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강재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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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교수’ 재륜씨 ‘빨갱이형제’ 이유
‘11기 동기’ 전두환세력 공세로 해직
20여년 뒤에야 동생 고초 알고 ‘충격’
둘째 재규씨는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
60년대 북에서 편지 보내왔으나 끊겨 그가 처음으로 국내 언론에 등장한 것은 1981년 3월 계간지 <삼천리>를 함께 만들던 소설가 김달수·사학자 이진희와 함께 모국 방문을 했을 때다. 광주항쟁을 유혈진압한 신군부의 피냄새가 가라앉지 않은 무렵이라 이들의 갑작스러운 입국은 동포사회와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이 이들과 결별선언을 한 것은 그 여파다. “남과 북 양쪽에서 환영받지 못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은 움직일 수 없다”고 주장한 그가 남·북·일본으로 찢겨진 가족사를 밝힌 것은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2010년 6월30일치)에서였다. 충북 청주의 한 고교에서 영어와 독일어 교사로 일할 때 한국전쟁이 터져 같은 학교 재학생이던 5살 연하의 막내 동생 재륜을 고향 제주도로 보냈다고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2살 아래 동생 재규는 행방불명이 됐다. 그는 남에서 문민정권이 탄생한 1993년에야 재륜이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있다가 형 때문에 쫓겨났다는 기사를 한국 잡지에서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재륜은 육사 11기에서 신망이 있어 동기회 모임인 북극성회 초대 회장을 맡았고 후배들에게도 영향력이 컸다. 그는 평소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청죽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운동에만 관심이 있고 놀기 좋아하는’ 전두환·노태우 무리를 견제했다. 그러다 “빨갱이 형을 두었다”는 이유로 전두환 세력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1970년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에서 쫓겨나 중령으로 예편했다. 재륜은 이 충격으로 한때 실명 위기에까지 빠졌으나 동국대로 옮겨 인문대학장까지 지냈다. 두 형제는 올가을 나란히 세상을 떴다. 재륜이 지난 10월23일 숨을 거두었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형이 쫓아간 것이다. 전쟁 때 소식이 끊겼던 재규는 1960년 북에서 형에게 편지를 보낸 이래 근근이 서신이 이어졌는데 내용은 북의 지도자 예찬뿐이었다고 한다. 이승에서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못한 세 형제가 저승에서는 기탄 없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까? 김효순/전 <한겨레>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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