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7.11.29 18:26 수정 : 2017.11.29 20:37

해방 직후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는 몽양 여운형. <한겨레> 자료사진

몽양 여운형 70주기 추모 심포지엄

해방 직후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는 몽양 여운형. <한겨레> 자료사진
몽양 여운형(1885~1947)은 3·1운동에서부터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까지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며, 무엇보다 분단의 기로 앞에서 ‘좌우합작’에 기초한 통일정부 수립의 꿈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인물이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는 29일 오후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몽양 서거 70주기 추모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국내외 좌우합작운동과 오늘의 남북관계’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 갈수록 고조되는 한반도 위기 앞에서 몽양의 ‘좌우합작’ 정신을 되새기자는 뜻을 담았다.

발표를 맡은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역사학)는 “해방 정국에서 유력한 남북한 정치인 가운데 미국·소련, 미군정·소군정을 막론하고 주체적으로 접근, 접촉하며 협력하려 한 유일한 정치인”이었다고 여운형을 평가했다. 지금은 분단을 어쩔 수 없었던 현실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당시 여운형이 매달렸던 좌우합작, 남북합작, 더 나아가 미·소 협조를 통한 통일임시정부 수립의 길이 있었다는 것을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몽양은 자주적 통일·독립이란 큰 목표를 위해 미군정은 물론 북한, 소군정 등 누구와도 서슴없이 만났고, 작은 이익은 타협하고 양보했다. 그 때문에 2년 동안 12차례나 테러를 당하는 등 극단적 세력의 표적이 됐고, 1947년 극우단체에 살해당했다. 정 교수는 “여운형의 노선은 객관적 정세에 기초한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노선이자 문제 해결 방안이었다”고 짚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는 “정치연합은 민주주의와 국가발전의 필수 요체”라고 지적하고, 자유-사민 연합을 통해 복지국가의 모델을 만들어낸 스웨덴, 뉴딜연합으로 대공황 극복에 성공한 미국 등 국내외 여러 ‘연합정치’ 사례들을 통해 그 중요성을 역설했다. 한국에서는 김종필과의 연대를 통한 김대중의 연합정치를 주목할 만한 사례로 꼽았다. 그는 “타협을 통한 갈등의 해소와 안정의 증대가 절실하다”며, 이를 위해 승자독식 권력구조와 대통령 권력독점의 해체, 혼합민주주의의 실현 등을 구체적인 대안으로 제시했다.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는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을 주도했던 우사 김규식(1881~1950)의 구상을 짚었다. 우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부주석이었고 미군정과는 누구보다 더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미군정의 단독정부 수립 방침에 동조하지 않고 몽양과 함께 ‘좌우합작 7원칙’을 이끌어내는 등 통일임시정부 수립 노선을 걸었다. 역사학자 김기협 <프레시안> 편집위원은 몽양, 우사와 함께 좌우합작에 매진했던 민세 안재홍(1891~1965)의 ‘신민족주의’ 이론으로부터 “민족국가 확립의 목표를 좌우대립으로부터 초연한 위치에 설정하려” 했던 그의 구상을 되새겼다.

이부영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몽양, 우사, 민세의 좌우합작, 통일정부 수립 운동이 분단정부 수립과 전쟁으로 좌절되었지만, 우리의 미래 구상은 그분들의 노력과 성과를 이어받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