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31 18:40
수정 : 2019.04.01 00:14
【짬】 송담 이백순 제자 모임 ‘진수회’ 박경래 회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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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광주향교 유림회관에서 열린 송담 유고 문집 발간 기념식에서 이동건 영남 퇴계학연구원 이사장과 녹양 박경래 진수회 회장, 성백효 한국고전번역원 명예교수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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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만자의 글을 문집으로 묶는 데 무려 7년이 걸렸다. 저술 영역은 한문 문체의 하나인 부(賦)와 시를 비롯해 서와 잡저 등 22종에 걸쳐 2287편에 걸쳐 있다. 조선시대 문집의 일반적 기준을 따라 시-서-잡저-서-기-발-묘도문 순으로 묶었다. 초고를 입력한 뒤 4차례에 걸쳐 연인원 53명의 제자가 교정을 봤다. 그리고 성백효·오지영·김홍영 등 제자들이 2년 동안 꼼꼼하게 감수했다. ‘마지막 선비’로 불렸던 송담 이백순(1937~2012) 선생의 문집이 35권 12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제자들의 모임인 진수회 회장인 박경래씨는 “<송담선생 문집>은 한국 근대 유학사 100여 년을 통틀어 가장 방대한 분량”이라고 말했다.
송담 선생은 한학뿐 아니라 문학과 역사, 철학에 밝았던 유학자였다. 진수회는 지난 23일 광주향교 유림회관에서 송담 유고 출판기념식 및 강연회를 열었다. 송담 선생은 생전 서울,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지에 10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전국에서 온 유림과 한학자, 연구자 200여 명은 이날 고인의 방대한 저술이 문집으로 나온 것을 축하했다. 홍기은 ‘송담 선생 문집 간행위원장’은 “보통 스승의 사후 3년여 만에 저술을 모두 모다 문집을 내는 게 보통이지만 송담 선생님의 저술 양이 워낙 방대해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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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송담 이백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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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행사엔 옛 한복을 차려입은 유림들이 눈에 띄었다. ‘지리산 청학동 선비’로 유명한 갱정유도회 회원 5명은 상투를 튼 머리에 망건을 갖춰 썼다. 이들은 전남 보성 복내면 덕산정사에서 글을 배우다가 1989년 광주 학운동으로 이사한 스승을 따라와 문간방에 거주하며 글을 배웠다. 선생은 전국에서 찾아온 제자들이 ‘선비책상’에 펴놓은 책을 ‘거꾸로’ 보면서 한 자 한 자 딱딱 짚어 번역하며 의미를 가르쳤다.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이들을 거느리고 무등산 계곡 길을 산책하고 돌아왔는데 가고 오는 도중에 수많은 문답이 오고갔고, 이 근처의 주민들은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송담 회고록>중) 한복을 입은 스승과 한복차림에 망건까지 쓴 제자들이 담소를 나누며 걷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엔 낯설었을 법하다.
송담 선생은 1930년 전남 보성군 복내면 시천리에서 태어났다. 17살 때까지 유학자였던 조부 낙천 이교천 선생한테 글을 배운 뒤, 21살 때까지 효당 김문옥(전남 화순), 현곡 유영선(전북 고창), 양재 권순명(전북 정읍) 등 전국의 명유들을 찾아다니며 한학을 배웠다. 1993년 중국 주자학술대회에서 1357자의 글을 발표한 선생은 그 자리에서 붓을 잡고 쓴 시와 글로 중국 학자들을 감탄하게 해 국제적인 문명을 얻었다. 평생 한복차림으로 살았던 송담 선생은 다른 한학자들과 달리 3권의 한글 시집을 남기기도 했다. 송담 선생은 생전 “문자는 의사 표현의 도구니 사용된 도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한글은 귀중한 우리나라의 국문이니 이 글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애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승 사후 7년 만에 전집 펴내
72만자 시·서 35권 12책으로
송담 천여명 후학 양성 ‘호남 거유’
성백효 교수 등 전국 각지 제자들
지난 23일 광주 출간기념회 참석
“송담 정신 배워 한문학 계승해야”
고인의 사후 문집 출판기념식엔 학맥이 다른 영남의 유림들과 연구자들도 참석했다. 주리론 전통의 영남학파 종조로 숭앙받는 퇴계 이황(1501~1570년) 선생의 사상을 연구하는 영남 퇴계학연구원 회원들은 “송담 선생님의 학문 분야가 어마어마하게 넓은 것에 놀랐다”고 밝혔다. 이동건 영남 퇴계학연구원 이사장은 “학문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치기는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송담 선생에게 직접 배우지 않았지만 ‘사숙’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학문의 부피나 문집의 규모보다 자기절제와 겸손을 통해 평생 선비정신을 실천하신 분이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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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청학동 선비’로 유명한 갱정유도회 회원이자 한학자 5명이 지난달 23일 송담 이백순 선생 문집 발간 기념식에서 상투를 튼 머리에 망건을 갖춰 쓰고 앉아 있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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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자 녹양 박경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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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백효 한국고전번역원 명예교수도 이날 강연을 통해 “송담 선생님은 토·일요일에 배우러 갈 때마다 쉬는 날 없이 제자를 가르치거나 번역하시거나 글을 지으셨다”고 회고했다. 성 교수는 이미 국내에서 한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60대 후반부터 1년에 몇 차례씩 광주로 송담 선생을 찾아와 하루종일 묻고 배웠다. “송담 선생님은 그냥 한학자가 아니에요. 그냥 한학자들은 당색에 찌들어 있어요. 자기 아집에 박혀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성리설에 있어서도 지방색, 학맥, 당색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한문학의 계승을 위해선 송담 선생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스로 논어 한줄이라도 읽은 뒤 손자가 영어 배우러 가기 전에 천자문 한자라도 가르쳐야 해요.”
송담 선생은 세상을 뜨기 두 달 여전인 2011년 12월 무덤 앞에 세워질 묘비에 들어갈 글을 직접 썼다. 김은수 광주대 명예교수는 “선생님은 자신의 묘비명에 자랑과 칭송이 넘치는 것도 경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묘비에 시처럼 쓴 마지막 32자짜리 명(銘)에 그의 한 생애가 압축돼 있다. “외모는 누추하고 기운 시원찮으니 받은 천품이 엷어서네. 집은 가난하고 세상은 어지러워 학문은 박문과 약례에 모자랐네. 감히 정론을 지니고 이단의 사설을 논박했네. 죽어서는 편안할 것이니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네.” 김 교수는 “송담 선생님의 문집 발간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세상의 조그만 빛이라도 되라’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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