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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01 12:11 수정 : 2019.06.01 12:11

〔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⑮ 미래의 역사학

북한학계, ‘우리민족 제일주의’ 토대
“세계 4대문명보다 앞섰다”는
‘대동강문명론’ ‘평양성지론’ 주장
남한 한 교수도 ‘한강문명론’ 내놔

한민족 특별히 잘났다는 국수주의
특별히 못났다는 식민사학 판박이
이웃에 대한 차별과 증오 키울 뿐
진정한 강국은 다양한 집단 포용

역사학자가 외롭게 연구실에 틀어박혀 문헌과 씨름하던 시대도 지났다. 미래의 역사학자는 때로는 암석학자, 때로는 화학자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손을 잡고,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 나아가 유라시아 곳곳을 누비면서 종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깊은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지난해부터 투바공화국 아르잔에 있는 칭게테이 쿠르간을 공동 발굴하고 있는 한·러 조사팀. 오세윤 문화재전문 사진가 제공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던 필자가 한국사, 그중에서도 고대사를 평생의 업으로 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를 바로 옆에 두고도 그들에게 동화되지 않고 7천만명이 넘는 민족 구성원을 이룬 “한민족의 위대함”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흉노, 오환, 선비, 유연, 말갈, 거란 등 한때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던 수많은 종족이 결국은 중국에 흡수, 동화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지만, 한민족은 온갖 위기를 극복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으니 분명 경이로운 사건임에 틀림없다.

과거에 한국사 연구에서 민족주의는 지고지순의 선이었고,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의 항쟁의 역사가 대외관계사 연구의 기조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민족의 단혈성, 순수함’에 대한 의문은 기피되었다.

우리사회 관용 부족은 역사학에도 책임

이러한 인식은 남과 북이 마찬가지이다. 북한 학계는 한발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우리민족 제일주의’를 토대로 세계 4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우수한 ‘대동강 문명’이 평양 일대에서 발전하였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인류의 기원지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대동강 유역이라는 주장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평양에 위치한 고구려의 한 굴식돌방무덤이 단군릉으로 탈바꿈하였고, 고조선의 중심지는 시종일관 ‘민족의 성지’인 평양 일대에 있었다고 하는 평양성지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북한 학계가 내세우는 단군릉에 단군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은 단연코 0%이지만,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단군릉을 사실로 믿고 싶어 한다. 최근에는 한 원로 교수가 세계 4대 문명보다 더 우수하고 오래되었다는 한강문명론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민족 제일주의’에서 남과 북은 다를 바 없다.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다는 주장은 달리 말하자면 다른 민족은 우리 민족보다 열등하다는 논리이고,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인종주의의 표출이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과거의 역사가 강제로 심하게 왜곡되는 아픔을 겪은 우리 사회는 식민사학의 극복이란 커다란 과제를 안게 되었다. 해방 이후 많은 노력 끝에 식민사학의 폐해는 거의 극복되었고, 일제 관학자들에 의한 그릇된 주장도 점차 소멸되고 있다. 우리 민족이 태초부터 현재와 같은 모습, 즉 완성된 형태로 등장하였으며, 고대에 이미 톈산(천산)산맥과 바이칼 호수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대제국이었다는 주장의 저류에는 한민족이 특별히 우수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한민족이 특별히 못났다는 식민사학의 주장이나 특별히 잘났다는 국수주의적 주장은 일란성 쌍생아이다.

이런 무리를 범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 민족을 깔보는 일은 없다. 물론 미국에서 인종 차별을 당하는 일이 종종 보도되고, 지금도 일본의 시내 한복판에서는 극우세력들이 혐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집단은 소수에 불과하며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될 뿐이다. 오히려 더 좋은 일자리와 나은 삶을 찾아서 대한민국에 온 외국인들에 대한 우리의 차별이 더 심할지도 모른다. 민족의 순혈성을 강조하고 한국사의 전개를 순종 한민족이 주체가 된 민족사로 단순화하는 한 우리 옆의 외국인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편협함은 교정되기 어렵다.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 연구와 교육이 ‘위대한 한민족’의 이미지를 주입하고, 주변 이웃들에 대한 증오심을 심어주는 데에 일조한 것은 아닌지 뼈아픈 반성을 할 때이다. 낭만적 민족주의 정서를 기초로 역사 공부를 시작했던 필자도 이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한민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대국이 되기를 희망한다면 이웃의 다양한 집단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뒤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세울 것을 허락하고 지원하였으며, 종교와 언어의 차이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다는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인 키루스 칙령을 발표하였다. 몽골화된 투르크인이었던 티무르의 후손인 악바르는 본인 스스로는 신실한 무슬림이었으나 힌두스탄에 진입하면서 힌두교도인 현지 여성과 혼인하였다. 키루스와 악바르의 공통점은 인종과 종교,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보고 관용을 베풀었다는 점이다. 광대한 영토와 다양한 인간집단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성을 강조하는 통합의 마인드가 필요하다. 정말로 강해지고 싶다면 남을 인정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몽골의 칭기즈칸 역시 이민족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고 있었다. 편 가르기는 쇠락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어머니의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짧은 인생을 마감한 어느 중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관용이 사라져가는 우리 사회에 좌절하였다. 과연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데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피부색, 종교, 출신 지역의 차이로 우리와 남을 구분하고 차별하려는 편협함으로는 21세기 대한민국을 경영할 수 없다.

경남 사천의 늑도에서 나온 낙랑계 토기들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과 동북아시아, 일본, 동남아시아가 서로 교류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권오영 교수 제공

백제 무덤 등 한반도의 고대 유적지에서 나온 유리구슬들은 베트남 옥애오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성분이 같다. 고대부터 동남아시아와도 교류했다는 증거의 하나다. 사진은 옥애오에서 출토된 골호(뼈단지)의 모습. 대한문화재연구원 제공
땅에서 나온 자료가 말하는 역사

우리 역사는 동북아시아에 섬처럼 고립된 역사가 아니다. 우리의 이웃은 중국과 일본만이 아니었고 북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등 유라시아에 넓게 퍼져 있었다. 교섭의 형태는 때로는 격렬한 항쟁, 때로는 평화로운 교류의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교섭의 대상인 상대방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특히 우리와 유사한 조건에서 국가를 형성하고 발전시킨 지역에 대한 비교연구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남월과 베트남에 대한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 지난 1월에 한국 조사팀이 베트남 하노이 인근 루이라우(Luy Lau) 유적과 안장성의 옥애오(옥에오·Oc Eo) 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팀 모두 중요한 성과를 올렸고, 이번 겨울에는 옥애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한국으로 가져와서 전시하기 위한 야심찬 계획이 추진 중이다. 백제의 교역 상대였던 푸난(扶南)의 중요 항구이자 생산기지였던 옥애오 유물들이 국내에서 전시되면 양국 간의 비교연구는 물론이고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동남아시아와 고대 한국의 원거리 교역의 실상이 조금이나마 밝혀질 것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여름은 중앙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조사할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다. 이번 여름에도 우리 조사팀은 러시아 투바공화국의 칭게테이 쿠르간 조사에 착수한다. 작년보다 더 보강된 인력과 연장된 기간을 이용하여 러시아, 폴란드의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스키타이 연구에 뛰어들게 된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코카서스(캅카스)산맥의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고대 왕국 코카시안 알바니아의 왕성 살비르 유적에 대한 한-아제르바이잔 공동 발굴조사가 11년째 계속된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도 소그드 왕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유산협회의 주도로 개시된다. 바야흐로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서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이 현지 학자들과 호흡을 맞추며 활약하는 시즌이 온 것이다.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문헌과 씨름하는 데만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접 학문과의 융합을 무기로 이웃나라 역사에 대한 비교 연구도 필수적이다. 사진은 신라의 왕릉과 닮은 카자흐스탄의 오르닉 쿠르간(거대한 흙이나 돌로 된 무덤) 모습. 대한문화재연구원 제공

동서교류의 주역이었던 소그드인들이 세웠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아브 유적지에 선 필자. 권오영 교수 제공
2016년 이후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지는 발굴조사의 건수는 매년 1600건이 넘는다. 몇 년 전에는 1800건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으니 그때에 비하면 줄었지만 여전히 엄청나게 많은 수이다. 이 과정에서 출토되는 매장문화재의 종류와 수량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한국 고대사 연구를 이끌고 있는 하나의 축이 고고학적 발견이란 사실을 부인할 연구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특히 문헌자료가 부족하거나 그 사료적 가치에 의심을 받고 있는 고대 초기의 역사 연구는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만약 경주 조양동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신라 초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 수준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김해 대성동 유적을 제외하고는 금관가야의 성장과 대외 교섭의 양상을 말할 재간이 없다. 황국사관에 의해 조작된 임나일본부설, 남선경영론(한반도 남부 경영론)을 격파한 것은 저명한 노학자가 아니라 발굴 현장에서 땀 흘린 젊은 고고학도들이다. 2015년에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힘도, 가야 고분군이 짧은 준비 기간에도 불구하고 등재가 유력해진 배경도 젊은 연구자들이 한여름 더위와 싸우면서 이룬 성과 덕분이다. 고고학과 역사학을 구분하는 담장의 높이는 점차 낮아지고 있다. 고대 사회를 규명하는 데에 문헌과 물질자료는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니라 반드시 함께 구사되어야 한다.

역사학, 문헌만 파던 시대 지나
여러 나라 발굴 조사 병행하고
과학·공학 전문가와도 협업해야

땅에서 나온 자료는 역사 해석을 풍부하게 해준다.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나온 백제시대 여성용 변기. 권오영 교수 제공

경주 동궁 주변에서 발굴된 수세식 화장실 유적은 신라시대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의 모습을 보여준다. 권오영 교수 제공
고대사 연구에서 융복합은 필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과학과 공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역사학 연구의 방법론이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사료의 문구 해석에서 맴돈다면 시대착오적이다. 6세기 초에 두 번 있었던 일본 군마현 하루나산의 폭발은 한 가족의 비극적인 최후를 소름 끼칠 정도로 세세하게 보여주어 일본의 폼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익산의 한 무덤에서 작게 부서진 상태로 발견된 뼛조각들은 역사학만이 아니라 고고학, 법의학, 유전학, 생화학, 물리학, 임산공학 등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협동 연구 결과 백제 30대 무왕의 유체로 밝혀졌다.

고고학적 발견이 거의 없고, 역사학 연구에서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100년 전의 고대사 연구는 발음의 유사함이 중요 방법론 중 하나였다. 지금도 이러한 방법론을 구사하면서 사서에 나오는 지명의 위치를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있다. 심지어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 있었다는 주장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의 밑바닥에는 한반도에서 전개된 역사는 부끄러운 역사, 대륙에서 전개된 역사는 자랑스러운 역사라는 도치된 역사인식이 도사리고 있다. 식민사학의 한 주장인 반도성론의 부활인 셈이다. 위대한 역사를 부르짖는 내면에는 어쩌면 처절한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대사 연구의 목표와 주제, 방법론 모두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웃을 차별하는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하던 역사학의 시대는 끝내야 한다. 역사학자가 외롭게 연구실에 틀어박혀 문헌과 씨름하던 시대도 지났다. 미래의 역사학자는 때로는 암석학자, 때로는 화학자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손잡고,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 나아가 유라시아 곳곳을 누비면서 종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깊은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젊은 역사학도들이 개척할 미래의 역사학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과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직접 유적을 발굴하는 고대사 학자로, 역사학과 고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자연과학과 공학적 연구를 역사 탐구에 활용하는 학제 간 융복합 연구에 관심이 많다. 최근 연구 성과를 토대로 고대 한반도가 주변국들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돼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고대사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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