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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07 18:58 수정 : 2017.12.07 21:45

【가신이의 발자취】 재일사학자 강재언 선생을 떠나보내며

고 강재언 선생.

지난달 19일 일본 오사카에서 별세한 사학자 강재언 선생은 재일동포 1세대 원로학자이자 그 자신 분단의 비극을 체현한 인물이었다. 1926년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농고를 나온 그는 한국전쟁 초기 일본으로 밀항해 오사카상과대학(현 오사카시립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한국사 연구로 방향을 바꿨다. 1981년 교토대학에서 ‘조선의 개화사상’이란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근대조선의 사상> <서양과 조선>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 항일빨치산의 거짓과 실체> 등 2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58살이 되어서야 교토의 불교계 사립대학인 하나조노대학의 ‘촉탁교수’가 됐지만 정식교수로 임용되지는 못했다.

그는 시간강사를 전전하면서도 1970년대 초반 간사이지방에서 조선사, 한반도 정세에 관심이 많았던 일본인 청년들이 만든 ‘무궁화회’ 등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활발한 강연 활동을 벌였다. 무궁화회 30돌을 기념하기 위한 논문집으로 2001년 2월 <신코리아백과―역사·사회·경제·문화>가 출간됐다. 그는 서문에서 모임의 초창기를 회고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이미 40대 중반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아니 쫓겨난 ‘외톨이 늑대’였다”고 기술했다. 총련 산하 단체에서 일하다가 1960년대 후반 김일성 유일체체 확립과 사상통제에 반발해 뛰쳐나온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막내동생 재륜씨도 한달 앞서 별세
‘육사 교수’ 재륜씨 ‘빨갱이형제’ 이유
‘11기 동기’ 전두환세력 공세로 해직
20여년 뒤에야 동생 고초 알고 ‘충격’
둘째 재규씨는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
60년대 북에서 편지 보내왔으나 끊겨

그가 처음으로 국내 언론에 등장한 것은 1981년 3월 계간지 <삼천리>를 함께 만들던 소설가 김달수·사학자 이진희와 함께 모국 방문을 했을 때다. 광주항쟁을 유혈진압한 신군부의 피냄새가 가라앉지 않은 무렵이라 이들의 갑작스러운 입국은 동포사회와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이 이들과 결별선언을 한 것은 그 여파다.

“남과 북 양쪽에서 환영받지 못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은 움직일 수 없다”고 주장한 그가 남·북·일본으로 찢겨진 가족사를 밝힌 것은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2010년 6월30일치)에서였다. 충북 청주의 한 고교에서 영어와 독일어 교사로 일할 때 한국전쟁이 터져 같은 학교 재학생이던 5살 연하의 막내 동생 재륜을 고향 제주도로 보냈다고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2살 아래 동생 재규는 행방불명이 됐다. 그는 남에서 문민정권이 탄생한 1993년에야 재륜이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있다가 형 때문에 쫓겨났다는 기사를 한국 잡지에서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재륜은 육사 11기에서 신망이 있어 동기회 모임인 북극성회 초대 회장을 맡았고 후배들에게도 영향력이 컸다. 그는 평소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청죽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운동에만 관심이 있고 놀기 좋아하는’ 전두환·노태우 무리를 견제했다. 그러다 “빨갱이 형을 두었다”는 이유로 전두환 세력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1970년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에서 쫓겨나 중령으로 예편했다. 재륜은 이 충격으로 한때 실명 위기에까지 빠졌으나 동국대로 옮겨 인문대학장까지 지냈다.

두 형제는 올가을 나란히 세상을 떴다. 재륜이 지난 10월23일 숨을 거두었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형이 쫓아간 것이다. 전쟁 때 소식이 끊겼던 재규는 1960년 북에서 형에게 편지를 보낸 이래 근근이 서신이 이어졌는데 내용은 북의 지도자 예찬뿐이었다고 한다. 이승에서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못한 세 형제가 저승에서는 기탄 없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까?

김효순/전 <한겨레>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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