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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 질서는 한국사를 관통하는 근간이다. 그 정점에 족보가 있다. 사진은 조선시대에 작성된 한 가문의 족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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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 ⑩ 유교의 ‘발명’
족보야말로 한국의 법률적, 경제적,
정치적 욕망이 반영되어 있는
흥미로운 자료가 아닐까?
거액이 오가는 경제적 차원,
신분상승과 권력이라는 정치적 차원,
소송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려는
법적 차원이 모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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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 질서는 한국사를 관통하는 근간이다. 그 정점에 족보가 있다. 사진은 조선시대에 작성된 한 가문의 족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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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문학 연구자들이 20세기 한국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염상섭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염상섭은 <만세전>에서 조선 사람과 조선 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 적이 있다. “고식, 미봉, 가식, 굴복, 도회(韜晦), 비겁… 이러한 모든 것에 만족하는 것이 조선 사람의 가장 유리한 생활 방도요, 현명한 처세술이다. 조선 사람에게 음험한 성질이 있다 하면 그것은 아무의 죄도 아닐 것이다. 재래의 정치의 죄다.” 염상섭은 <만세전>에 이어 <삼대>에서 재래의 정치와 조선인의 행태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묘사한다. 이를테면 <삼대>의 주인공 조씨 할아버지를 보라. 그는 이미 손자까지 있을 정도로 연로한 사람인데, 거금 2만냥을 들여 다시 젊은 수원댁을 첩으로 들인다. 그러나 수원댁은 그의 소망과는 달리 그만 딸을 낳고 만다. 그리하여 아들을 하나 더 두고 싶은 조씨 할아버지의 성욕은 그칠 줄을 모른다. “영감의 소원은 앞으로 15년만 더 살아서(15년이면 여든두셋이나 된다) 안방 차지인 수원집의 몸에서 아들 하나만 더 낳겠다는 것이다.”
고문서 연구가 이병규의 추산에 따르면 1877년경 한 냥(兩)의 가치는 2004년 물가로 40만원 정도였다고 하니, 20세기 초의 묘사라고 해도 조 영감은 젊은 첩을 들이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쓴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2만냥 정도는 큰 낭비도 아니다. 그는 기꺼이 10배나 되는 20만냥의 돈을 써가며 남의 족보를 사들인다. “돈을 주고 양반을 사!” 혹은 “조상의 음덕을 입으려고? 하지만 꾸어온 조상은 자기네 자손부터 돕는답니다”라는 이죽거림이 주변에 없지는 않았지만, 결국 많이 배웠다는 그의 아들마저도 이렇게 말한다. “우리 조씨도 그렇게 해서 남에 빠지지 않고 자자손손이 번창해 나가야 하지 않겠나.” 양반집 가계에 끼어들어가는 데 왜 그렇게 큰돈이 드는가? 책 만드는 비용이 비싸던 시절이었다고는 해도, 족보 출판비가 20만냥에 이를 정도로 비쌌던 건 아니다. 염상섭에 따르면 그 돈은 “군식구가 늘면 양반의 진국이 묽어질까 보아 반대를 하는 축들이 많으니까 그 입을 씻기 위해 쓴 것이다.” 즉, 돈으로 가짜 양반 신분을 사려 드는 조씨 일가만 “고식, 미봉, 가식, 굴복, 도회(韜晦), 비겁”했던 게 아니다. 이른바 기존 진성 양반들조차도 일정액의 돈을 받으면, 자신들이 그렇게 뻐기던 양반이라는 상징자본을 팔기에 서슴지 않았다는 얘기다.
양반처럼 보이기 위해 족보 만들어
이와 같은 염상섭의 묘사는 단지 창작에 불과한 것일까? 염상섭이 묘사하는 모습은 사실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인천시 남동구 도림동 오봉산 중턱으로 가보자. 그곳에는 조선시대에 판서를 역임한 이의 산소가 있는데, 그 산소의 비석 뒤에는 열녀 나주 임씨(羅州林氏)의 행적이 새겨져 있다. 그 판서는 많은 첩을 거느렸다. 20세의 나주 임씨를 어린 첩으로 맞이한 건 나이 83세 때다. 그런데 같이 지낸 지 8개월 만에 그만 그가 죽고 만다. 그러자 임씨는 매우 슬퍼했고, 장사를 치르고 나서 며칠 후에 자살했다고 전한다. 그녀는 왜 슬퍼했고, 왜 자결했던 것일까? 실제 그녀의 마음이 어땠든 간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동첩열녀(童妾烈女)라고 칭송했고, 정부에서는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열녀정려(烈女旌閭)를 하사했다.
그뿐 아니다. 역사학자들은 조선에서 현대에 이르는 동안 이 땅에서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이 어떤 식으로 펼쳐졌는지 주목해왔다. 이를테면 권내현의 저서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어느 노비 가계 2백 년의 기록>을 보라. 그에 따르면, 노비들은 도망 혹은 재산을 통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꾸준히 모색해왔다. 특히 국가 재정이 피폐하던 시기에는 국가에 곡식을 바치고 노비 신분을 벗어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그러나 돈만 낸다고 바로 양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성씨와 본관을 만들어야 했고, 기존 양반처럼 보이기 위해 족보를 만들고 제사를 지내야 했다. 이 땅의 사람들이 너도나도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게 된 데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와 같은 양반으로의 신분 상승 욕망은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 것일까? 이른바 갑오경장의 노비제도 혁파 이후에는 그러한 현상이 불식되었을까? 특정 제도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세상이 갑자기 바뀌는 것은 아니다. 역사학자 이기백은 1999년에 <한국사 시민강좌 24>에 발표한 ‘족보와 현대사회’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한다. “해방 초기에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낸 분 중의 한 분은 그의 부친이 노비 신분이었다고 한다. 그분 자신은 인격이 고결해서 굳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는 일화까지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분이 세상을 떠난 뒤에 자제분이 부친의 전기를 출판했는데, 거기에는 양반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아마 자제분이 같은 성씨를 가진 어느 가문의 족보에 넣도록 했을 것이다.” 유명 국립대학의 총장까지 지낼 정도로 “신분 상승”을 한 집안마저, 그리고 노비 신분을 자인할 정도의 정신력을 가진 선친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손대에 가서는 염상섭이 묘사한 상황이 다시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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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전통사회에서는 양반으로의 신분 상승 욕구 또한 매우 강렬했다. 사진은 주막에서 양반들이 쫓기듯 술을 마시는 풍경을 그린 신윤복의 <주사거배>.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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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근본 없는 자식과 결혼을…”
이기백이 묘사한 시기로부터도 이제 제법 시간이 흘렀다. 21세기에 들어선 요즘에는 그런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연애하다가 양가에 결혼 승낙을 얻는 과정에서 뜻밖의 고초를 겪은 연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정씨 성을 가진 여자 쪽 할아버지가 김씨 성을 가진 남자와의 결혼에 결사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여자 쪽 집안 선조가 저쪽 김씨 집안 선조로부터 참살당한 고려시대 기록이 있으니, 절대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단다. 젊은 남자는 당황했지만, 일단 결혼을 하고 봐야 할 것 같아서 선조분 일은 죄송하게 되었다고 사과를 했다. 그러나 여자 쪽 할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 집안 쪽 할아버지가 “그런 노망난 영감탱이 집안하고는 결혼 없던 걸로 해!”라며 맞불을 놓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 연인들은 원형탈모 증세까지 보이며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를 보다 못한 남자 쪽 할아버지가 마침내 집안의 비밀을 털어놓게 된다. ‘사실 내 아버지는 조선 말에 양반집 김씨의 노비였단다. 성도 없었지. 갑오경장을 계기로 노비들도 호적신고를 할 수 있게 되자 갑자기 성을 만들어야 했어. 그저 주인집 성씨를 따르다 보니 우리 집안이 그만 김씨가 되고 말았어. 우리 집안 족보가 새것인 데는 사실 그런 이유가 있단다. 사실, 그간 엉뚱한 집안 제사를 지내온 거야.’ 할아버지의 고백을 듣자마자 그 남자는 기쁜 나머지 여자친구 집안에 즉각 그 사실을 알린다. “우리 집안은 사실 김씨가 아니었고, 김씨 집안 노비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여자 쪽 할아버지는 결혼을 허락하기는커녕 어떻게 근본 없는 자식과 결혼하느냐며 다시 화를 냈고, 젊은이의 원형탈모는 나을 줄을 몰랐다.
전해들은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다고? 그렇다면 언론에 공개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어떤가. 법률전문 신문 <로이슈>의 2018년 1월10일자 보도에 의하면,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L씨는 딸이 다니던 특수교육센터의 책임자 K와 어느 날 모텔에 가서 성관계를 갖는다. 아마 그때 그 두 사람은 사랑의 밀어도 속삭였으리라. 이 사회의 관습이나 법 따위는 우리 사랑을 떼어놓을 수 없어, 운운. 어쨌거나 그 사랑의 결과, K는 딸을 임신했다. 그러나 딸만 셋이 있던 L씨는 K에게 임신중절을 시키고 아들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여러 노력 끝에 K가 마침내 아들을 낳게 되자, L씨는 자신의 자식으로 입적시킨다. 이리하여 “자자손손이 번창해나갈” 무렵, K씨는 L씨에게 다수의 내연녀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L씨가 그들에게 고액의 금전지원을 하고 있다는 낌새를 채자, 그만 분노가 폭발하고 만다. K씨는 자신에게도 많은 금전지원을 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제 변호사로 활동 중인 L씨는 그 요구에 응하지 않고 대신 K씨의 손을 물어뜯는다. K씨는 수십억원을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한다. L씨 역시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도 목을 졸린 적이 있다며 맞소송을 제기한다. 이 나라가 결국 법치국가임을 보여주는 이 화려한 내연관계보다 내게 흥미로운 것은, 법조인 L씨가 털어놓은 다음과 같은 소회이다. “제가 딸만 셋이다 보니 모친으로부터 10여년간 들어온 말이 ‘판사면 뭐하고 돈 잘 벌면 뭐하노. 아들 하나도 없는데…’였는데 이게 심리적 원인이 돼 혼외자가 생겨도 죄책감보다 되레 마음이 편했다. (…) 나를 짐승 취급하는 욕설 등 수모를 당하면서도 꾹 참아왔던 것은 아들 녀석에게 피해가 갈까 봐서 그랬는데….”
공자 생전엔 “유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한국어 번역 후기에서 박홍규는 “미국에서 동양의 메카라고 하는 하버드의 옌칭 연구소란 소위 동양적인 것―중국적·일본적인 것의 수집처이다.(한국적인 것도 약간 있으나 그 대종은 족보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법이나 경제 또는 정치를 제대로 연구하기는 힘들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을 고려해보면, 족보야말로 한국의 법률적·경제적·정치적 욕망이 반영되어 있는 흥미로운 자료가 아닐까?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에는 거액이 오가는 경제적 차원, 신분상승과 권력이라는 정치적 차원, 그리고 소송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려는 법적 차원이 모두 들어 있다. 그래서였을까. 영국에서 오랫동안 한국사를 가르쳤던 마르티나 도이클러는 족보 자료를 적극 활용해서 근년에 <조상의 눈길 아래서>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그 책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지배층은 삼국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고, 친족 질서야말로 한국사를 관통하는 근간이며, 그것은 소위 “유교”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태와 <논어>의 세계를 연결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유교”라는 용어의 뜻이 정밀하지 않다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공자 생전에는 오늘날 알려진 “유교”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 그리고 <논어>에 따르면, 공자는 당시 만연한 여성 혐오의 일단을 보여주되(‘양화’(陽貨)편), 족보 작성을 옹호하거나 조상신의 덕을 보라고 한 적은 없다. 그리고 여자와의 염문설에는 부정으로 일관했으며(‘옹야’(雍也)편), 자신의 친아들보다는 제자를 더 사랑했다. 그렇다면 위에서 묘사한 현상들과 <논어>와의 착잡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좀 더 복합적인 접근, 좀 더 역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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