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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03 18:45 수정 : 2019.01.04 01:08

[짬] 재불 사학자 이장규씨

재불 사학자 이장규씨가 작년 초 프랑스 소도시 쉬프에 자료 조사차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두려움은 없었지만 많은 나이로 인한 시선들이 불편했어요. 어려움은 말로 다 못하죠. 공부해도 머리에 남는 게 없었거든요. 체력도 많이 딸렸고요. 그저 인생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의 어려움을 묻자 이씨가 한 말이다. 이장규씨 제공

프랑스 파리 7대학 한국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이장규(52)씨는 2017년 말부터 프랑스의 여러 기관의 문서 수장고를 뒤지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사 관련 사료를 찾기 위해서다. “제가 ‘한국독립운동가들과 프랑스 휴머니스트들의 만남과 상호인식의 역사’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그가 지난해 발굴한 사료는 여러 차례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 마른주 문서 보관소에서 찾아낸 소도시 쉬프의 1920년 한인 명단이 대표적이다. 37명 국적 난에 당시로 봐서 이미 10년 전 국제사회에서 소멸한 나라인 ‘한국’인(Coreen) 표시가 있었다. “가슴이 먹먹했어요. 사람 이름을 봐서는 한국인인지 알 수 없어요. 국적을 보고 확인했죠.” 나라를 잃은 뒤 연해주와 북해,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건너온 한인 노동자들이 한국적으로 프랑스 체류 허가를 얻은 사실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였다. “한인 노동자들을 영국에서 데려오기 위해 당시 황기환 서기장 등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이죠.” 그는 쉬프 현장 조사를 통해 한인들이 철도복구와 묘지 조성 작업에 투입된 사실도 밝혔다.

김규식 대표 등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인사들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도 발굴했다. 그가 찾은 프랑스 신문 기사를 보면 김규식 대표는 1919년 8월 파리를 떠나기 직전 열린 환송연에서 서구 열강의 한국 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비협조를 강력히 성토했다. 프랑스 국립해외영토자료관에서 찾은 1919~1920년 호찌민 동향 보고서를 보면 베트남의 국부로 불리는 호찌민이 당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에 깊이 감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보고서를 작성한 프랑스 정보경찰 ‘장’은 “호찌민이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고 적었다.

2일 전화로 만난 이씨는 박사 논문을 끝낸 뒤에도 가능하면 프랑스에 남아 한국 독립운동 관련 사료 발굴에 힘을 쏟겠다고 했다. “프랑스 대학에서 자리 잡기는 매우 힘들어요. 연구소 쪽 자리를 알아봐야죠. 프랑스어로 된 독립운동 자료를 모두 찾아 정리해 한국에 소개하고 그 뒤에는 영국과 독일 쪽 자료를 찾아야죠.” 그는 “기록물 보관학이란 학문이 시작된 나라가 바로 프랑스”라면서 “프랑스 정부가 매우 세밀한 것까지 자료를 잘 보관하고 있고 이용도 쉽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만 47살 때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고향인 강릉에서 대학을 나온 뒤 주로 사업을 했어요. 처음엔 부산에서 통닭집을 했어요. 돈을 좀 벌어 직원이 10명 이상인 식품회사를 운영하기도 했죠. 중국에서 고구마를 수입해 맛탕을 만들어 팔았죠. 사업을 하면서 인간관계에 많이 지쳐 2012년 접고 이듬해 겨울에 누나가 사는 파리로 한 달 여행을 했어요. 그리고 다시 비자를 받아 2014년 프랑스에 왔어요.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누나의 권유도 있었고요. 40대 후반에 프랑스어 공부를 기초부터 시작했죠.” 아직 결혼하지 않아 뒤늦은 유학이 가능했으리란 말도 했다.

100년 전 ‘한국적’ 표기 한인 명단 등
프랑스서 독립운동 사료 잇단 발굴
파리 7대학 박사과정 재학중

한국서 식품회사 등 사업체 꾸리다
40대 후반 “프랑스어 배우겠다” 유학
“프랑스어 능한 독립운동 연구자
없다는 말에 미술사서 방향 전환”

독립운동사 연구는 2016년에 뛰어들었다. “파리 7대학 석사 1년 차까진 미술사를 전공하려고 했어요.” 전공을 바꾼 계기는 2016년 4월 파리 7대학 한국학과에서 열린 ‘한국독립운동과 프랑스’ 주제 학술대회였다. 그는 석사 과정 학생으로 이 대회를 준비하고 독립운동 연구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독립운동 연구에 관심이 생겼어요. 특히 이 대회에 참가한 장석흥 국민대 교수께서 ‘프랑스말을 하는 한국독립운동 연구자가 지금껏 전무했다. 그 길을 가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셨죠.” 1년 뒤 그는 한국독립운동가를 주제로 석사 논문(광저우의 한인, 박의일)을 썼고 바로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2017년 말엔 파리 7대학 한국학과 마리오랑주 리베라산 교수(회장), 장석흥 교수(부회장) 등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모임인 리베르타스(독립운동사 한불 연구회)를 만들었다. 리베르타스는 라틴어로 자유, 독립이란 뜻이다. 한국 현대사를 전공한 리베라산 교수는 현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낸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불어판 번역 작업도 하고 있다. 회원이 35명인 연구회에서 그는 학술 담당이다. “연구회에 속한 프랑스인 연구자는 10여명 정도입니다. 월례 모임을 갖고 연구 성과물을 발표하죠. 저도 두 차례 발표했어요. 이종찬 전 국정원장,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께서 연구회 재정 후원을 해주셨어요.”

그는 독립기념관 연구 지원금을 받아 최근 ‘파리위원부 시기 스위프(Suippes)의 한인 이주와 재법한국민회의 독립운동’이란 제목의 논문을 완성했다. 지난해 발굴한 한인 명단을 토대로 썼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내는 간행물 2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리베르타스 회원들이 모여 토론하고 있다. 이장규씨 제공

자료 발굴 계획은? “지금까지는 1920년대까지 자료를 추적했어요. 올해부턴 그 이후로 시기를 넓혀 찾아볼 생각입니다.” 덧붙였다. “국사편찬위나 국가보훈처와 같은 한국 기관에서 그동안 프랑스 외무성 자료를 많이 수집해갔어요. 외무성 말고도 다른 부처나 지방정부에 한국 독립운동 자료가 많아요. 한국 쪽에서 지금이라도 자료 발굴 프로젝트팀을 만들어 함께 작업하면 좋겠어요.”

뒤늦게 시작한 프랑스어 공부다. “독해는 괜찮지만, 프랑스어로 발표하는 것은 조금 부족해요.” 석사 과정 땐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지금은 연구에만 시간을 쏟고 있단다. “프랑스 대학 학비가 연간 40~50만원 정도라 부담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1년 뒤엔 10배 이상 올린다고 해서 걱정이 많이 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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