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10 16:57
수정 : 2019.11.11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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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페터르스 감독의 <더 컨덕터>는 1930년대에 베를린·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여성으로선 처음 지휘한 입지전적 음악가 안토니아 브리코를 다룬 영화다. 무비앤아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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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지휘봉을 들면 흉하지 않겠어?”
여성 최초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
반대·비난·야유 극복한 삶 영화로
지휘봉 쟁취 위한 90년 투쟁 낱낱이
“기삿거리가 되지 않는 세상, 오고 있다”
편견에 5년 공백기 겪은 김경희 교수
차별 딛고 국내 첫 여성 상임지휘자로
성시연·김은선·장한나, 세계 무대 누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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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페터르스 감독의 <더 컨덕터>는 1930년대에 베를린·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여성으로선 처음 지휘한 입지전적 음악가 안토니아 브리코를 다룬 영화다. 무비앤아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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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지휘를 할 수 없어. 이끌 수가 없으니까.”
피아노 수업을 하던 남자 교수가 ‘지휘자가 되겠다’는 여성 제자의 꿈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오는 14일 개봉하는 영화 <더 컨덕터>의 한 장면이다. 이 단검처럼 짧은 말에는 오랫동안 여성이 지휘봉을 쥐기를 허락하지 않은 클래식 음악계의 여성혐오가 녹아 있다.
<더 컨덕터>는 1930년대 여성으로선 처음 베를린·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안토니아 브리코의 삶을 다룬 영화다. 영화는 브리코가 지휘자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가족의 반대, 연인의 만류, 사회적 비난과 야유를 극복하고 지휘봉을 쟁취해내는 과정을 담았다. 교수는 “여자가 손에 봉을 들고 남자들 앞에서 요란한 몸짓을 한다? 흉하지 않겠어? 난 네가 예뻐 보였으면 좋겠어”라며 성추행을 시도하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브리코를 가해자로 몰아 학교를 그만두게 만든다. 브리코보다 앞서 지휘대에 오른 또 다른 여성 지휘자는 보통 수준의 연주를 했는데도 관객이 공연 중 야유하고 환불을 요구하며 난장판을 벌인다. 영화 마지막 문구는, 정도는 달라졌어도 여전히 여성 지휘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음악전문지 <그라모폰>이 2017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 50명을 뽑았지만 여성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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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향의 첫 여성 지휘자이자 현재 국내에서 유일한 상임지휘자인 김경희 숙명여대 교수. 김경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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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지휘자에게 불만 품는 남성 단원 여성 지휘자는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김경희(60) 전주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숙명여대 음대 교수)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엄청나게 심했던 시대에 도전정신만으로 지휘의 세계에 뛰어든 브리코를 보며 공감한 부분이 많았다”고 했다. 지난 5일 이 영화를 본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기도 한 김 교수는 브리코가 나온 베를린 국립음대를 졸업하고 지휘자로 데뷔한 지 18년 만인 2007년 과천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를 맡으며 국내 최초의 여성 상임지휘자가 됐다.
그 또한 여성이란 이유로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 적지 않다. “과천시향을 그만두고 다른 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려고 했을 때였다. 시범 지휘를 잘 마쳤는데도 ‘지휘자는 남자여야 한다’는 일부 단원의 반대로 무산됐다.” 결국 지난 3월 전주시향에 취임하기까지 5년의 공백을 보내야 했다. 그가 부산시향에 객원지휘를 하러 갔을 땐, 한 단원이 곁을 지나가며 “여자 지휘를 다 받고, 별꼴을 다 보겠네”라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한 중견 음악가는 그에게 “여자가 지휘대에 서면 수많은 사람 앞에 벌거벗고 선 기분일 거 같은데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편견으로 여성을 보는 이들과는 논쟁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음악으로 보여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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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출신의 미르가 그라지니테틸라는 2016년 29살 나이로 사이먼 래틀과 안드리스 넬손스 같은 명지휘자들이 거쳐간 영국 버밍엄시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에 임명돼 일약 클래식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출처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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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페라 지휘는 더 벽 높아 여성 지휘자들은 현재 클래식 음악계의 ‘유리천장’을 얼마큼이나 깼을까. 영남대 기악과 교수인 백윤학 지휘자는 “객원지휘를 하는 여성 지휘자는 많지만, 중요한 것은 상임지휘자나 음악감독을 맡느냐는 것이다. 이 자리에 올라야만 오케스트라를 자신의 ‘악기’ 삼아 추구하는 음악을 할 수 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건 확실하다”고 말했다. 백 지휘자는 현존하는 여성 지휘자 중 가장 인정받는 이들로 조앤 펄레타(65), 마린 올솝(63), 시몬 영(58)을 꼽았다. 펄레타는 1999년 버펄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아, 미국 유력 악단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이 됐다. 올솝은 볼티모어(2007~)와 상파울루 심포니 오케스트라(2012~) 역사상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이다. 영은 2005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첫 여성 지휘자로 2005~2015년 함부르크 주립 오페라단과 함부르크 주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동시에 이끌었다.
젊은 지휘자 중에선 미르가 그라지니테틸라(33)가 주목할 만하다. 그는 2016년 29살 나이로 사이먼 래틀 같은 명지휘자들이 거쳐간 영국 버밍엄시 심포니 오케스트라(CBSO) 음악감독에 임명돼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오페라 지휘는 오케스트라 지휘보다 차별의 벽이 더 높다. 백 지휘자는 “여성 지휘자가 오페라에 가장 적고, 그다음 오케스트라, 합창으로 갈수록 늘어난다. 합창단은 성악가들만 있지만, 오케스트라는 다양한 악기 연주자가 모여 있고, 오페라는 오케스트라에 성악가들까지 지휘해야 하니 더욱 강력한 통솔력이 필요하다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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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당시의 성시연 지휘자. 경기문화의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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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선 지휘자. 출처 김은선 개인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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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신동’으로 잘 알려진 장한나 지휘자는 카타르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를 거쳐, 2017년부터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이자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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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차세대, 성시연·김은선·장한나 한국의 젊은 지휘자 세대에선 여성 골퍼들이 그렇듯 남성보다 여성들이 세계 무대에서 더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주목받는 젊은 여성 지휘자로는 성시연(43), 김은선(39), 장한나(37)가 있다. 성시연은 2014~2017년 경기필하모닉 상임지휘자를 역임한 후 현재는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은선은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 오페라극장 부지휘자(2008~2010)로 지휘봉을 잡았고,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단을 지휘하는 등 주로 오페라에서 경력을 쌓고 있다. ‘첼로 신동’ 장한나는 카타르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를 거쳐, 2017년부터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오는 13일 자신이 이끄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 공연을 한다.
지휘대를 둘러싼 성차별의 벽은 여전히 높지만, 여성 지휘자 지망생들의 거침없는 걸음을 막지는 못한다. 지난 2월 김경희 교수가 한국지휘자협회 회장일 당시 지휘자 지망생을 대상으로 지휘자 캠프를 열었을 때, 참가자 절반이 여성이었다. 김 교수는 “여성 지휘자가 기삿거리가 되지 않는 세상이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오고 있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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