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1.05 13:17 수정 : 2019.02.01 13:50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사회 여론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편지 검열부터 했다. 이 검열 보고서부터 당시 미국 대통령 사절단에게 보내는 각계 인사들의 건의 편지 등 많은 서신들이 메릴랜드주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관에 보관돼 있다. 정용욱 교수 제공

[토요판] 정용욱의 ‘편지로 읽는 현대사’
① 과거로부터 배달된 편지
해방 이후 정부 수립까지 3년간
미 점령군 손에 들어갔던 편지
메릴랜드주 국립문서관에 보관

이승만, 김구, 여운형의 편지
장삼이사 주고받은 사신들도
수신인에 맥아더, 하지 등도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사회 여론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편지 검열부터 했다. 이 검열 보고서부터 당시 미국 대통령 사절단에게 보내는 각계 인사들의 건의 편지 등 많은 서신들이 메릴랜드주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관에 보관돼 있다. 정용욱 교수 제공

▶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몇년 전 이역만리 페루의 쿠스코에 있는 대성당에서 진귀한 그림과 조우했다. 마르코스 사파타라는 잉카 원주민 출신 화가의 <최후의 만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림 속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만 유일하게 피부색이 검게 채색되어 있다. 그 사람이 유다라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유다는 예수를 팔아넘기고 받은 돈을 넣은 주머니인지 식탁 아래 오른손에 주머니 하나를 꼭 쥐고 있다. <최후의 만찬>은 교회나 서양의 미술관에서 자주 접하는 성화이고, 유다와 주변 분위기를 다소 어둡게 묘사한 그림이 없지 않지만 이 그림처럼 노골적으로 유다만 검게 칠한 작품은 잘 보지 못했다. 그 화가는 왜 유다만 유색인으로 그렸을까? 그 그림을 접한 뒤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인터넷을 여러 차례 검색했고, 서양미술사 관련 책들을 뒤졌지만 아직 그 이유를 밝히지 못했다. 마르코스 사파타는 종교적 주제를 다루었음에도 작품에 우의(寓意)와 비유를 집어넣고, 복잡한 신학적 주제를 단순화시켜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한 사정은 그가 자의식이 강했고, 교회가 후원자였지만 그의 그림에서 나름대로 독자적 세계와 그만의 화풍을 추구하지 않았나 짐작하게 한다.

유다를 예수의 다른 제자들과 구분하는 수단과 방법이 달리 있을 터인데 왜 사파타는 유다만 유독 유색인으로 묘사했을까? 만약 권력자인 스페인 총독 또는 후원자인 대주교의 주문으로 그렇게 그렸다면 유다의 검은 피부는 스페인 통치자와 대주교의 인종주의적 편견을 반영한 것이고, 그 스스로 그렇게 했다면 식민지 원주민 화가의 자의식의 발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얼마나 독실한 기독교 신앙의 소유자였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케추아족으로서 그의 자의식이 유다를 유색인으로 표현하게 만들었다면 그는 기독교를 신봉하더라도 케추아인은 유다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자기 내면의 의식을 그림에 드러낸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작품에다 노골적으로 비꼬기(Irony)라는 모티프를 추가한 것이다.

페루 쿠스코 성당의 <최후의 만찬>. 유다(오른쪽 맨 아래)의 얼굴색만 검다. 정용욱 교수 제공
에고도큐먼트의 등장

그 그림에 구현된 시대정신과 그의 정신세계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 그림을 그의 자아와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에고도큐먼트로 볼 수 있을까? 그의 창작 동기나 배경을 알려주는 다른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면 후대의 역사가는 그림을 통해서 그의 미의식과 정신세계를 탐구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역사가가 그와 그의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가 살았던 시대와 대면하기 위해서는 그의 내면세계로 들어가 그의 주체성(Subjectivity)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최근 역사학계에서 편지, 일기, 수기, 자서전 등의 에고도큐먼트(Ego-document)를 통해 역사를 서술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일종의 자기고백이자 동시에 시대에 대한 증언이라는 에고도큐먼트가 가진 이중의 성격에 역사가들이 주목한 것이다. 편지, 일기 등은 개인의 은밀한 내면세계를 알 수 있는 자료이고, 공식 기록이 아니지만 사회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사적이라고도 할 수 없다. 즉, 편지에는 개인의 심성과 사건이 결합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역사가 자료 또는 텍스트의 매개를 통해서 개인 또는 집단과 연관된 세계를 보는 것이라고 할 때 편지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의 의미와 지향하는 가치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서사적 특징을 가진다.

게다가 에고도큐먼트는 그동안 거대담론이 지배했던 역사 해석을 다양한 개별 주체들이 참여하는 역사 서술과 해석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최근 구술사, 미시사, 생활사 분야의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개인과 가족의 역사, 마을의 역사 등 역사 서술의 주체가 세분화되고 다양화되었으며, 그것은 또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을 바꾸거나 다양하게 만들고 있다. 편지, 일기 등 에고도큐먼트는 개인들의 자기증언을 통해 역사 서술의 주체를 다변화하고 확장해주는 구실을 한다. 그리고 자전적 자료와 텍스트는 자기증언이자 동시에 공동체 및 귀속집단과도 연결됨으로써 한 사회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볼 수 있게 해주고 사람들이 규범적인 질서 또는 혼란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해방 공간’으로부터 수많은 편지가 배달되었다. 그 편지들은 물리적으로는 배달되었다기보다 필자가 찾아갔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근교의 메릴랜드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관(National Archives Ⅱ)에 소장된 그 편지들은 서울로부터 비행기로 13시간 이상을 날아간 뒤, 장거리 비행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공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이나 더 달려가서야 비로소 실물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편지들은 필자가 찾아냈다기보다 과거로부터 배달되었다고 보는 것이 아무래도 옳을 거 같다. 그 편지들이 무언가 자꾸 말을 걸어오고, 그것들이 전하는 사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 뿐 아니라 또 응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사는 이성로가 1947년 8월28일 미국 특사인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쓴 편지로, 미 군정을 장악한 친일파의 발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정용욱 교수 제공
웨더마이어 사절단에게 보내는 편지가 보관돼 있는 문서상자. 정용욱 교수 제공
미 군정, 여론 파악 위해 편지 검열

과거로부터 배달된 편지들은 미국 국립문서관에 몇개의 문서철에 나뉘어서 소장되어 있다. 발신인은 이승만, 김구, 여운형 등 한국인 지도자부터 평범한 장삼이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수신인 역시 맥아더 장군, 하지 장군, 웨더마이어 장군 등 미군 고위 당국자들과 장성들부터 한국인 지도자, 평범한 한국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편지 자료들은 소통의 주체와 상대가 다양했고, 소통 방향도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이 그 편지들을 수집, 정리한 동기와 목적 역시 다양했다. 어떤 편지는 점령군 당국이 검열한 뒤 수신인에게 배달되었고, 어떤 편지는 몰수당하여 미처 배달되지 못했으며, 어떤 편지는 6·25전쟁 중 미군에 의해 ‘노획’된 것도 있다.

도대체 그 편지들은 어떤 사연을 간직한 채 이국의 문서고(文書庫)에서 70년이나 잠자고 있을까? 오늘의 시점에서 이 편지들이 후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같은 문서고에 수장된 미 군정의 각종 통치자료나 정책문서, 또는 그들이 점령지에 펼쳐놓은 조밀한 정보망을 통해서 수집하고 정리한 각종 첩보·정보 보고서들, 그리고 당대에 간행된 신문, 잡지 등을 통해서 재구성된 역사와 이 편지들이 증언하는 역사는 얼마나 차이가 날까?

전근대는 물론 근대에 이르러서도 편지는 사회적 소통의 기본 수단이었고, 그것은 해방 이후 미·소 양군이 한반도를 점령했던 시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전신, 전화 등 보다 신속하고 발달한 통신수단을 독점했고, 그것들을 이용해서 남한을 통치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편지로 주로 소통했고, 한국인이 자신의 의사를 점령군에게 전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신자가 미 군정 당국이거나 요인이라면 모를까 한국인들 사이에 사사로이 교환된 편지들이 도대체 어떤 연유로 미국 국립문서관에 소장되어 있을까? 미군이 한국인들끼리 주고받은 편지까지 수집한 목적은 무엇인가?

미, 편지 검열 통해 여론 파악
해방기 민초 삶과 점령자 시선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기회 제공

미군은 진주 초기부터 한국 사회의 여론 동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것을 한국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추적했다. 미군은 편지가 기본적인 사회적 소통 수단인 만큼 그에 대한 분석은 그 시기 해당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관계와 인간 활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진주하자마자 서신 검열을 전담하는 기구를 설치해서 편지들을 검열하기 시작했다. 주한(駐韓) 민간통신첩보대(Civil Communication Intelligence Group-Korea)라고 불린 이 기구는 1945년 9월9일 서울에 최초로 설치되어 9월13일부터 중앙우체국에서 우편 검열을 개시했고, 이어서 1945년 10월6일 부산에서도 우편 검열을 시작했다. 점령군 당국은 마음만 먹으면 남한 내에서, 또는 남한을 들고 나는 편지, 소포는 물론 전신, 전화 등 모든 우편물과 통신을 검열할 수 있었고, 점령 직후부터 점령지의 치안과 경제 복구를 명분으로 검열을 실시했다.

미 군정 ‘민간검열지대’(Civil Censorship Detachment)가 작성한 한국인 서신 검열 보고서. 서울 인사동에 살았던 임산이라는 사람이 이승만에게 부친 1945년 10월24일자 편지를 몰수한 다음에 간략한 내용을 적어 상부에 보고한 문서. 편지 내용은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이라는 미 국무부 극동국장의 성명은 원자탄보다 끔찍하고, 신탁통치에 반대하기 위해 모든 정당이 연합해서 하나의 정당을 결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용욱 교수 제공
미국 국립문서관에서 자료 조사를 하고 있는 정용욱 교수. 정용욱 교수 제공
‘부모님 전 상서’가 말하는 것

이 기구는 처음에는 일본인, 한국인 ‘감시 대상자 명단’(Watch List)을 만들어서 관리했으나 점령이 장기화함에 따라 그 명단에서 일본인이 점차 사라지는 대신 그 자리를 한국인 이름들이 메꾸었고 그 수가 점차 늘어났다. 이 기구는 한국인 정치가들 또는 정당, 단체들을 중요도에 따라 분류한 감시 대상자 명부를 만들어서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을 우선적으로 검열했지만 보통사람들의 편지도 일정 비율을 임의 추출해서 검열했다. 점령군이 만든 감시 대상자 명단은 첩보 수집, 사찰의 목적과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이 기구가 일반인들의 편지까지 광범하게 검열한 동기와 이유는 무엇인가? 흥미 있게도 이 기구는 일반인들의 편지 검열을 통해서 남한 사회의 여론 동향을 추적한 ‘서신검열정보요약’(A Digest of Information Obtained From Censorship of Civil Communications in Korea)이라는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작성했다. 미군이 점령지 주민들이 주고받은 사신(私信)을 통해서 해당 지역의 생생한 여론을 채취한 셈인데, 미군은 이 기발한 착상을 또 다른 점령지 일본에서도 똑같이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수집자의 의도와 달리 그 보고서와 그것을 작성하기 위해 점령군이 수집한 편지들은 역으로 후대의 연구자들에게 해방 직후 한국 사회의 민심과 민의를 들여다볼 수 있는 ‘때늦은 지혜’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점령자의 시선까지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45년 8월15일 해방된 날로부터 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 8월15일까지의 기간을 ‘해방 공간’ 또는 ‘점령기’로 부른다. 전자가 일제 패망에 따라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어 독립국가 수립의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당시의 역사적 사정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해방이 곧 외국 군대에 의한 한반도 분할점령으로 이어지고, 그 시기 한국인들이 전개한 정치·사회적 개혁과 새 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이 외국 군대의 점령 아래서 제대로 개화할 수 없었던 역사적 규정성을 강조한다. 8·15 이후 한반도는 해방의 감격과 점령의 엄중함이 공존하며 서로 교차했다. 그 복잡하고 역동적인 시기의 구조와 역사적 성격을 거시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 국가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광장과 골목, 마을 어귀나 사랑방에 모여 시국담과 애환을 나누었던 민초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 시기 민중 생활을 크게 위협하고 경제적 혼란을 야기했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쌀값 등귀와 하숙비 인상으로 더 이상 서울 유학이 불가능하다는 “부모님 전 상서”가 더 생생하게 전달해줄 수 있을 것이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정용욱의 편지로 읽는 현대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