 그린 ‘병원 블루스’를 실었다.
한동안 프로 만화가의 길을 걸은 셈이지만, 병원 블루스를 연재할 때만 해도 외과 전문의 자격을 따고 서울 강남의 한 병원에서 맹장과 치질 등을 수술하는 외과의사가 본업이었다.
만화 잘 그리던 운동권 의대생 출신 외과전문의 의약분업 다룬 ‘허준생각’ 뜨면서 만화에 더 매력 ‘조류인플루엔자’ 홍보물 성공 뒤 정보개발자 변신 “세계 최고 동영상 만화로 더 많은 환자들 도움 주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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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사자가 기증할 수 있는 장기와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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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사회적 참여의 한 방법으로 닥터 두의 꿈을 실현하는 일에 올인하려고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은 2003년 2월 군에 입대해 3개월간의 훈련을 마치고 5월부터 충북 음성군 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하면부터다.
2003년 12월5일, 음성군의 한 양계장에서 키우던 수만 마리의 닭들이 갑자기 무더기로 폐사하면서 시작된 조류인플루엔자(당시 ‘조류독감’으로 많이 쓰임) 파동은 의사의 사회적 역할을 일깨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의사라면 누구나 전염병과 같은 급박한 일이 생겼을 때 국민들에게 올바른 의료정보를 최대한 빨리 전파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누구도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같지 않아 자신이 손발 걷어부치고 나섰다.
공중보건의 신분인 그에게 만화 재능을 계속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이영성 의학연구정보센터 소장(충북대의대 교수)와 협조해 10일동안 밤샘작업을 한 끝에 12월31일 조류인플루엔자에 관한 7분짜리 플래시애니메이션과 8페이지짜리 카툰을 완성했다.
정부쪽 질병관리본부와 대한의사협회 산하 대한의학회의 감수까지 받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대국민 홍보에 활용되지 않다가 ‘닭고기 파동’이 본격화하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류인플루엔자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감염되지 않고, 닭과 오리 같은 가금류는 75도 이상에서 5분 이상 가열해 먹을 경우 조류인플루엔자에 감염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의료정보가 홍보물에 잘 표현돼 있었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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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식 환자의 수술 전 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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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계기로 그는 ‘공공보건 경보 시스템 구축’에 관한 연구용역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신청해 말라리아, 가을철 발열성질환 등에 관한 홍보물도 만들었고, 조류인플루엔자 홍보물은 세계 각국을 겨냥해 시범적으로 영문판까지 만들었다.
또 아카데미아 출판사와 함께 16권 분량으로 암 시리즈를 내기로 하고 첫 권 ‘위암’(책임저자 고 김진복 서울대명예교수) 등 여러 의학서적의 삽화를 그린 것을 비롯해 한국유방암사이버센터의 암과 유방암에 관한 플래시애니메이션도 만들었다.
플래시애니메이션은 특히 그가 의료정보 전달의 최적의 수단으로서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분야다.
법률, 경제, 의료 등 일반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3가지 분야의 정보 가운데 유독 의료만 이미지 정보가 필요한데, 플래시애니메이션은 동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데다가 제작기술 및 인력에서 한국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4년간 고생고생을 하면서 외과전문의 자격증을 딴 게 아깝지도 않냐?’는 질문을 자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아깝기는 커녕 오히려 외과를 전문해 다행이다.”고 말한다. 의료만화는 해부학적 장면을 많이 그려야 하는데 수술을 많이 한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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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영진
youngjin@hani.co.kr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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