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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02 15:46 수정 : 2017.08.02 21:21

왕샤오밍 중국 상하이대 교수(왼쪽)과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오른쪽)이 지난 30일 서울 항동 성공회대 교수회의실에서 대담을 나누고 있다. 백원담 교수 제공

백원담-왕샤오밍 대담
자본주의 전지구화 대응하는 ‘월딩’
역사적 경험 배경 삼은 ‘발전’ 논의

왕샤오밍 “중 혁명 속 평등 개념 눈길”
백원담 “사회가 국가 재정위하는 흐름”

왕샤오밍 중국 상하이대 교수(왼쪽)과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오른쪽)이 지난 30일 서울 항동 성공회대 교수회의실에서 대담을 나누고 있다. 백원담 교수 제공

아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문화연구 학술단체 ‘인터아시아문화연구학회’(Inter Asia Cultural Studies Society)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는 지난 28일부터 3일 동안 서울 항동 성공회대에서 ‘월딩-지구화를 넘는 아시아’(Worlding Asia)란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격년으로 열리는 학술대회의 한국 개최를 맞아 주최쪽이자 인터아시아 문화연구에 깊이 간여해온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동아시아연구소장)가 학회 참석차 방한한 중국의 대표적인 문화연구자 왕샤오밍 중국 상하이대 교수와 30일 만나 대안적 세계화로서 ‘월딩’의 의미와 그 과제에 대해 대담을 나눴다.

백원담(이하 백) 오래간만입니다. 바쁘신 가운데 인터아시아 문화연구학회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국제회의에 참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번 주제가 ‘월딩 아시아(Worlding Asia)-지구화를 넘는 아시아’입니다. 제가 이번 회의에 선생님을 ‘사회운동-아시아의 유산’이라는 주제 토론에 선생님을 모셨는데 선뜻 응해주신 것 또한 감사드립니다. 이번 회의의 전체 주제와 발표 및 논의 분위기가 어떠셨는지요?

왕샤오밍(이하 왕) 월딩 아시아라는 주제는 큰 그릇(大器)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크로드 등 문화와 경제의 전지구화 경로와 같이, 전지구화는 이전에도 존재했지요. 그러나 최근 서구에 의해 보편화된 전지구화는 제대로된 지구화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편 ‘월딩’이 어떤 의미인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대략 방향이 이쪽이라는 것은 알지만 구체적인 문제가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세계화든 대안세계화든 저마다의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곤란한 문제는 ‘전체의 세계화’를 창조해낼 수 있는 상상력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앞으로 창조해가야 한다는 점에서 현재적인 주제는 아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어떤 세계를 새롭게 만들고자 하느냐가 문제인데요. 돌이켜보면 가까운 근대에 실제적인 문제인식과 추동과정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번 회의에서 선생님은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도정에서 그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신 것 같습니다. 핵심적으로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당과 국가가 일원화된 체제를 이룬 문제가 발생했고, 그 당대적 귀결로서 자본주의로의 방향전환을 이루었다면, 거기서 어떤 성찰적 가능성을 찾아내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왕 두 가지 상황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월딩이라는 말에는 현재의 전지구화가 인류의 방향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의 상식이 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공식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공식이 이미 형성되었거나 형성되는 과정이라면, 우리의 사상 작업은 이 상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 문제로 삼아야 합니다. 전지구화의 좋은 점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전체를 부정할 수 있을까요? 단지 전지구화의 단점만 안다면 전지구화를 부정할 용기가 없게 되지요. 사실 다른 가능성을 찾아가는 문제라면 대부분 사실 이전의 사람들이 말했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고, 혹은 성공하지 못했으며, 물론 일부 새롭게 창조된 것이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중국의 혁명을 재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중국 사회주의의 경로를 단지 마오쩌둥의 길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 혁명 역량에는 마오와 중국공산당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사적 맥락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되고, 1940년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오의 노선, 중국공산당의 사회주의 건설과 그 실패는 결코 중국 혁명이 이런 모습만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과 사회실천이 다양하게 대두됐지만, 나중에 다양한 원인으로 은폐된 것입니다. 중국 혁명에 대해 좁게만 이해하는 사람은 현재의 독재와 빈곤을 낳은 중국 혁명을 혐오합니다. 그러나 중국 혁명에는 다양한 면모가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공헌을 포함해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본래의 의미를 회복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중국 혁명의 다양한 면모와 본래 의미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대동사상’(평등하고 평화로운 이상사회) 등의 전통을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가 등이 관건입니다.

둘째, 광의의 사회주의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각종각파의 혁명 역량은 공통된 입장이 있었는데, 자본주의에 대한 불만에 기인하여 사회주의가 대두된 것입니다. 중국의 사회주의는 중국전통, 불교, 고대사상 등에서 출발하여 서구의 사상과 결합했으며, 실천의 유형도 다양했지요.

왕샤오밍 중국 상하이대 교수는 이른바 ‘상하이문화연구’ 그룹을 대표하는 학자로 중국의 혁명 전통과 비판적 문화연구를 접합하는 시도를 해왔다. 백원담 교수 제공
현재적 의미로 사회주의의 문제의식을 들여다본다면, 최근에 추동되는 중국의 세계화 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도 검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중국의 ‘일대일로’는 전지구화의 대안이라기보다 전지구화 안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중국이 그리는 ‘팍스 아메리카나 이후의 팍스 시니카’, ‘팍스 실크로드’ 같은 ‘사회주의 국제주의’를 ‘대동사상’의 현재적 사회주의적 버전으로 재조명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반둥정신과 제3세계주의를 표방한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요.

전지구화 자본주의의 체계는 전체 등급화의 체계 문제이고, 실제 존재하는 체계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 국제주의’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국의 공산당 국가들이 형성한 전지구화 국제주의 체계이지만 그러나 처음부터 평등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 국제주의’ 전지구화 체계는 자본주의 체계의 불평등 관계와 동일했다고 봅니다. 반둥회의(아시아?아프리카 회의, 1955)는 실제로 유일하게 존재했던, 비교적 평등한 전지구화의 협력과 연합 방안이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국제주의’보다 더 평등한 전지구화 체계라고 봅니다. 다양한 국가가 참가했고, 소련과 미국을 배제했습니다.

‘일대일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지구화 자본주의의 새로운 버전입니다. ‘사회주의 국제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새로운 버전으로 동력이 다를 뿐, 주된 목적은 전지구화 자본주의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가능성이 있을까? 공개적으로 발표한 개념으로 봤을 때, 반둥정신의 계승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평등하고 호혜적인 관계 건립을 지향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관건은 중국 정부가 국제관계에서 진정한 평등관계 형성과 중국 내에서 인민들이 평등한 경제체제를 건립할 수 있느냐 입니다. 자본주의의 엔진이 되지 않기를, 또 반둥정신으로 나아가길 바라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지난 12월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일대일로’ 회의에 왕선생님과 함께 참석한 바 있었지요. 거기서 제가 대만에서는 경제적으로, 홍콩에서는 정치적으로 충돌이 야기되었는데 중국 대륙이 이러한 문제에 대응한 과정을 성찰하지 않으면 ‘일대일로’의 추동 계획에 대한 국제적 신뢰 획득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실제로 중국의 입장에서 다른 세계화의 가능성을 연다고 했을 때 대만과 홍콩의 문제는 가장 걸림돌이 아닌가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현재의 국가 대 지역, 국가 대 국가의 문제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경쟁과 이익의 관계인가. 경쟁의 관계일 때는 야만, 밀림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런 상태일 때 사회는 두려운 상황에 직면하지요. 현재의 문제는 국제관계에서 대외적인 관계와 대내적인 관계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국내에서도 약육강식, 국외에서도 약육강식, 그렇게 일치하는 국가도 존재하지요. 다른 상황은, 국내는 완전히 약육강식은 아닌 평형상태이지만 그러나 국제적으로는 약육강식인 제국주의의 사례 혹은 미국의 사례가 있습니다.

강대국이 기타 국가와 교류할 때, 이익에서 출발한다면 상대를 압박합니다. 사실 일국 내에서 상대적으로 평등한 사회 상황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보다 어려운 것은 국제적으로 평등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지요. 왜 어려운가? 전지구적 정치가 도의를 우선으로 하는가,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현재의 문제는 이익이 우선하는 현상이 지배적입니다. 따라서 경제를 위주로 수입, 세수, 취업률 등을 따지게 되지요. 따라서 정치가 어떻게 도의를 논하는 방면으로 되돌아갈 것인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의로 돌아가기 힘든 현실이지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새롭게 전인류의 공통 이익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인류의 공통의 이익은 지속적으로 위축되어 왔고, 이 때문에 지금은 고난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원래 ‘미국 우선’(아메리칸 퍼스트)은 공개적으로 말해선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를 입 밖으로 말했고, 그에 따라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문제입니다.

촛불항쟁 이후 한국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관방언론은 개인적으로 잘 안 보는데 관방매체의 각도에서 보자면 정치의 변화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로 인해 불협화음이 나고 있지만, 사실 박근혜 전 정권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가 사드 이후 급변한 것이지요.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변화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되는 것 같습니다. 민간의 관점 또한 유사합니다.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국의 지식계는 분화가 심하고 일치된 관점이 없습니다. 내가 찬성하는 관점은 중한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가의 각도가 아니라 전지구적 정치의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전지구적인 정치 도태 현상이 극심합니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만 돌보는 상황에서, 대다수 민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정치변혁을 가져온 한국의 정치 변화는 전체적인 조류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가장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중국이 사회주의를 거쳐오면서 내재화된 것이 있는데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민중들의 지향이 그것입니다. 한국의 방향은 중국 대다수 국민들 내에서 유통되는 관점의 측면에서 동의되는 바가 있습니다.

그 말씀은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새로운 지구화의 경로를 월딩이라고 개념화한다면, 그 사회적 기초는 사실상 각기 살아온 기반에서 획득된 평등과 평화의 경험이고, 그것이 사회의 방향타를 이루어나가는 구체적인 실천과정에 있을 것입니다. 다만 한국 사회의 경우 이번 촛불행동 과정에서 광장 평의회와 시민의회의 추구 등 직접 민주주의 요구가 대두되었고, 그것이 오늘의 한국 사회를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재정위하는 ‘사회국가’의 형태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다고 봅니다. 특히 촛불행동에서 ‘페미광장’이나 소수자 등이 정치적으로 등장한 것은 의미가 크지요.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흐름이 일국적인 경로 안에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가 이미 노동이주나 결혼에 의한 이주, 문화교통 등 인종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혼종이 일어난 지 오래이지만 사실상 이번 촛불행동에서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촛불항쟁은 또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인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타이완과 홍콩, 일본에서 일어난 해바라기운동, 우산혁명, 반안보법제운동, 또 인도네시아의 농지점거투쟁 등과의 연쇄적인 맥락 속에서 아시아적 함의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동아시아연구소 소장)는 비판적·실천적 문화연구자로, 인터아시아문화연구 활동 등 국경을 넘어서는 대안적인 학술활동에 매진해왔다. 백원담 교수 제공
한국에서 50년대 이후 특히 70년대 이후 그리고 현재 한국 민중의 정치성숙의 정도는 놀랄만한 것입니다. 이는 한국사회의 반세기 동안 사회운동과 정치변혁 간의 밀접한 상호관계의 결과라고 봅니다. 이런 과정에서 배양된 민중의 정치적 성숙과 중국의 상황은 상대적으로 차이가 많습니다. 중국에도 사회적 현상으로 분출하는 방식의 정치사회운동이 존재합니다. 전국적인 규모도 있고 국부적인 운동도 있지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국부적인 운동의 경우가 많고, 문화적 정치적인 것은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난 바 있습니다. 문제는 그 사후의 성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중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중국의 정치적인 주체는 당이 대표하고 있고, 국회에 해당하는 전국인민의회의 경우에도 노동자농민 대표가 5분의 1 선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대표성 정치가 결여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 민주의 문제가 많이 지적되는데 현재의 당-국가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하기는 힘들지 않은가 합니다. 다만 최근 ‘촌민선거’ 등과 같이 아래로부터 정치적 민주화의 경험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현재 중국의 국가 정치가 혁명정치라 할 수 있는가 물어야 합니다. 혁명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이 현단계 국가의 방향이라고 봅니다. 70년대 혹은 80년대는 혁명을 위한 정치라고 할 수 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지요. 둘째, 국가의 정치 주체는 혁명당인가? 만약 그렇다면 당은 무슨 당인가? 혁명정치는 불혁명정치가 되었고, 당·국가 중심의 정치를 통해 중국 특색의 국가로 변화된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두번째 문제는 중국은 집권주의 체계인데, 이 상황에서 국가가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이겠지요.

사회진보는 두 개의 노선이 있는데 하나는 국가-제도적인 정치역량이고 이 역량을 장악하여 사회를 추동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 상관없이 사회가 전진하여, 사회가 국가-제도적인 역량에 압력을 가하여 사회의 요구대로 추진하고 사회가 국가를 강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회가 제도에 압력에 가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첫 번째도 필요합니다. 중국의 경우, 새로운 국가-제도적인 역량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진보적인 역량이 국가기구를 장악한 이후에 국가기구를 반드시 변화시켜야 하며, 그렇지 못한다면 많은 것이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백선생님이 이번 발표에서 최근 한국 사회의 변화를 사회가 국가를 추동하는 상황으로 정리하고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사회 중심으로 재정위한 ‘사회국가’ 개념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사회가 국가에 진입하여 국가의 본성을 변화시켜야 하며, 변화 이후에는 사회 압력이 크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진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경우 사회와 국가의 관계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사회와 국가가 양립불가능하다는 것이 지식인의 관념입니다. 한국에서는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진보적인 역량이 정권을 잡고 난 뒤 사회와 연결하여 제도적으로 점차적으로 국가를 변화할 수 있다면, 정말 큰 의미가 있고 세계적으로 공헌할 것입니다.

중국에서 국가와 당의 관계는 거의 실패 사례라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서구의 사례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또한 문제입니다. 서구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에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사실상 존재합니다. 50~60년대의 경우 분산적으로 파편적으로 사회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 국가 세포 속에 끼어들어가 있었던 것이지요. 1950~80년대 중국 국가와 사회에는 두 가지 상황이 출현했습니다. 국가가 사회의 구조(골격구조)에 스며들어간 것이고 정부가 사회를 충당한 것으로 독립적인 사회체계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구조가 사회의 구조였고, 사회는 파편화된 형식으로 국가의 내부에 존재한 것이지요. 국가와 사회의 충돌은 국가 내부의 충돌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는 정치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실패했습니다. 당-국가 체계에서, 제도의 안배 차원에서, 최후의 결과는 실패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새롭게 정치의 체계, 구조를 만들어낼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관건은 혁명역량이 새로운 국가기구를 장악한 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는 문재인 정권 역시 성립된 뒤 대면한 문제일 것입니다. 국가가 사회개조를 통해 효과를 드러낼 때 중국의 사례는 실패했지만 한국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인류의 관점에서 한국사회의 이런 경험을 어떻게 상호 연결하여 전체적으로 대면하고 대응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작년에 베이징에 있는 ‘노동자의 집’(工人之家)을 방문한 경험이 있습니다. ‘농민공’(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는 노동자)을 ‘신노동자’라고 명명하고 공동생활의 공간으로 생성시킨 그곳에서 저는 중국에서의 어떤 사회성 회복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놀라왔던 것은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농민공들을 ‘신노동자’라 부르며 단체를 이루어 공통의 요구를 조직하고 권리찾기 활동을 하는 것을 경계할 법한데, 오히려 그곳 촌민위원회와 현정부, 촌민사회에서는 노동자대학 등의 활동을 지지하고 싼값에 대지를 제공하고 활동을 보장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21세기 중국에서 이전 소비에트 해방구 경험이 재현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중요성은 전지구화 자본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과거의 자본주의의 발전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 체계 바깥의 사람을 내부화하는 것이지만 현재는 상반된 경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원래 체계 내부의 사람을 외부로 쫓아내고 고정된 안정된 작업단위를 불안정하게 하는데, 이것이 전지구화의 상황입니다. 중국에서도 그러한 경향은 뚜렷하지요. 중국에는 3억여명의 ‘신노동자’가 있습니다. 일자리가 2억개로 줄어들면, 1억 노동자는 자본주의 체계 바깥으로 밀려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유일한 방법은 자기가 자기를 구제하는 방법밖에 없겠지요. ‘노동자의 집’은 바로 이것에 착안한 것입니다. 자기 구제의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의 새로운 상황에 사회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중국의 혁명은 역사적 과정이고, 그것이 낳은 중요한 유산은 바로 평등에 대한 관념입니다. 현재까지도 많은 중국인은 불평등이라는 개념을 수용하지 못하지요. 현실적으로는 불평등이 존재하더라도 관념적으로는 수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 착취와 억압 개념도 수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회주의의 경험은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문제들에 반응하도록 신체에 각인해놓았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의 제안은 중국 현지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으면 합니다. 실제로 새로운 꼬뮨적 공동체의 지향이 일어나는 곳을 조사하고 구체적인 논의를 해나갔으면 합니다. 우리가 함께 진행하고자 하는 새로운 다원평등한 아시아의 정향을 위해 사상 자원과 실천 경험들을 확인하는 작업은 그러한 실제적인 사회 현장에서 구체적인 의제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문제는 새로운 지구화의 사상적·실천적 기초를 어떻게 연계·연대·연합할 것인가, 어떤 큰 뜻을 가지고 전체적인 구도에서 실천해나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사회성을 회복하는 속도가 아주 빠른 시점입니다. 우리가 주제로 다룬 ‘월딩’의 기초는 이런 전향적인 현실 속에서 찾아내야겠죠.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번역·정리 박자영 협성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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