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4.07 13:28
수정 : 2008.04.08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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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골' 차림표에 있는 '오도로초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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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의 메뉴토크] 초밥집 ‘은행골’
절반 값에 맛은 두배…후식은 ‘묵은 정’
손님과 ‘형-동생’…집안 대소사도 챙겨
음식 만화 <맛의 달인>(하나사키 아키라, 가리야 데쓰 작)의 ‘초밥에 숨겨진 마음’ 편은 이렇다. 각종 언론이 맛있다고 소개한 한 초밥집. 주인은 기고만장하다. 그는 손님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다. “맛없으면 가라, 네 입맛이 저질”이라고 소리친다. 그 자만을 주인공 야마오카 지로가 깼다.
야마오카는 주인을 데리고 낡고 허름한 동네의 초라한 초밥집으로 끌고 간다. 친절하기 짝이 없는 그 집 주인 미지로가 내놓은 초밥의 기막힌 맛은 기고만장했던 초밥집 주인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았다. 야마오카는 이렇게 말한다. “정성이 담기지 않은 초밥은 그저 밥 덩어리에 지나지 않아.”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맞은편 좁고 누덕누덕한 골목에서 만난 초밥집 ‘은행골’의 주인 손경원(42)씨는 친절한 미지로를 닮았다. 그의 초밥은 초라해 보이지만 그 안엔 정성이 가득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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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롭게 단장한 '은행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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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허름한 동네에 겉은 초라…튀김이나 무침은 생략
이 집의 주메뉴는 참치초밥이다. 주인 손씨는 “참치 중에서도 질 좋은 참다랑어를 재료로 쓰는 게 우리 집의 특징”이라고 자랑한다. 참치의 정식 이름은 다랑어이다. 참치는 동해안 지방의 방언이다. 해방 직후 해무청 어획 담당관이 동해안 방언인지 모르고 다랑어를 참치라고 보고하면서 참치란 말이 더 널리 쓰이게 됐다고 한다. 다랑어에는 참다랑어, 가다랑어, 황다랑어, 점다랑어, 백다랑어, 눈다랑어, 날개다랑어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맛은 참다랑어를 최고로 친다.
손씨는 이 집 메뉴의 대표로 오도로초밥(오도로란 ‘큰 뱃살’이란 뜻의 일본말)을 내세운다. 맛도 좋고 값도 싸기 때문이다. 참치초밥의 최고급품으로 꼽히는 오도로초밥은 참다랑어 뱃살로 만드는데, 12개들이 한 접시가 2만원. 일반 참치 초밥집보다 절반 이상 저렴한 수준이다.
“다른 집 요리사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놀랍니다. 이렇게 장사해서 이문이 남겠냐는 것이지요. 대신 우리 집은 주요리가 나오기 전에 나오는 튀김이나 무침 같은 게 없습니다. 주요리에만 충실하자는 게 제 원칙입니다. 그렇게 하면 가격거품을 뺄 수 있어요.”
해동된 붉은색의 참치 뱃살 초밥을 입 속에 넣어봤다. ‘살살 녹는다’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하다. 쫄깃하지도, 푸석하지도 않은 부드러운 지방층의 육질이 씹히는가 싶더니 곧바로 입안에서 녹아버리는 느낌이라고 할까. 밥 덩어리를 여유 있게 감싸고 있는 참치 뱃살이 입안을 가득 채워 포만감을 느끼게 한다.
몸 안 좋아 잠시 쉬다 개발한 김치찜으로 요리대회 대상
2007년 2월 문을 연 ‘은행골’은 구로동 작은 시장통 안에 있다. 주인과 몇 번을 통화한 후에야 겨우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복잡한 골목 안에 있다. 하지만 맛좋은 초밥을 먹으려면 찾기 힘든 고생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은행골은 언제나 북적인다. 저녁시간에는 30분 이상 기다리는 것쯤은 보통이라고 한다. 바쁜 저녁 시간대를 피해 손씨를 만났다.
-초밥집 이름으로 ‘은행골’은 어울리지 않는데요?
= 2005년부터 2년간 경기도 시흥에서 ‘은행골 김치찜’이란 이름으로 밥집을 했습니다. 그 집의 김치찜으로 2006년 농수산물유통공사에서 후원한 한 요리대회에서 대상을 탔어요. 20년 넘게 일식 요리사로 일했는데 손님들과 주거니 받거니 술 한 잔 나누다보니 몸이 안 좋아졌지요. 그래서 잠시 밥집을 한 건데. 그 때의 밥집 이름을 그대로 갖다 쓴 것입니다.
-다시 일식집을 열게 된 이유는 뭡니까?
= 20년 동안 절친하게 지낸 단골들이 있어요. 그 단골들이 구로디지털단지로 회사를 옮겨 오면서 내 초밥 맛을 보고 싶다고 성화였습니다. 손님과 일식집 주인 관계라기보다 ‘형, 동생’ 하는 사이였지요. 나는 사람을 한번 만나면 웬만해선 잊지 않습니다. 거기에다 내 음식을 자주 찾는 단골들에게는 그 집 대소사도 챙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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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골' 주인 손경원씨가 초밥을 만들기 위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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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살에 본격적으로 회칼을 잡으면서 홀로 터득
손경원씨는 24년 경력의 요리사다. 하지만 유명 일식집에서 일한 것도 아니고, 호텔이나 일본 식당에서 요리를 배우지도 않았다. 열여덟 살 때 일식집 아르바이트생으로 시작해, 스물네 살에 본격적으로 회칼을 잡으면서 홀로 터득한 요리 솜씨다.
광주가 고향인 그는 가난한 집안의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스물두 살이던 1980년대 후반에 서울에 올라와 요리사 보조 일을 하면서 그가 받은 월급은 11만원이었다. 그는 가난으로 입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는지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그가 긴 세월 동안 홀로 체득한 자신의 요리 철학은 좋은 재료와 정직한 맛이다. 그런 그의 음식철학이 20년 동안 단골지기들을 만들었고, 그 단골들은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한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
-참치는 해동 기술에 따라 그 맛의 차이가 크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맞아요. 요리사마다 자신만의 감으로 해동을 합니다. 바로 그게 각자의 실력이지요. 참치는 염수해동을 하는데 언제 염수에 넣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계절에 따라, 참치의 상태에 따라, 무게에 따라 다 다르지요. 염수해동이 끝나면 해동지에 싸서 숙성시킵니다. 우리들 말로는 ‘잠을 재운다’고 합니다. 세포들이 뒤틀어지지 않도록 해 참치 고유의 맛을 느끼도록 해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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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게장 소스에 절인 생새우 초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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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새우초밥’도 눈에 띄는 메뉴다. 생새우를 간장게장 소스에 하루 동안 절인 초밥인데, 고추냉이가 많이 들어간 느낌이지만 생새우의 신선한 맛과 간장게장의 달고 짠 듯한 맛이 잘 어우러져 있는 듯하다.
참치회는 1만6천~2만5천원, 초밥은 개당 900~1800원이다. (02)859-4988.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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