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1. 8∼9(목찰영·木札嶺·무자링)
매년 11월초면 내 고장, 전북 내장산은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전 국민을 유혹한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 한들거리며 떨어지는 붉고 노란 잎들은 가는 해를 아쉬워하며 산사의 추녀 끝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지금쯤이면 내 고향, 전주의 은행나무 가로수도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며 시민들의 마음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을 것이다. 이곳 하남성 정주(鄭州)는 ‘녹음(綠陰)의 도시’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일품이다. 그렇지만 넓은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곱게 물들지 않아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기에는 부족하다. 도심 공해가 심한 탓에 잎사귀들이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제 색깔의 옷으로 갈아입지 못하고 말라비틀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주 도심을 벗어나면 얘기는 달라진다. 노랗게 물든 포플러나무 숲이 대평원을 뒤덮고 있다. 산수가 수려한 하남성에 단풍으로 유명한 미인 산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마침 이 번 주말에 정주금휘여행사(鄭州金輝旅行社)에서 단풍 관광객을 모집한다고 한다. 목적지는 목찰영(木札嶺·무자링), 1박 2일 코스다. 목찰령,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인터넷을 통해 목찰령이 대해 조사해보았다. 황하 이남 낙양시 숭현(嵩縣) 경내에 있는 고산이다.
낙양은 ‘천하의 명도(名都)’로 불릴 만큼 유명한 고도(古都)다. 한 국가의 수도가 되기 위해서는 전국 각지로 연결되는 교통이 편리해야 하고 외침을 막는 데 유리한 지형 조건을 갖추어야 하며, 또 산물이 쉽게 집결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낙양은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 황하가 낙양의 북방 지역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고, 낙하(洛河)가 남쪽 지역을 관통하므로 외침에 대비하고 수로를 통해 사방으로 뻗어나가기에는 더 없이 좋은 길지다. 또 낙양 서남쪽으로는 복우산맥(伏牛山脈)이 뻗어있고, 동쪽으로는 대평원이 펼쳐져 있어서 산과 평원에서 나오는 산물들이 낙양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것이다. 숭현은 낙양 남쪽 산악 지대에 있는 소도시다. 숭현 경내에는 백운산(白雲山), 천지산(天池山), 석인산(石人山) 등 명산들이 즐비하다. 숭현은 이미 여러 차례 가본 곳이라 낯설지 않다.
11월 8일(토요일) 아침 6시 30분까지 황하로(黃河路)에 있는 중부(中孚) 빌딩 앞에 모이라는 전갈이 왔다. 여행 경비는 175위안이다.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 한 겨울 날씨를 방불케 한다. 나 혼자 차안에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한 떼의 사람들이 우르르 올라탄다. 금석건축장식공사(金石建築裝飾公司)에 다니는 사람들이다. 직원 단합을 위해 놀러간다고 한다. 그리고 노인 부부, 내 또래 부부 몇 쌍이 올라탄다. 그들은 내가 혼자 여행하는 게 신기한가보다. 약간은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본다. 가이드 자오팅(趙婷)이 내가 한국에서 온 여행객이라고 소개하자, 다들 호기심에 찬 눈길을 보낸다. 하남성의 명산을 한국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게 내 취미라고 하자, 한 아저씨가 이렇게 말한다.
“하남성 인민 1억을 대표하여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그런데 한국은 불고기가 맛있어, 나도 한 번 먹어보았지.”
대형버스를 운전하는 아저씨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부부동반 여행을 한다고 한다. 아침부터 하남성 인민 1억을 대표하는 분에게 인사를 받아 기분이 좋다. 버스는 어느덧 정소낙(鄭少洛: 정주, 소림사, 낙양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고속도로를 힘차게 달린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다. 가이드 자오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분위기를 띄운다.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투박한 노래가 이어진다. 그런데 한 아저씨의 코를 고는 소리가 노래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린다.
소림사 휴게소에 이르자 오악(五岳) 중의 중악(中岳)에 해당하는 숭산(嵩山)의 한 자락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인다. 숭산은 언제 보아도 기험한 암벽이 장관이다.
숭현의 산악 길을 달려 4시간 만에 차촌진(車村鎭) 목찰령 입구에 도착했다. 가이드가 먼저 숙소의 방부터 배정한다. 30여 명 인원의 방 배정이 다 끝나자 나에게는 독방을 내준다. 내가 사전에 부탁한 것이다. 20위안을 추가로 내야 한다고 한다. 점심시간이다. 숙소 주인이 야채 위주의 풍성한 음식들을 한 상 가득 내온다. 중국 음식은 대체적으로 기름기가 많지만 산중 음식은 그렇지 않다. 기름기가 적어 맛이 담백하다. 이곳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 지 궁금했다. 마침 숙소 마당에서 한 아주머니가 무를 수북이 쌓아놓고 채를 썰고 있다. 채를 썬 무, 당근 등을 말려 겨우내 먹는다고 한다. 또 무 잎사귀도 버리지 않고 말려서 먹는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식습관이다. 옥수수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길이 뚫리기 전에는 옥수수가 주식이었다고 한다.
1934년 12월 1일에 중국 공산당 홍(紅) 25군이 이 목찰영에서 낙양으로 진입했다는 표지석이 마을 어귀에 서 있다. 국공 내전 시기에 이곳은 공산당 해방구였다. 먼저 농촌과 산간 마을을 접수하고 난 뒤 대도시를 포위 공격한다는 마오쩌둥의 전술이 이 첩첩산중에 자리 잡은 차촌진에서도 전개되었던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 살아가는 모습도 변하는 법이다. 지금 차촌진은 도시민들이 휴식을 취하는 민박촌으로 변하고 있다.
목찰영 매표소는 성채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우리 일행 이외는 관광객들이 보이지 않는다. 매표소 직원 몇 명이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창구도 폐쇄했다. 창구 벽에 붙어있는 숭현호림방화지휘부(嵩縣護林防火指揮部) 명의의 큼지막한 공고문이 11월 1일부터 내년 4월 30일까지 목찰영 입산을 전면 불허함을 알리고 있다.
“몰래 들어가다 적발되면 10∼50위안 벌금, 산에서 불을 피우다 걸리면 50위안∼100위안 벌금, 만약 화재를 내면 경제적 배상은 물론이고 반드시 형사 처벌할 것임. 또 관계 공무원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당기(黨紀), 정기(政紀)에 회부하여 엄중하게 처벌함.”
산을 봉쇄한다는 이른바 ‘봉산(封山)’이다. 쉽게 말해서 겨울에 화재를 예방하고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 입산을 전면 금지하는 것이다. 하남성에서도 화재 예방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다. 원래 풍경구 안에서는 담배와 라이터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흡연자들이 너무 많고, 심지어 계도에 앞장 서야 할 매표소 직원들조차 금연 지역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현실이라 단속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어렵사리 이곳까지 왔는데 입산 금지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일행 모두 가이드만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걱정 말아요. 사전에 얘기가 다 됐어요.”
아니나 다를까, 한 직원이 우리에게 줄을 서라고 한다.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고 입장을 시킨다. 나중에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원래 입산 금지가 아니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들어왔지?”
“에이! 몰라도 돼요. 실제로는 11월 10일부터 입산 금지요.”
정말 모를 일이다.
왜 우리 일행만 받아주었는지. 어쨌든 그 높은 산을 우리 일행이 통째로 차지한 행운을 얻었다. 목찰영은 전형적인 화강암 미인 산이다. 둥글둥글한 암반들이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곱게 물든 단풍들이 계곡을 붉게 수놓았다. 청정한 계곡물에 손을 담가보았다.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엄습한다. 하남성 명산 계곡에 널려있는 음식점들이 이곳에는 한 군데도 없는 덕분에, 계곡물이 지리산 뱀사골 계곡물처럼 맑고 차가운 청정수다. 계곡 사이에 난 돌계단을 따라 조금 오르자 육중한 화강암 암반 위에서 두 줄기 가는 폭포수가 암반을 타고 살금살금 흘러내린다.
천하폭(天河瀑)이다. 기기묘묘하게 생긴 암벽에 하얀 천을 걸쳐 놓은 듯 하다. 하지만 수량이 많지 않아 장쾌한 느낌은 없다. 그런데 폭포 옆 절벽에 설치한 사다리 길이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을 저리게 한다.
“저런 암벽에 어떻게 길을 냈을까.”
길이 끊기면 암벽을 뚫어서라도 기필코 길을 내는 게 중국 사람들의 전통이다. 중국의 명산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잔도(棧道)니, 천제(天梯)니 하는 것들은 대부분 천 길 낭떠러지 절벽에 철심을 밖아 만든 위험천만한 길들이다. 한 발자국만 헛디뎌도 그대로 황천길이다.
천하폭 옆 절벽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활도(滑道)가 있다. 하산할 때 타고 내려가라는 미끄럼틀이다. 대충 보아도 경사각 50℃ 이상 되어 보인다. 중심을 잃고 튕겨나가면 저승 세계로 직행하는 것이다. 이곳의 활도가 워낙 위험한 시설물이라고 판단했는지 활도 주변에 철망을 단단히 쳐 놓았다.
다복교(多福橋)를 지나자 이번에는 통천폭(通天瀑)이 나온다. 목찰영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폭포라고 하지만, 물줄기가 가늘어 멀리서 보면 길고 가는 하얀 천 몇 가닥을 암반 위에 걸쳐 놓은 것 같다. 폭포 옆에는 빨간 정자가 허공을 향해 날아갈 듯 앉아 있다.
가이드 자오팅이 오늘은 통천폭까지만 오른다고 한다. 아직 오후 3시도 안 되었는데 일행들에게 하산을 재촉한다. 얼추 1시간만 더 올라가면 산 정상에 다다를 것 같다. 가이드에게 저녁 6시 식사시간 전까지는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일행과 헤어져 산 정상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구당구(九䃥溝) 계곡에 들어서자 아기자기한 폭포들이 연이어 나온다. 하늘을 가린 짙은 녹음이 폭포수를 더욱 희게 한다. 날이 어두워지자 온몸에 한기가 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정상에 이를 것 같다.
그런데 웬걸,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올라 간 곳이 산중턱에 난 산악도로다. 노반령(魯班嶺) 정상까지는 산악도로를 따라 10km 이상 더 들어가야 한다. 내가 작은 산봉우리 하나를 정상으로 착각하고 만용을 부린 것이다. 산악도로를 따라 천천히 숙소로 내려왔다. 다들 숙소 식당의 원탁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저녁밥을 기다리고 있다. 낮에 나와 몇 마디 말을 나눈 아저씨가 빈 그릇에 고량주를 가득 채워준다. 칼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밤에 고량주 한 잔보다 더 좋은 음식은 없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7시 일행 모두 얼굴이 푸르뎅뎅하다. 난방이 없는 방에서 잔 까닭이다. 노란 좁쌀죽 한 사발로 아침을 때우고 난 뒤 목찰영 경내를 운행하는 승합차에 올라탔다. 목찰영의 최고봉인 노반령은 해발 2153m다. 노반(魯班)은 춘추시대의 유명한 목수 이름이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그를 건축과 기계 분야의 조사(祖師)로 추앙하고 있다. 반문농부(班門弄斧)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옛날에 노반의 집 앞에서 감히 도끼를 놀리며 물건을 만드는 어리석은 사람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다는 말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노반이 좋은 목재를 구하기 위해 목찰영에 온 적이 있다고 한다. 노반령까지는 걸어서 올라가면 하루가 걸린다고 한다. 그래서 승합차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 일행을 태운 승합차는 험준한 산악도로를 굽이굽이 돌며 쏜살같이 올라간다. 해발 1950m에 위치한 원시 산림구 주차장에 일행을 내려놓는다. ‘원시(原始)’라는 말이 있어 아마존의 원시림 같은 울창한 숲을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원시산림은커녕 소나무 숲조차 보이지 않는다. 볼품없는 떡갈나무 천지다. 앵두나무 삼림욕장을 지나자 왕산(王山)이 나온다. 왕산에서 노반령 사이에 펼쳐진 운해는 필설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운해는 처음 본다.
카메라 셔터를 정신없이 눌러댔다. 바람이 일 때마다 봉우리들이 구름 사이에서 춤을 춘다. 대자연의 신비한 조화가 목찰영을 한 폭의 살아있는 동양화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목찰영 운해가 하남성 제일의 운해라고 한다. 오늘 이 운해를 제대로 보았으니 이번 여행은 대성공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토지아(土地垭)에 이르자 저 멀리 사람을 닮은 석인산(石人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올 봄에 등정했던 산이다.
노반령 정상은 미개발 지역이라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다시 차를 타고 산 중턱으로 내려왔다. 어제 혼자 올라왔던 구당구 계곡으로 내려갔다. 점심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고 오후 1시까지 주차장에 집합하라고 가이드가 말한다. 손님의 발길이 끊긴 허름한 식당에 들어갔다. 아주머니가 하품을 하며 나온다. 오늘같이 추운 날 무슨 등산이냐며 핀잔을 주며 칼국수 한 그릇을 뚝딱 만들어준다. 추위를 이기는 데는 따끈한 국물이 제격이다. 해가 뉘엿뉘엿 숭산을 넘어갈 때쯤 무사히 정주에 도착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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