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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3.04 19:49 수정 : 2014.03.05 14:02

포도밭의 바닥을 쓰다듬는 박종관씨. 살아있는 흙을 만드는 것이 농사의 근본이다.

[나는 농부다] 상주 귀농 박종관·김현 부부

그들이 20대였을 때, 처음 만났을 적 모습이 생각난다. 저렇게 젊은 부부가 귀농을 했나, 반가움에 다시 보이던 해맑은 부부였다. 포도농사를 배우고 있다 했지. 나 역시 막 귀농을 하고 유기농 모임을 찾아다니던 때였다. 눈빛을 반짝이던 그들 부부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경북 상주를 찾았다. 높은 산자락 아래 낮게 깔린 들판에 주욱 늘어선 포도밭들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니 일러준 팻말이 눈에 띄었다. ‘향유네’. 독특하다. 나중에 종교적인 삶의 내력을 듣고 그가 빚은 포도주 맛을 보고 나니, 딱 걸맞은 이름이다 싶었다. 포도밭을 마당 삼은 산뜻한 양옥집, 오밀조밀한 농장살림, 밭 자락이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문전옥답 아닌가! 마흔세살의 동갑내기 박종관씨와 김현씨 부부, 그들은 그렇게 어엿한 농부로 살아가고 있었다.

“고생 엄청 많이 했어요.” 말머리에 내비친 그 한마디를 들으니 거기에 그들이 살아온 시간이 켜켜이 재어 있구나 싶었다. “17년 동안 집과 땅을 다섯번이나 옮겼어요. 살 만하게 집을 고쳐놓았는데 내놓고 나온 적도 있고요. 포도원을 빌려서 농사짓다가 쫓겨나기도 했고요. 농약을 치지 않으니 풀이 쑥쑥 자라는데, 그래서는 과일나무 버린다는 거였죠.” 빗자루 하나라도 없으면 불편한 시골 살림에 그렇게 짐 싸들고 옮겨다녀야 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 참담했을까. 집 없고 땅 없는 설움이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 ‘이제 시작인데 뭐’ 하면서 자신을 다독이면 되었다. 그러나 “유기농이란 게 한곳에서 오랜 시간 정성을 기울여야 제대로 되는 것인데 그럴 수 없게 되었구나 싶은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때는 도시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회의감에 시달렸다.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삶이 무엇인가”를 묻던 첫 마음이 그를 붙잡아주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나 보수적인 신학대학을 다니던 20대 청년은 어떻게 농사를 꿈꾸게 되었을까? “길 잃은 어린양을 구원해보겠다며 목회자를 꿈꿨지요. 자신이 길 잃은 어린양인 줄도 모르고요. 대학교에 들어와 보니 머리로 사는 삶, 말로 사는 삶, 이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몸으로 살고 싶었지요. 농사짓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말씀에 충실한 삶이라고 여겨졌고요.” 대학 4학년 때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귀농학교를 다니면서 귀농의 꿈은 날개를 달았다. 대학 졸업식 날 동기동창인 부인과 결혼까지 마치고 다음날로 경북 김천에서 무농약 포도농사를 짓는 댁으로 달려갔다. 햇병아리 부부는 거기서 친환경 포도농사를 배웠다. ‘머슴살이 3년’ 만에 ‘독립 만세’를 외치며 상주로 옮겨와 그들만의 농사를 시작했다. 고생길이었다.

박종관·김현씨부부와 둘째딸 선린이. 맏딸 향유가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다.

머리 아닌 몸으로 살고 싶었다
대학 졸업 다음날 농촌으로 가
‘머슴살이’ 3년 마치고 독립했다

처음엔 좁은 세계 아닌가 싶었다
살아보니 더 크고 넓은 세계였다
녹비작물 심고 좋은 퇴비 만들어
유기물 5% ‘생명의 땅’ 가꾸고 싶다
2~3년 더 하면 목표 이룰 것 같다

7년 동안은 손에 쥐는 돈이 한해 1천만원을 밑돌았다. 겨울 한철엔 한옥 목수일을 다니며 집 짓는 기술도 배우고 돈벌이도 했다. 귀농 8년 되던 해. 정부에서 빌려주는 융자를 받아 1만㎡의 땅을 샀다. “첫 고리가 걸리니 그다음부터는 일이 잘 풀리더라고요.” 그해 새마을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뜨내기,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마을의 한 구성원으로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싶으니 뿌듯하더라고요.” 땅까지 마련했으니, 이제는 정착하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농사는 늘 농부를 새로운 시련 앞에 세운다. “그러다가 서너 해 지나 봐라, 탈농하게 될 거야.” 관행농 어르신들의 걱정이 들어맞으려는 듯 포도나무가 잘 자라지 못해 추위에 얼어 죽는 일마저 생겼다. “유기농을 한다고는 하지만 내가 제대로 농사지었던 거 맞나”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솟아올랐다. 벼랑 끝에 내몰린 위기감으로 그는 ‘땅심을 온전히 되살리는 근본원리’에 따라 자신의 농사를 재구성하는 일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없고, 교과서에만 있는 유기물 5%를 지닌 생명의 땅으로 가꾸는 것이 목표. 청보리, 호밀 같은 녹비작물을 꾸준히 심고, 겨우내 나무를 파쇄해 질 좋은 퇴비를 만드는 데 공을 들이는 것도 그래서다. 이제 2~3년만 더 노력하면 목표에 도달할 것 같다.

향유네 농장에서 유기농으로 빚은 ‘향유 포도주’의 맛과 향은 탁월하다.

지금 그는 포도밭에 더해 논 4600㎡, 복숭아밭 1000㎡, 텃밭 660㎡까지 1만6000여㎡의 농사를 짓는다. 땅 살 때 빌린 돈도 다 갚고, 집과 퇴비사, 포도 가공하는 시설까지 두루 갖추었다. 지난해에는 마을 이장이 되었다. 가정도 땅도 집도 마을 안에서의 인정도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이뤄냈으니 자수성가라 할 만하다. 이쯤 되면 농사에 이골이 났을까? “제 농사는 실패담의 연속이었죠. 아직도 실험중이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봐요.” 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성찰을 그를 통해 확인한다.

농사짓는 삶, 이제 보니 어떤가? “처음엔 좁은 세계로 들어가는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살아보니 여기가 더 크고 넓은 세계였어요. 무엇보다도 대안적 삶을 열어가려는 정말 좋은 분들과 사귈 수 있었고요. 그러면서 너무나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죠.”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에게서 그렇게 마음의 은총을 받았다고 느끼니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교회엔 다니고 있을까? “‘낙동강에 선교하러 갑니다’ 하는 인사가 마지막이었죠.” 2009년 시작한 4대강 사업은 그의 삶도 뒤흔들어 놓았다. “낙동강이 죽어가고 있구나. 하나님이 피 흘리며 아파하고 계시구나 싶어 뭐에라도 홀린 듯” 뛰어다녔다. 당시 상주에 머무르면서 낙동강 순례를 이끌던 지율 스님을 통해 죽음이니 부활이니 하는 종교적 언어의 맨살을 느꼈다. 관념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내놓으며 온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거였다. 현란하고 유창한 언어로 하나님의 영광을 떠들면서 정작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교회를 참아낼 수 없었다.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생각하는 틀은 기독교적이에요.” 화석화된 언어의 그물망으로서의 종교를 벗어던졌다고는 하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참된 종교적 삶을 갈구하고 있구나.

농사를 통해 종교적 화두를 풀어가는 농부 박종관. 진정성 있는 농부의 삶 그 자체가 종교 아닐까. 그는 그렇게 살아내고 있다.

상주/글·사진 이현숙 전국귀농운동본부 이사 bori07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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