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르포
이유주현 기자의 국제걷기대회 참가기
▶ 7월19~22일 네덜란드에서 열린 ‘네이메헌 국제걷기대회’엔 머리꼭지를 태울 듯 이글거리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하루에 30~55㎞씩 걷는 ‘정신 나간’ 이들이 수만명에 이르렀습니다. 나흘에 걸쳐 160㎞를 걷는 동안 걸음을 멈추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상냥하고 흥겨운 네덜란드 시민들의 환영에 유혹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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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아침만 해도 나(왼쪽)는 씩씩한 발걸음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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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아침 7시인데도 마을 주민들이 나와서 밴드 연주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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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연은 ‘그 길’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올여름 폭염에 휩싸인 유럽에서 160㎞를 걷게 된 것은.
2010년 봄, 네덜란드인 조시, 코리와 한국인 미라, 실비아는 스페인 ‘순례자의 길’(카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만났다. 800㎞를 걸으며 두터운 우정을 쌓은 그들은 이후에도 네덜란드와 한국을 오가며 종종 만났고 나도 그 어느 틈엔가 끼어 얼굴을 익혔다. 내가 그들의 ‘네이메헌(Nijmegen) 행군’에 선뜻 함께하게 된 것은, 나 역시 4년 전 걸었던 ‘순례자의 길’에서 느꼈던 감동이 깊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7월19~22일 네덜란드의 소도시 네이메헌에서 열리는 4일간의 세계걷기대회에 참가한다는 ‘카미노의 벗’들에게 절로 이끌려, 나는 휴가를 맞아 부랴부랴 암스테르담으로 떠났다.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30분 정도 걸리는 네이메헌은 인구는 17만여명에 불과하지만 20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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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종착점인 네이메헌의 베드렌 광장으로 향하는 길에 나온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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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 1만원꼴, 속이 쓰렸다
18일 오후 네덜란드 친구들이 마련해둔 네이메헌 주택가의 숙소에 짐을 풀고 걷기대회의 시작·종착점이자 대회 본부가 차려져 있는 베드렌 광장으로 향했다. 네덜란드어로 ‘Vierdaagse’(4일)라 불리는 이 대회는 1909년 주로 군인들의 신체훈련을 위해 시작됐다고 한다. 처음엔 306명의 참가자 중 민간인이 10명에 불과했지만 이젠 민간인이 4만여명에 이르고 세계 각국에서 온 군인 5천~6천명 정도가 참여한다(여성이 처음으로 출전한 건 1919년이었다). 1·2차 세계대전 동안엔 대회가 열리지 못했고 2006년엔 폭염으로 2명이 숨지면서 대회 자체가 취소되는 바람에, 올해가 꼭 100회째다.
‘100’이라는 숫자의 상징성 때문인지 올해는 유독 참가 희망자가 많아 조직위는 지난 4월 추첨을 통해 5만명을 추려냈다. 일찌감치 참가 신청을 하고 추첨에도 합격해 정식으로 대회에 참가한 친구들과 달리, 나는 너무 늦게 합류하는 바람에 ‘잉여인간’으로 친구들과 함께 걷게 됐다. 베드렌 광장에 차려진 본부에서 등록을 마친 친구들은 손목에 노란 띠를 매고 있었다. 노란색 밴드는 하루에 40㎞씩 총 160㎞를 걷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55㎞는 주황색, 50㎞는 빨간색, 30㎞는 하늘색 띠다. 55㎞는 100주년을 맞아 올해만 특별히 마련된 코스로 이번엔 1천여명이 신청했다고 한다(주황색 띠를 두른 사람을 보면 슬그머니 기가 죽었다). 출전자들은 새벽 5~6시에 출발해 나흘 동안 네이메헌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을 걷는다. 한국으로 치자면, 서울에서 출발해 하루는 의정부, 하루는 성남, 하루는 수원, 하루는 인천 방향으로 걸어 돌아오는 셈이다. 이 기간 동안 네이메헌 인근 동네에선 걷기 코스를 따라 주민들의 축제가 펼쳐진다. 참가자들은 언제 출발했든 모두 오후 5시까지는 베드렌 광장으로 돌아와야 그다음날 출전할 기회를 얻게 되며, 이렇게 나흘 동안 다 걸어야 메달을 준다.
1909년 군인들 훈련 위해 시작
100회째인 올해엔 5만명 참가
네이메헌 인근 차례로 걸으면
새벽에도 주민들 응원 나와
아낌없는 미소·박수·환호
‘흥부자’ 넘쳐나는 나라였나
경찰도 호루라기 불며 춤춘다
뜨겁던 길에선 무얼 얻었나
19일 첫날, 새벽 5시.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길을 걸어 베드렌 광장으로 향했다. 새벽인데도 길거리엔 응원하러 나온 네이메헌 주민들이 쫙 깔려 있다. 줄을 지어 “석세스!”(success)라고 고래고래 외치며 걷는 이들에게 하이파이브를 청한다. 새벽까지 마신 술병을 손에 든 채 어깨와 엉덩이를 들썩이며 춤추는 이들도 눈에 띈다. 걷는 건 우리들인데, 즐기는 건 자기들이다. 10시가 되자 벌써 햇볕이 따가워졌다. 섭씨 29도. 수직으로 내리꽂는 햇발에 얼굴에 바른 선크림이 녹아 눈 속으로 밀려들어 따갑다. 그늘도 없는 아스팔트길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듯하다. 시리아 난민처럼 저벅저벅 밑도 끝도 없이 걷는 무리에 섞여 무작정 걸었다. 삼복더위에 ‘조국’의 시원한 피서지도 놔두고 이역만리에서 왜 이 짓을 하고 있는가 싶다. 비행기 삯이 160여만원이고 걷는 거리가 총 160㎞니까 1㎞마다 1만원. 속이 쓰려 그만두고 집에 갈 수도 없다. 도처에선 ‘삐용삐용’ 구급차 사이렌이 들린다. 더위를 견디지 못한 이들이 속속 쓰러져 가는 소리다. 아, 나도 차라리 구급차에 실려가고 싶은데, 정식 참가자가 아니니 안 받아주려나, 몸이 아파도 병원에 못 가는 불법체류자의 심정이 이러하려나…. 첫날은 새벽부터 서둘렀던 탓에 겨우 오후 5시 전에 도착했다. “이렇게 걷고 나면 뭔가 깨닫는 게 있을까?” “장에서 숙변 제거하듯이 뇌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뇌도 장처럼 꼬불꼬불 주름이 잡혀 있잖아.” 친구랑 나는 시시껄렁한 대화를 주고받다 맥주를 한잔 마시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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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걷기대회 둘째 날은 드레스코드가 ‘핑크’다. 한 대회 참가자가 분홍색 옷을 차려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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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후. 실비아(왼쪽)와 나는 낙오자가 되자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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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암스테르담으로 관광을 다녀오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사라진 건 둘째 날부터였다. 첫날 너무 무리했던 친구 실비아는 컨디션이 무척 나빴다. 발엔 커다란 물집이 잡혔고 허벅지 근육이 땅겨 제대로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했다. 우린 쉬엄쉬엄 걷다가 길 중간에 마련된 메디컬센터에 들러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체육관 비슷한 곳에 차려진 의료센터는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다. 정오쯤이었나 보다. 마사지를 받고 나오니 길바닥에 바글바글했던 무리들이 싹 사라져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와 비슷한 ‘루저’들이 다리를 절뚝이며 걷고 있었다. 신기한 건, 그때부터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다. 풍경이 눈에 들어왔고, 같이 걷는 이들에게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왜 쟤는 저리 뒤처졌을까, 어디가 아플까, 친구들이 못 걷는다고 버리고 간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혼자 걸었던 걸까, 저렇게 걸으면서도 오후 5시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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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마을 주민들이 ‘이제 이틀밖에 안 남았다’는 펼침막을 내걸고 대회 참가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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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 온, 걸스!” 구경꾼들은 물을 뿌려주며 오이가 담긴 그릇을 내밀고 사탕과 빵, 과자를 건넸다. 마을 곳곳에선 커다란 스피커를 길가에 내어놓고 팝송을 틀었고, 노래깨나 하신다는 분들은 간이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동네 브라스밴드는 걸쭉한 화음을 내뿜었고, 사람들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꼬마들은 물론 어른들조차 물총을 들고 “예스? 오어 노?”라고 물으며 “예스”라고 답하면 물줄기를 쏘아대며 웃었다. 그저 걷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미소와 박수,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네덜란드가 원래 이렇게 ‘흥부자’가 넘쳐나는 나라였던가?
몇 마디 나눠보진 못했지만, 흥미로운 이들도 만났다. 일본·대만(타이완)·한국의 걷기대회에 다녀왔다는 한 중년의 네덜란드 군인은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두 유 노 원주?”라고 대뜸 물었다. 원주가 고향인 나조차도 안 걸어본 원주국제걷기대회가 ‘네이메헌 친구’들에겐 꽤 유명한가 보다(캐나다에서 왔다는 줄리도 ‘두 유 노 원주?’라고 물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 네덜란드 군인은 군대에선 담배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는 대신 가끔 ‘카나비’(대마초)를 피운다고 했다. 아시아 3개국 중 한국이 가장 좋았다는 그는, 무엇보다도 서울 시내의 한 공원에서 ‘retired old people’(은퇴한 노인들)과 함께 소주를 마셨던 게 가장 인상 깊다고 강조했다. 자기를 무척 좋아해줬다나. 가만히 듣고 보니 탑골공원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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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후 마을 주민들이 손으로 터널을 만들어 대회 참가자들을 지나가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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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닉스가 5㎞를 함께 걸어준 속내(?)
둘째 날 오후 길에서 만나 함께 걷게 된 19살 대학생 마르닉스는 지난해 실패에 이어 올해 다시 50㎞ 코스에 도전했다.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규칙적으로 보폭을 유지하고 걷던 그는 시간에 비해 갈 길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도 “온타임(on time)에 도착할 수 있다”고 우겼다(우린 이날 5시10분에 도착했는데, 폭염으로 마감 시한이 30분 연장되면서 결국 그의 말이 이뤄졌다). 그는 발목 부상으로 이틀 만에 걷기를 포기했지만, 넷째 날 35㎞ 지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마지막 5㎞를 함께 걸었다(참 훈훈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그는 내 친구 실비아를 자기 나이 또래로 생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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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네이메헌의 베드렌 광장으로 향하는 길에 시민들이 늘어서 박수를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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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마을 주민들이 환영의 뜻으로 북춤을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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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종착점에 이르는 ‘비아 글라디올라’라고 불리는 거리에선 시민들이 걷는 이들에게 글라디올러스를 아낌없이 나눠준다. 검(劍) 모양을 닮은 이 꽃은 승리를 상징한다. 발길 닿는 곳마다 뾰족한 글라디올러스 잎줄기가 떨어져 있고, 플라스틱컵 같은 쓰레기가 길가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구경꾼들은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환호한다. 교통정리를 하던 경찰들도 호루라기를 불며 춤을 춘다. 덩치 좋은 한 남자 참가자는 흥에 겨운 나머지 구경 나온 여성 한 명을 등에 메고 내달린다. 도시 전체에 들끓어오르는 열기로 넋이 나갈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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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강둑길을 대회 참가자들이 길게 늘어서서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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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친구들은 모두 메달을 받았고, 나도 무사히 완주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여전히 부어 있는 발목과 1㎏도 내려가지 않은 체중계 눈금을 보며 물음을 던진다. 그 뜨거웠던 길에서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버리고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글·사진 네이메헌(네덜란드)/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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