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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18 09:28 수정 : 2019.05.18 10:31

〔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⑭소그드와 투르크의 땅
유라시아 교류의 중심지였던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 지역
고대 소그드와 투르크족 무대
고구려 사절도 사마르칸트 방문
백제에 불교 전래 승려와도 관련

세계적 중앙아 학자 가토 규조는
칠곡 출신의 재일조선인 ‘이구조’
서적과 유물 등 경북대에 기증
동북아 너머로 ‘역사 시야’ 넓혀야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는 고대부터 유라시아를 잇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이란 계통의 소그드인들이 번성하던 7세기 때의 아프라시아브 궁전 유적지에 남아 있는 벽화에는 각국에서 온 사절단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절단 가운데는 조우관을 쓰고 환두대도를 찬 고구려 사신 2명도 있다.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 우즈베키스탄 특별전의 전시물. 권오영 교수 제공
660년대 어느 날, 막중한 임무를 띠고 고구려 사절단이 평양을 떠나 초원길과 오아시스 길을 거쳐 현재의 사마르칸트에 도착하였다. 오랜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통일왕조를 이룬 당나라가 일대일로의 국가 전략을 기초로 사방으로 팽창하면서 주변 국가들에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오던 시기였다. 이미 당과 여러차례 군사적 충돌을 겪은 고구려는 당의 서편에 있는 세력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 군사 외교적으로 긴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는 이란계 종족인 소그드인들이 거주하던 여러 오아시스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부하라와 타슈켄트, 그리고 현재 타지키스탄 영토인 펜지켄트(판자켄트)에도 소그드인들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입에 꿀을 넣어주고, 손에는 아교를 발랐다고 한다. 꿀처럼 달콤한 말로 장사를 해서 번 돈이 손에 들어오면 절대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원거리 국제 상인을 키우는 조기교육이었던 셈이다. 자연스럽게 이들은 장사를 잘하여서 매우 작은 이익에도 다투었고, 남자 나이 20살이 되면 장사를 위해 멀리 가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였다. 유라시아의 동과 서를 잇는 원거리 국제교역의 주역이라 할 만하다.

조우관 쓴 고구려 사신

7세기 후반, 소그드족은 초원을 지배하며 동과 서를 잇던 서돌궐의 군사적 지배를 받으면서 일정한 세금만 내면 안전을 보장받고 장사할 수 있었고, 서돌궐의 입장에서는 교역의 이득을 정기적으로 상납받으니 서로가 좋은 공생관계였다. 이런 국제관계를 이용하기 위하여 유라시아 각지에서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외교 사절단의 모습이 아프라시아브라는 언덕에 남아 있는 궁전 벽화에 그려져 있다. 그중 주목되는 장면은 머리에 조우관을 쓰고, 허리에 환두대도를 패용한 2명의 고구려 남성이다. 이 벽화가 실제로 이곳을 찾은 사절단을 보고서 묘사한 것인지, 아니면 머릿속의 이미지를 그린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이론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서돌궐, 소그드와 교류하였음은 분명하다. 중앙아시아 미술사의 대가인 권영필 교수는 당의 군사적 압박에 대비하여 연개소문이 파견한 사절로 이해하고 있다. 지난달,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하면서 이 벽화를 찾은 것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동서 교류에 핵심적인 구실을 했던 소그드인들이 세운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아브 궁전 유적. 권오영 교수 제공
장사하러 당에 온 소그드 상인들의 모습. 권오영 교수 제공
국제관계를 전공하는 박상남 한신대 교수는 오래전 필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대한민국이 국제 외교무대에서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를 지지해주는 나라가 최소 3개국은 있어야 합니다. 그 나라가 어딘지 아십니까?” 정답은 아세안 국가들, 그리고 “스탄”으로 끝나는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이었다. 최근 우리 정부가 신남방정책과 신북방정책을 표방하면서 남으로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캄보디아를, 북으로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을 대통령이 방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고구려도 이런 이치를 알고 우즈베키스탄의 소그드인에게 사절단을 파견한 것이니 외교 전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스탄(stan)은 땅, 지방을 의미하는 인도유럽어계 언어이다.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베크족의, 카자흐스탄은 카자흐족의 땅인 셈이다. 중앙아시아의 많은 스탄 나라 가운데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은 예외적으로 이란계 주민이 다수지만 나머지는 대개 투르크계다. 여기에 역시 투르크계인 서쪽의 아제르바이잔과 터키, 그리고 동쪽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위구르족을 더하면 유라시아의 동과 서를 잇는 투르크 벨트가 완성된다. 이슬람과 투르크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여러 나라가 석유와 가스가 지나가는 유라시아 물류의 목줄, 실크로드를 장악한 셈이니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2014년에 중국이 오랜 노력 끝에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과 공동으로 33개에 이르는 유산을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배경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 전략에서 ‘일대’의 핵심은 투르크 벨트를 통한 유라시아 중부의 주도권 장악이다.

한때 소그드의 활동 무대였던 우즈베키스탄은 나중에는 투르크, 몽골의 지배를 거치게 된다. 14세기 후반부터 이 땅에는 티무르제국이라는 강대한 제국이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흥기하였다. 티무르란 인물은 투르크계이면서 몽골 칭기즈칸의 명예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주변에 대한 군사적 정벌을 거듭하여 마침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동방의 명나라를 정벌하다가 병사하였는데, 만약 티무르의 명 원정이 본격화했으면 동북아시아 역사는 크게 요동쳤을 것이다. 티무르제국은 군사력만이 아니라 과학과 문학, 건축도 매우 발달한 나라였다. 왕들은 새로운 정복지에서 예술인과 과학자들을 사마르칸트로 데려와서 제국의 수도를 설계하였다. 왕비와 젊은 페르시아 출신 건축가의 비극으로 끝난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는 비비하눔 모스크, 티무르가 묻혀 있는 구르 아미르 영묘, 티무르의 손자이자 뛰어난 학자였던 울루그베그가 남긴 천문대 등 위대한 건축물이 매우 많다. 이런 까닭에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에게 티무르제국은 과거의 영광이다.

타슈켄트에 있는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의 삼존불. 테르메스의 파야즈테파에서 발견된 것으로 쿠샨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권오영 교수 제공
티베트 지역의 서쪽에 있는 사마르칸트와 테르메스 등은 고대 소그드인들이 만든 도시다.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김호동 지음)
우리의 한국사 연구와 교육이 동북아시아를 벗어나지 않는 좁은 시각에서 반복되면서 나타난 심각한 현상은 중국의 서쪽에서 전개된 역사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고려시대를 이해하는 데에 탕구트(서하)가 필요하고, 조선시대 연구를 위해 명의 서편에 있으면서 라이벌 관계였던 티무르제국에도 관심을 기울일 때다. 동북아시아를 벗어난 유라시아적 시각이 고대사만이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 적용되어야 함을 절감하게 된다.

우즈베크의 ‘센세이’ 이구조 박사

투르크와 소그드가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주인공이 되기 전으로 돌아가보자. 기원전 4세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는 동방원정을 추진하여 지금의 아무다리야강을 넘게 된다. 아무다리야강은 그리스어로 옥수스강으로 불리었고, 그 동편은 옥수스강 너머란 의미로 ‘트란스옥시아나’라고 불리게 된다. 아무다리야강과 함께 나란히 북으로 흘러 아랄해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강이 시르다리야강이다.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의 중간지대를 수르한다리야라고 부르는데 그 남부와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그리스계 박트리아 왕조가 발전하였고, 후에는 쿠샨 왕조가 차지하였다. 박트리아를 거쳐 쿠샨 왕조에 접어들면서 불교사원이 많이 만들어지고 불상의 제작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도시인 테르메스 지역은 불교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수많은 불교사원, 그리고 쿠샨 왕조 북부의 중심 도시인 달바르진테파 등이 조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인 연구자들의 활약이 현저하였다.

카라테파 유적지를 발굴 중인 재일조선인 고 이구조 박사. 박천수 경북대 교수 제공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가토 규조(加藤九祚)다. 가토는 우즈베키스탄 현지에서 장기간 활동하면서 중앙아시아 문화와 역사 연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현지인들은 그를 센세이(일본어의 선생님)라고 불러 존경하며, 테르메스에는 ‘가토의 집’이라는 일본 조사단의 베이스캠프가 있어서 장기 조사에 사용된다. 우즈베키스탄과 일본에서 여러차례 훈장을 받으며 양국 우호관계의 상징이 된 인물이다. 그러던 그가 2014년 5월, 경북대 박물관에서 한 강연에서 자신의 성은 가토가 아니라 이씨, 이름은 규조가 아니라 구조라고 ‘커밍아웃’하였다. 그는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1922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이구조는 10살 때, 시모노세키에 있는 형을 찾아 일본으로 갔다. 일과 공부를 겸하는 고된 일상에도 남달리 총명하던 그는 기어이 도쿄의 조치대에 진학하였으나 곧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두만강 변의 돈화에서 소련군의 포로로 잡힌 그는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오가며 5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동료의 살점을 고기로 먹는 포로가 나올 정도의 끔찍한 생활 속에서도 살아남은 그는 일본 귀환 뒤 대형 출판사에 취업하였다. 포로 시절에 익힌 러시아어 실력을 바탕으로 세계백과사전 등 출판업에 종사하면서 유라시아의 역사를 독학한 그는 마침내 52살의 늦은 나이에 조치대 교수가 되었다. 본격적인 중앙아시아 조사는 67살이 된 1989년도에 시작하여 우즈베키스탄의 카라테파, 달바르진테파 등 중요 유적 조사에 장기간 종사하였다.

국내 학자들은 유라시아에서 활동하는 학자로서 가토 규조를 알았을 뿐인데, 그는 실은 한국인 이구조였던 것이다.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힌 지 2년 뒤인 2016년 테르메스의 카라테파에서 발굴조사를 주도하던 이구조는 급성폐렴으로 현지에서 숨졌다. 그가 평생을 바쳐 모은 귀중한 책과 유물, 사진은 모두 경북대에 기증되었다. 식민지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인의 삶을 살던 그가 말년에 다시 한국인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박천수 경북대 교수에게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었다.

재개되는 우즈베키스탄 유적조사

노년의 이구조가 열성적으로 조사하던 테르메스의 불교사원을 조사할 기회가 대한민국에도 찾아왔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11년도부터 쿠샨 왕조 시기의 카라테파 발굴조사에 착수한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프로젝트는 오래가지 못하고 종료되어버렸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필자가 꼽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권, 언론, 그리고 학계의 무관심과 오해다. ‘왜 대한민국의 국가기관이 외국에서 우리 역사와 무관(?)한 유적을 조사하는 데에 국고를 낭비하는가’ 하는 일각의 오해는 치명적이었다.

우즈베키스탄 테르메스박물관에 복원 전시돼 있는 쿠샨 시대의 보살상. 권오영 교수 제공

아무다리야강 하류의 히바 지역에 있는 쿠샨 왕조의 요새, 아야즈칼라의 모습. 권오영 교수 제공
과연 쿠샨 왕조의 불교유적이 우리와 무관한가? 삼국에 불교를 전래한 초기 승려들은 중국인이 아니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불교 승려들은 대개 소그드, 박트리아, 페르시아 출신이었다. 백제에 불교를 전래해준 마라난타는 그 이름을 볼 때 중앙아시아, 좁히자면 테르메스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에 불교를 전해준 묵호자는 말 그대로 검은 피부의 외국인, 즉 중인도나 남인도 출신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초기 전래기의 불교문화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불교문화와 비교할 것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비교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대한민국이 테르메스의 사원유적을 발굴조사한 것은 다시 얻기 어려운 기회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문화재청이 우즈베키스탄 유적 조사와 보존에 다시 나서기로 한 점이다. 이번에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 멀지만 가까운 우리의 이웃들, 쿠샨과 박트리아, 소그드와 투르크의 역사가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즐거운 미래를 그려본다.

▶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직접 유적을 발굴하는 고대사 학자로, 역사학과 고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자연과학과 공학적 연구를 역사 탐구에 활용하는 학제 간 융복합 연구에 관심이 많다. 최근 연구 성과를 토대로 고대 한반도가 주변국들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돼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고대사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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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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