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용욱의 편지로 읽는 현대사
②지도자의 환국과 민초의 귀환
해방 조국은 미·소 점령지로 전락
독립투사들 귀국도 맘대로 못해
‘개인 자격’ 서약 받은 뒤에야
미군, 임정에 귀국 항공편 제공
일본에서 귀환하려는 동포들은
‘지참금 제한’ 미군 조치로 고통
“귀국 일본인은 인출 한도 없는데
조선인만 왜 1천엔으로 제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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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독립운동을 했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해방 이후 미군에 의해 개인 자격으로만 입국이 허용됐다. 1945년 11월5일 충칭에서 상하이에 도착한 임정의 김구 주석이 환영 꽃다발을 건 채 태극기를 들고 있다. 김구는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사령관 웨더마이어에게 ‘개인 자격 입국을 확인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쓴 뒤에야 귀국 항공편을 제공받았다. 국사편찬위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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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1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가 귀국하기 직전에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웨더마이어 중장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나와 최근까지 충칭에 주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이 항공편으로 입국하는 것과 관련하여 나와 동료들이 공인 자격이 아니라 엄격하게 개인 자격으로 입국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바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입국하여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행정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로서 기능하지 않을 것을 선언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미군정이 한국인들을 위해 질서를 수립하는 데 협조하는 것입니다.”
편지 작성 경위를 살펴보면 이 편지는 백범이 쓰고 싶어서 쓴 편지가 아니다. 미군이 서약서를 요청했고, 백범은 임정 주석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서한을 제출하고 나서야 중국 주둔 미군으로부터 귀국 항공편을 제공받았다. 자기 조국이 해방되었다고 해도 제 맘대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이 ‘점령’이다. 그런 점에서 이 편지만큼 점령의 무게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그가 망명정부 주석이든 필부필부든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점령군 당국의 입국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 “김구는 스튜 간을 맞추는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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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스튜의 간을 맞추는 소금에 불과하다.” 주한 미군 사령관인 하지는 1945년 11월2일 참모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군의 사관들이 보고 들은 내용을 남긴 ‘사관기장’(史官記帳, Historical Journal)의 일부. 정용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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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 1941년 12월 미국의 대일 개전(開戰) 이후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하기 위해 대미·대중 교섭을 한층 강화했고, 두 나라를 비롯해 연합국 정부로부터 임정의 정부 자격을 승인받는 데 외교력을 집중했다. 또 임정 지휘하의 광복군은 중국 전구(戰區)와 인도·버마 전구에서 활동하던 미군 전략국(OSS)과 제휴하여 그들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광복군과 미군의 합동 작전을 위한 공동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정은 연합국들로부터 끝내 정부 자격을 승인받을 수 없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찌감치 한반도 신탁통치라는 나름의 확고한 전후 대한정책을 수립한 뒤 그 실현방안을 모색했고, 종전 뒤에도 그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을 점령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김구가 귀국한 뒤 자신의 구상에 따라 ‘스튜의 간을 맞추는 소금’(하지가 1945년 11월2일 참모회의에서 한 말)의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지 임정을 망명정부로 대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임정 요인들에게 입국 서약서를 받아낸 뒤 귀국을 허용했다.
임정이 일본 항복 소식을 미군 쪽으로부터 전달받은 것은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기 닷새 전인 8월10일이었다. 김구는 그때 광복군과 미군 전략국이 공동훈련을 벌이던 시안(서안)을 방문 중이었다. 김구가 일본 항복 소식을 접했을 때 기뻐하기보다 장탄식을 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교전국으로 승인받지 못했을 때 연합국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한국이 아무런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전후 한반도의 운명에 드리울 암운을 일찍부터 우려했다. 김구는 이미 태평양전쟁 발발 무렵 미국 조야에서 열강에 의한 한반도 공동관리안이 솔솔 새어나오던 시점부터 해방된 그날 독립을 얻지 못하면 ‘독립을 위한 역사적 전쟁’을 계속하리라는 각오를 내비쳤다. 위 서한은 그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점령의 무게를 고스란히 드러냄은 물론 한반도가 종전 이후 열강 사이의 복잡한 전후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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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귀환하는 동포들은 미군의 지참금 제한 조처로 그나마 모았던 재산도 대부분 두고 와야 했다. 1945년 10월2일 일본에서 부산으로 귀국하는 동포들의 모습. 일부는 맨발이다. 국사편찬위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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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원수님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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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주석이 1945년 11월19일 웨더마이어 사령관에게 ‘개인 자격 입국을 확인한다’는 내용으로 보낸 편지. 정용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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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패망 직후 국외로 망명했던 혁명가들이 한반도 내외 정세를 관망하며 조기 환국을 위해 애썼다면 보통의 한국인들은 일상의 혼란 속에서 삶을 재건하기 위해 고투를 벌여야 했다. 해방의 그날, 민족 반역자와 친일 부역자들을 제외한다면 한국인들은 그가 지구상 어디에 있건 해방의 감격으로 몸을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방의 감격과 함께 그들을 찾아온 것은 구체제의 몰락과 해체에 따른 사회경제적 혼란과 개인적 신상의 변화였다. 그중에서도 일본, 만주 등 국외로 이주했거나 강제로 동원되었던 한국인들은 조국으로의 귀환을 서둘렀다. 그들에게 해방은 제일 먼저 삶의 공간적 재배치로 찾아왔다. ‘귀환’은 국외의 한국인들이 일본제국주의 구체제의 식민지배 청산과 승전 연합국의 전후처리와 처음으로 대면하는 과정이었다.
일본 도쿄에 살던 변무련이라는 이름의 조선인 어린이가 1945년 12월 (일본 점령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일본어로 쓴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양면 괘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쓴 이 편지는 ‘원수님께 부탁합니다’로 시작한다. ‘하루라도 빨리 조선에 돌아가고 싶고, 또 돌아갈 때 돈과 가진 것을 모두 가지고 갈 수 있게 해줄 것’을 두번 세번 부탁하는 내용이다. 초등학교 1, 2학년 정도의 어투와 필체에다 철자와 단어도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부모를 대신하여 쓴 것으로 보이는 이 편지 내용을 식구들 가운데 그나마 일본어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이 어린이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그만큼 귀국 시 점령당국이 금전과 동산을 얼마만큼이나 소지하게 해줄 것인가는 이 가족에게 절박한 문제였다.
일본 거주 귀환 동포들의 간절한 사정은 가와사키시에 거주하던 이창규가 역시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1946년 5월17일자 투서에도 잘 나와 있다.
“귀국할 때 1인당 1천엔 이상은 갖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으나, 조선의 물가고에 비추어 이 돈으로는 귀국하여 집도 구입하지 못하고, 직장을 구할 때까지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음에 따라 처자는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해외에서 귀환하는 일본인은 기십만엔의 예금통장으로 언제든지 돈을 인출하여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귀하가 똑같이 관리하고 있는 나라의 민족인 우리 조선 민족도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귀국 후 예금에서 돈을 인출할 수 있게 하여주심을 원합니다.” 이창규의 편지는 조선인의 경우 귀국 시 지참금을 제한하지 말고, 고국에 돌아가서도 자신이 일본에서 저축했던 예금을 인출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청한 외에 38도선을 폐지하여 남과 북이 동일민족의 국가로 건설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청원하고 있다.
그의 청원이나 변무련 어린이의 편지에 나타나듯이 일본 거주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해방은 일제의 식민지배가 훼손한 삶을 복원하고, 하루빨리 고국에 돌아가서 자신과 가족을 위해 새로이 생활 기반을 마련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향후 사태의 진행을 보면 그들에게 일제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의 보상이나 고국으로의 귀환, 귀환 후 정착 그 어느 것도 순조롭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관계자나 관련 당국의 소홀한 준비나 시행상 착오에서 빚어진 일이 아니었고,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해방, 그리고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이 가져온 정세의 다층성과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의 중층성 등 구조적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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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조선으로 돌아갈 때 모든 재산을 갖고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맥아더 사령관에게 호소하는 도쿄에 살던 초등학생 변무련의 편지. 미군은 일본에서 귀환하려는 우리 동포들에게 ‘1인당 1천엔까지만 지참할 수 있다’는 지침을 내렸다. 오른쪽은 가와사키에 사는 이창규가 이와 관련해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 정용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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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2진이 마주친 동포들의 참상
조소앙, 김성숙, 신익희, 장건상 등 임정 2진이 1945년 12월1일 역시 미군 수송기 편으로 귀국했다. 그 비행기는 쏟아지는 눈으로 서울의 관문인 여의도 또는 김포 비행장에 착륙할 수 없었고,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을 찾아 남진하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옥구 비행장에 착륙했다. 그날로 상경을 시도했으나 방한도 되지 않는 미군 트럭을 타고 엄동설한에 마구 흔들리며 시골길을 달리는 것은 노혁명가들이 감내할 수 없는 고역이었다. 그들이 차를 멈추게 한 뒤 내려서 동동거리며 얼어서 얼얼한 손발과 뺨을 녹이고, 눈썹과 머리에 뽀얗게 앉은 흙먼지를 털고 있는데 옆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 가운데 집으로 돌아가던 학동들도 있었는데 한결같이 맨발에다 새빨간 발목이 새다리처럼 얼어 있었다. 일행 중 한 분이 왜 신발을 벗었는지 묻자 아이는 대답이 없었고, 모인 사람들이 오히려 그 질문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을 사람 중 하나가 거들었다. “요즈음 신 신고 학교 다니는 아이가 어디 있어요. 신 사 신고 다닐 수가 있어야죠. 사 신을 신발도 없구요.” 일행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도로 트럭에 올랐다.
노혁명가들은 일제의 중국 침략 이후 임정 간판을 짊어진 채 각지를 떠돌며 갖은 고생을 다 했지만 그래도 겨울이 되면 임정의 안주인들이 그분들에게 솜 누빈 두루마기를 지어 입히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몇십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그런 참상을 접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드레 전에 먼저 귀국한 임정 1진 인사들을 김포 비행장에서 맞이한 것은 미군 병사들과 장갑차들이었다. 1진 인사들은 환영 인파가 나오지 않은 것을 의아해하며 실망을 감추지 않았지만 2진 인사들이 귀국하여 마주친 조국의 상황은 더 기가 막혔다. 그 차이가 경향(京鄕)의 공간적 구분이 가져온 것이거나 미군 당국의 배려가 미흡해서 초래된 것이라면 오히려 다행이겠으나, 그것은 경성 한복판에서 불과 수십리만 벗어나면 어디서나 마주치는 현실이었다. 임정은 1941년 11월 건국 강령을 발표하여 일제 패망 이후 건국의 방향을 제시했고, 귀국하기 두어달 전인 1945년 9월에는 14개 당면정책을 발표했다. 전자는 보통선거를 통한 정권 수립, 지방자치제의 전면 실시, 토지개혁, 민족 반역자와 일제의 재산 몰수, 대생산기관·공공사업·광산 등의 국유화, 무상교육과 의무교육의 실시 등을 제시했다. 후자는 ‘우방 민족과의 제휴’와 ‘국내 각 계층, 제 정파와의 협력에 의한 과도정권 수립’과 함께 ‘교포의 안전 및 귀국과 국내외에 거주하는 동포의 구제를 신속 처리할 것’, ‘적산을 몰수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賣國敵)을 공개적으로 엄중 처벌할 것’ 등을 천명했다.
두 개의 성명은 식민지 상태로부터 갓 해방된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보편적 요구이자 최소 강령에 해당했으나 그것이 지향하는 가치를 당시 한국 상황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었다. 귀환 동포가 되었든 촌부가 되었든 민초들이 일제의 오랜 식민지배로 인해 허물어진 일상을 복원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고투를 벌였다면 지도자들은 임정 요인들의 귀국에서 보듯이 출발에서부터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의 전후질서 수립방안과 마주했다. 환국 지도자나 귀환 동포나 그 현실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개인적 삶의 복원, 일제 식민지배의 청산과 식민유제의 극복, 그리고 한국 문제의 전후처리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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