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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게 이뤄지는 초원의 잔치는 양 한 마리로도 풍성하다. 남녀노소가 둥글게 앉아 음식을 나누고 있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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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공원국의 유목일기 (20) ‘바람’의 도주
밤새 사라진 나의 말 ‘바람’
뽑은 말뚝 고삐에 매단 채
깊은 계곡 넘어 이웃마을로
거긴 동무 가득한 넓은 ‘광장’
초원은 아직 잃지 않은 ‘광장’
온 주민이 양 한마리 놓고
풍성한 마을잔치 하는 곳이나
나만의 은밀한 밀실도 곳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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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게 이뤄지는 초원의 잔치는 양 한 마리로도 풍성하다. 남녀노소가 둥글게 앉아 음식을 나누고 있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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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자마자 말을 매 둔 곳으로 갔다. 아침에 손님들과 함께 다른 목장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므로 유르트 가까운 곳에 매 두었다. 그런데 나의 말 ‘바람’이 있던 자리에 송아지들이 모여 있고 녀석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목장 주인이 옮겼을까? 으르스바이에게 뛰어갔다.
“말이 없어졌어요.”
으르스바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가 옮긴 것이 아니다.
“일단 밥을 먹고 있게. 내가 말을 데리고 찾아갈 테니.”
어젯밤 산 언저리에 한참 동안 멈춰 있던 자동차 불빛이 맘에 걸린다. 아니다. 누가 말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목장에서 남의 말을 가져가겠는가. 그럴 리 없다. 여기서 남의 말을 가져갔다는 소리를 아직 들은 적이 없다. 어제 낮에 본 암컷 무리를 찾아갔을 것이다. 으르스바이가 황급히 말을 타고 서쪽 길로 올랐다. 멀리 산자락에서 풀을 뜯는 갈색 말이 꼭 바람 같아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니 다른 녀석이었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아침 서풍이 거세다. 내려다보이는 초원에 말은 많지만 갈색 조약돌처럼 모조리 같아 보여 구분할 도리가 없었다. 황망한 중에 목동 하나가 당나귀를 타고 달려온다. 가까운 밤색 말 무리의 주인이었다. 자기 말 무리에 한번 눈길을 주더니 단언했다.
“저기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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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케에서 열린 마을잔치에 모인 나이만인(왼쪽부터)과 큽착인, 키르기스인이 술잔을 나누고 있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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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 작은 말에게 얻어맞은 나의 말
그러고는 계속 실없는 농담을 걸어온다. 힘없이 대꾸하며 능선을 걷는데 옆 유르트 할아버지가 벌써 사정을 알고는 다가와 위로했다.
“원국, 말을 잃어버렸다고? 내 동생(으르스바이)이 찾으러 갔으니까, 좀 기다려 봐. 나는 아침마다 이렇게 똥을 모으네.”
소똥 자루를 메고 나이 든 목동이 언덕을 내려갔다. 하염없이 서쪽을 보는 시간이 길어져 몸이 얼었지만 바람이 서서히 생각을 잠재워주었다. 그놈이 떠났다고 해도 이 초원에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도 야생마는 없으니 결국 주인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어쩌다 돌아오지 못해도 누군가의 손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자유를 희구했던 놈이니, 운이 좋으면 잠시나마 야생마의 자유를 누리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고삐에 연결된 긴 줄과 말뚝이 걱정되었다. 산으로 뛰어다니다 말뚝이 돌 사이에 끼거나 줄에 다리가 휘감기면 위험하다. 녀석의 힘과 지혜를 믿었다. 길을 따라갔다면 말뚝에 연결된 줄이 닳아 끊어졌을 것이다.
멀리서 으르스바이의 밝은 갈색 말이 돌아온다. 그러나 따르는 말은 없었다. 한참 동안, 어쩌면 영원히 녀석 없이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어제 안장을 올릴 때 물려는 동작을 하기에 우리들이 정한 약속대로 녀석을 때렸다. 그것 때문에 떠나버린 건 아니겠지. 하지만 유르트로 돌아오니 으르스바이의 표정이 좋았다.
“압드카르에게 전화가 왔어. 말이 볼케로 갔대. 거기 암말 무리를 찾아간 거야.”
볼케의 압드카르는 영리한 젊은 목동. 녀석은 볼케에 나타나자마자 체포되고 말았다. 그런데 녀석은 한밤중에 어떻게 그 협곡을 건넜을까? 투육과 볼케 사이에는 커다란 협곡이 있다. 며칠 전에도 협곡 아래서 아직 살이 붙은 소의 시체를 봤다. 소나 양도 가끔 협곡에 떨어져 죽는다. 녀석은 볼케에서 본 그 암말 무리를 항상 맘에 두었다가 두어번 지난 길을 따라갔던 모양이다. 녀석이 원하는 자유는 사람도 짐승도 없는 벌판으로 달아나는 것이 아니었다. 불편한 안장을 벗어나고 암컷을 차지하고픈 생리적인 욕구보다도, 무리에 속하고 싶은 ‘사회’적인 욕구가 더 컸다.
바람이 볼케로 달아난 날 마침 그곳에서 다음날 떠날 손님들을 위해 잔치를 열기로 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차로 먼저 보내고 손님 두 분과 시오리 떨어진 볼케로 걸어갔다. 오솔길로 녀석이 끌고 다닌 쇠꼬챙이가 남긴 자국이 선명하다. 질풍노도의 시기, 어리고 덩치 큰 말은 사회로 들어가고자 하는 본능과 힘을 따라갔다. 녀석이 남긴 자국은 묵묵히 녀석의 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볼케 목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개에 서니 압드카르의 유르트 뒤 언덕에 멀리서도 확연히 구분되는 키 큰 말이 서서 초원을 내려다보며 포효하고 있었다. 시야에서 사라진 암말 무리가 아쉬워서일 것이다. 볼케에 먼저 와 기다리던 후배 성제가 농을 건다.
“말이 좀 다쳤어. 말이 주인을 닮아서 그래.”
정말 우리는 서로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내 곁으로 온 녀석의 눈길이 황망했다. 목, 허리, 엉덩이 가리지 않고 물리고 차인 흔적이 선명했다. 압드카르 말 무리의 우두머리 수컷을 안다. 녀석은 바람보다 작지만 훨씬 노련하다. 바람은 덩치를 믿고 대들었다가 실컷 얻어맞은 것이 분명하다. 갈비뼈 여러 대를 가로질러 길게 찢어진 상처를 건드리니 녀석이 움찔한다. 짐승은 그렇게 상처를 입어가며 더 큰 사회, 즉 광장(廣場)으로 나가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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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간 아이들과 키르기스 초원의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놀고 있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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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바람’이 탈출하기 전날 아들과 함께 말을 타고 있는 공원국 작가.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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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사람에게는 큰 고기를”
하지만 녀석이 자기도 곧 초원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릴 날이 온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 내가 초원을 떠나는 날 이듬해 녀석을 초원에 놓아주겠다고 한 사람에게 말을 넘기기로 했으니까. 테미르, 눈이 선하고 웃음이 좋은 그 친구라면 믿을 수 있다. 그는 술을 가끔 하지만 절제를 안다. 한달 전 테미르에게 이야기했었다. ‘말을 줄게, 테미르. 그런데 팔지는 말게. 녀석이 조금 더 크면 짝을 지어줘.’
초원에 들어온 뒤 갈수록 사고파는 데 서툴러진다. 권리를 이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매매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인간의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며, 양도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매매될 수 없는 권리가 수두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리에 들고자 하는 말의 욕망을 두고 나는 말과 직접 거래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끼리의 거래에 불과했고, 녀석은 참여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녀석의 등에 올라타 다니고, ‘동생’이라 부르면서 나는 주인이라 불리지만 녀석의 아주 일부만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재갈을 무는 순간 녀석은 주인에게 자유와 본능 전체를 넘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고작 좋은 주인을 찾아주는 것뿐.
나로 인해 볼케 초원에서 오늘 양 한 마리가 간다. 무슬림들은 피와 머리에 영혼이 있다고 여기므로 피를 깨끗하게 빼내고, 머리는 손상시키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변명이라는 것을 안다. 모아둔 피는 결국 닭이 먹을 테고 머리는 곧 새들이 쫄 것이다. 그러나 문화란 그런 미안함에서 오는 변명에서 시작된다. 양의 몸은 초원 문화의 몸통이다. 양을 잡고 손질할 때 반드시 이웃 몇명이 거들어야 한다.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초원에서 가죽을 벗기고, 부위별로 분류하고, 삶는 과정 모두가 정갈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여럿이 금기를 엄격히 지키며 행동해야 한다. 피를 완전히 빼는 의식보다 더 오래된,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방식을 썼을 때 사람들은 훨씬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음식이 장만되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먹고 고기를 나눠 가진다. 음식 나누기는 벌판에 자리를 까는 것으로 족하다.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단처럼 상하 없이 둥그렇게 몰려 앉은 이들은 평시에는 목장과 희로애락을 공유하고 유사시에는 전사로서 위험을 공유해왔다.
유목사 연구자 성제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어차피 고기를 먹을 거라면 어떻게 상에 오르는지 한번 보는 게 낫다.”
음식 준비가 끝날 무렵 압드카르가 물었다.
“원국, 남자들만 부를까?”
“아니, 다 불러야지. 아이들까지 다.”
양 한 마리는 풍성함을 남기고 갔다. 볼케는 나이만 목동들의 주무대다. 그들은 무슬림이지만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커다란 외투 안에 자그마한 술병을 넣고 몰래 한 잔씩 드시는 큽착 어르신의 모습이 천진해 보인다. 그날은 내가 손님을 접대하는 자리였다.
“큰사람(어르신)들께는 큰 고기를 드려야죠.”
엉덩이 쪽 비계가 달린 부분을 어르신들께 드린다. 도시에서 온 나와 친구의 아이들도 이제 고기를 한 점도 남기지 않는다. 이로 힘줄을 끊을 수 없을 때는 뱉는 대신 그대로 삼킨다. 나와 아내는 아이들 넷에게 주의를 준다.
“양이 가는 것 봤지? 여기서 고기를 남기는 것은 죄야. 남길수록 더 죽여야 해.”
초원에는 냉장고가 없으니 마지막 한 조각까지 나누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양 한 마리는 하루 만에 거대한 계곡 전체로 퍼져 나가 백 사람 이상의 몸으로 들어간다.
고 최인훈이 묘사한 “밀실” 중에 가장 좁고 은밀하면서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아마도 냉장고일 것이다. 냉장고는 안과 밖을 철저하게 나누고, 도시의 가구들을 하나하나 단위로 나누고, 심지어 한 명 단위로 나눈다. 어떤 고기는 냉장고 안에서 해를 넘기다 그 안에서 썩기까지 한다. 그가 묘사한 밀실 안의 부패와 섬뜩하게 일치한다. 초원으로 휴가를 온 민희 누나가 해준 말이다.
“한국에서 수박이 팔리지 않아 난리야. 반 개도 다 처리할 수 없거든. 껍질 처리도 힘들고.”
수박은 무적의 원탁의 기사단에게 가장 어울리는 음식일 것이다. 크기는 물론 모양의 차별도 없이 완전히 평등하게 나눌 수 있는 커다란 구형이니까. 그러나 거대 도시는 수박 반 개조차 나눌 사람이 없는 사회에 도달한 것이다.
반면 이렇게 고기를 나누는 벌판은 “광장” 중에도 가장 큰 광장일 것이다. 지난 몇십년간 나는 도시에서 광장이 사라지고 냉장고만 남는 것을 보아왔다. 신입생 시절 모꼬지를 떠날 때면 모여 기타를 치던 청량리역 광장, 항상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벅적대던 천안문 광장, 수천명 가난한 여행자와 함께 누워 깔개로 쓸 신문지를 나누던 정저우역 광장. 그렇게 청춘을 함께했던 광장들은 쇼핑몰과 호텔과 검문소에 밀려 사라졌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공간은 바늘 세울 곳처럼 줄어들었다. 애초에 인간은 길과 언어와 정보, 이들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광장을 공유하면서 문명을 일궜다. 그러니 사라진 도시의 광장을 초원에서 애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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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미르 고원의 초원에서 꽃을 들고 얘기하고 있는 키르기스 모녀.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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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사람들에게 가장 고마운 존재인 양. 털을 주고 때로는 함께 나눌 고기를 준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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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 없는 광장은 약자에게 잔인
그러나 세상의 흐름은 언제나 양면적이다. 광장이 사라진 곳에서 또 광장이 생긴다. 현재의 기술 수준에서 인간이 지혜를 모으면 어쩌면 수천년 동안 갈등을 거듭하던 초원과 정주 문명이 새로운 차원에서 결합하여 더 높은 수준으로 도약할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은 고립된 개인을 만들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사라지는 광장을 보완하여 끊임없이 사이버 공간에서 공유 플랫폼을 만들어내고 있다. 로봇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지만, 근육의 한계를 넘어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제공할 수도 있다. 기술의 얼굴 또한 다면적이다. 시선을 조금 가까운 데로 옮기면 냉장고 없는 초원에서 여성들이 감당해야 할 혹독한 노동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해가 있든 없든 끊임없이 뭔가를 짜고, 나르고, 젓고, 줍고, 끓이고, 치우고, 깐다. 여성주의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냉장고라도 있어 달아오른 그녀들의 얼굴을 좀 식혔으면, 남성의 광장에 포위된 그녀들을 위한 은밀한 “밀실”이 있었으면 할 것이다. 초원에서 아내는 씻지 못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이 초원 어디에도 나이 든 여성이 몸을 씻을 은밀한 공간은 없다. 밀실 없는 광야 역시 약한 이들에게는 잔인한 공간이다. 사회적인 삶은 은밀한 것과 공개적인 것의 조합, 사유와 공유가 결합된 것일 것이다. 유르트가 광야와 침실을 나누어 거친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듯이, 은밀하고 닫힌 것과 공개되고 열린 것이 한 공간에서 조화를 이루는 삶, 수천년 궤를 달리하면서 다르게 성장한 두 문화가 서로를 극복하지 않고 한 공간에서 융합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여름이면 말잡이들은 정신없이 바쁘다. 햇빛이 삶의 절반인 이곳에서 그(이름을 밝히지 않는다)의 아버지는 햇빛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다. 착한 그는 치료비를 위해 매일 말로 등산객들을 나른다. 얼마 전, 아직 신혼인 그에게 물어봤다.
“초원에서 신혼을 어떻게 나오?”
“말이 있잖아. 둘이 몰래 말을 타고 계곡으로 가. 계곡에서 서로 씻겨주고 그랬지. 자네도 말이 있잖아.”
“계곡 전체가 자네 신방이구먼.”
나는 많이 웃었다. 광장 안에 있는 그의 밀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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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힘이 세다. 메마르고 척박한 곳에서도 꽃을 피웠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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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무리를 찾아 밤새 건넌 볼케 계곡. 이 계곡은 위험해서 많은 짐승이 목숨을 잃는 곳이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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