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8.02 19:11
수정 : 2018.08.02 19:56
[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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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소장은 올해 만 65살이다. 얼굴 표정에서 세속의 고통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전 자유롭습니다. 모든 걸 다 가졌어요. 어린 찻잎을 따고 고르고 덖는 일은 그 자체로 수행입니다. 집중력과 절제력에 타이밍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죠. 제대로 된 차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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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1762~1836)이 유배에서 풀려난 게 1818년이니 올해로 200년이다. 그해 다산은 강진 초당을 떠나 고향 남양주로 돌아가기에 앞서 제자 18명과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었다. 초당 강학 때 함께 마셨던 차를 통해 비록 몸은 멀어지지만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이어가자고 약속한 것이다.
모임 규약인 다신계절목도 만들었다. 여기엔 청명 한식일에 계원들이 모여 시를 지어 다산의 큰아들 유산에게 보내고, 곡우날에 어린 차를 따서 잎차 한 근을 만들고 입하 전에 늦차를 따서 떡차 두 근을 만든다는 조항들이 담겼다. 다산은 초당에 맷돌과 화로 등 제다 도구를 갖추고 차를 자급자족했다. 또 중국의 차 전매 제도를 연구한 논문(<각다고>)도 썼다. 한양대 정민 교수는 한국차의 원류인 초의 선사(1786~1866)도 다산에게 차 만드는 법을 배웠다면서 다산은 우리 차 문화의 중흥조라고 평하기도 했다.(<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다신계 결성 200년을 맞아 오는 31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선 ‘다신계와 강진의 차문화’를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린다.(강진군 주최) 내달 14~15일엔 강진군 다인연합회 주최로 다신계 결성 200주년 기념행사도 한다. 31일 정영선 한국차문화연구소장, 박희준 한국차문화학회 회장과 함께 주제 발표를 하는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을 1일 서울 운니동 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이른바 초의차의 5대 계승자로 불린다. 한학을 공부하던 1979년 해남 백화사에서 대흥사 주지를 지낸 응송 스님(1893~1990)을 만났다. 스님은 당시 자신의 원고를 현대적으로 윤문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응송 스님은 초의에서 범해, 원응으로 전승된 초의 제다법의 맥을 이은 분이죠.” 스님은 1985년 박 소장에게 초의다법을 전승하는 증표로 다도전다게(茶道傳茶偈)를 내려주었다. “초의 연구 자료 대부분을 저에게 주시면서 초의 연구를 위촉하셨죠.” 박 소장은 1980년부터 전남 순천시 주암면 4천 평 대밭에서 찻잎을 따고 덖으며 초의차의 원형을 살리는 데 힘써오고 있다. 2001년엔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를 만들어 교육과 연구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다산·제자들 만든 다신계 200돌
31일 학술대회·내달 강진 기념행사
‘다산과 다신계’ 조명 주제 발표
“다산, 제자 그룹에 차 중요성 각인
차 문화는 승려 그룹이 이끌어”
초의차 5대 계승자로 ‘동춘차’ 명성
그는 먼저 다신계가 조선 후기 학술·문화사에서 갖는 위치를 이렇게 정리했다. “다신계엔 다산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학문적 결속을 했던 다산학단의 특징이 잘 드러나요. 결성 초기엔 유생만 계원이었어요. 뒤엔 다산의 뜻에 따라 황상 등 중인 제자 넷과 승려 두 명도 계원으로 받아들여요. 이런 구성은 조선 후기 학단에선 유례가 없죠.” 초의는 다산학단에 포함되지만 계원은 아니었다. “초의는 다산 장남인 유산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를 포함해 경향 각지의 영향력 있는 인사를 만날 수 있었죠. 초의차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를 만들어 준 이가 바로 다산입니다.” 그는 초의의 제자 범해와 다산 손자들도 시와 편지, 차를 나누며 교유했다면서 다산학단 네트워크의 영향력은 19세기 말까지 지속됐다고 했다.
그는 다산이 조선 시대 들어 쇠퇴한 차 문화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중흥조란 평가는 과하다고 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차 문화는 승려들이 주도했어요. 중흥조라면 차 향유층을 확대하고, 지속해서 차를 만들어 독창적인 차를 개발했어야죠.” 덧붙였다. “다산이 유배당했던 강진엔 당시 사찰 차 문화가 남아 있었죠. 다산은 강진 백련사 스님 아암이 만든 차를 마시면서 차의 중요성을 인식했죠.” 그는 “다산이 차를 좋아해 제자들에게 차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점과 차 생산을 국익과 연결하는 실용적 관점을 취한 건 평가할 대목”이라면서도 다산이 직접 차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양반인 다산이 직접 차를 만들었을까요? 아마 초당에 차를 만드는 이가 따로 있었을 겁니다. 다산은 차 이론가이자 향유자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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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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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차 사랑’은 왜? “처음엔 위장병 치료 때문이었지만, 뒤에는 유자로서 차를 즐기는 게 수신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했겠죠. 문인의 풍류로서 차의 덕성을 이해한 것이죠.”
박 소장이 제자들과 함께 만드는 차는 ‘동춘차’로 불린다. 팔지는 않고 후원자들과 나누기만 한단다. “매년 30g 단위로 600포를 만들어요. 상업화하면 제가 지향하는 차의 정점의 세계에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아 판매는 하지 않아요.”
목표는 초의차의 원형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이다. 초의차의 제다법 특징? “첫째는 재래 무쇠솥을 쓰는 것이죠. 또 찻잎을 덖을 땐 다솔을 씁니다. 마지막 공정은 차를 온돌에 말리는 것이죠. 한국의 생활공간을 그대로 활용한 공정입니다.”
초의차를 전통차의 원형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초의차는 1840년 완성된 뒤 전통이 전승되었어요. 다른 차는 그렇지 않아요. 응송 스님이 쓴 <동다정통고>엔 대흥사에 귀한 손님이 오면 차를 대접하는 법에 대한 기록이 있어요. 부엌에는 늘 숯불이 준비되어 있었고 무쇠솥을 도르래로 매달아 물을 끓였어요. 물이 끓기 시작하면 차를 한 줌 넣었죠.” 사찰의 이런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까? “대처승이었던 응송 스님이 불교계 정화로 대흥사 주지에서 물러나면서 다른 사찰 승려들이 들어왔죠. 그 뒤론 전통이 제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기 어려워요.”
그는 차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요소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차를 통해 일시적이지만 이상적인 시·공간을 경험할 수 있어요. (차는) 시원하면서 환하고 가슴을 열어주는 향기가 있고 따듯한 원기를 줍니다.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향에 가깝죠.”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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