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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05 19:13 수정 : 2019.11.06 13:37

【짬】 자전 에세이집 낸 이종열 조율사

이종열 조율사는 서울 예술의전당 소속이지만 보수는 연주자에게 받는다. “대개 기획사로부터 받죠. 여기 피아노는 평소 관리가 잘 돼 있어 많이 받지 않아요. 대학 피아노를 조율하거나 할 때는 더 많이 받죠.”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는 기자에게 그는 “즐거웠다. 질문이 좋았다”고 손을 흔들었다. 인터뷰 내내 기자도 즐거웠다. 어릴 적 열정과 순수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노년이 베푸는 아름다움과 향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성만 선임기자

올해 만 81살인 이종열 조율사는 서울 예술의전당에 자신의 방을 가지고 있다. 출입문 오른쪽에는 조율사, 왼쪽은 대한민국 명장이라고 쓰인 패가 붙어 있다. 그는 2007년에 대한민국 피아노조율부문 명장 1호로 뽑혔다. “방은 십여 년 전에 생겼어요. 공연 때는 이르면 오전 7시에 나오는데 전에는 공연장 복도나 아니면 바깥에 돗자리를 깔고 기다렸어요.”

지금은 없어진 수도 피아노 사에서 1963년부터 조율사로 일했으니 올해로 조율인생 56년이다. 공연장 피아노 조율만 4만1천회 이상 했단다. 1980년부터 15년 동안 세종문화회관 전속 조율사로 일했고 1995년부터는 서울 예술의전당 수석조율사로 있다. 롯데콘서트홀 수석조율사도 2년 전부터 겸하고 있다. “공연이 겹칠 수 있어 고사했는데 롯데 쪽에서 간곡히 요청했어요. 백혜선 피아니스트가 (롯데 쪽에) 제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더군요.”

최근 에세이집 <조율의 시간>(민음사)을 낸 이 조율사를 1일 서울 예술의전당 사무실에서 만났다.

<조율의 시간> 표지.
이력이 말하듯 그는 대한민국 최고 조율사다. 피아노가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도록 만드는 데 그를 넘어설 이가 국내에선 없다는 얘기다. 놀라운 것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그렇다는 것이다. “조율은 청각, 시각, 촉각으로 해요. 나이를 먹었지만 지금도 (세 감각이) 괜찮아요.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합니다. 술도 한 자리에서 딱 맥주 반 잔만 먹죠. 30대 중반까지는 꽤 먹었어요. 근데 술 먹은 다음날에는 소리가 좀 멀리 들려요. 그 뒤로는 술을 멀리했죠.”

책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일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일에 미친 것 같다.” “이제 겨우 기술이 쓸 만한데 여든이 되었다”고도 했다. 그는 한 달 전 직접 만들었다는 작은 공구 하나를 꺼냈다. ‘뮤트’란다. “지금도 일하다 보면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조율 방법이 떠올라요. 피아노 건반 하나에는 줄 셋이 있어요. 이 뮤트를 가운뎃줄에 놓으면 그 줄은 고정하고 양쪽 줄만 움직일 수 있어요. 이것으로 전에는 못 하던 조율을 하게 되었죠.” 말을 이었다. “세 줄의 진동수가 같으면 맥놀이(주파수가 비슷한 두 개 파동이 간섭을 일으켜 새로운 합성파가 만들어지는 현상)를 안 일으킵니다. 소리는 깨끗하지만 생동감이 없어요. 답답하죠. 소리는 회오리바람처럼 살아 움직여야 아름다워요. 그래서 세 줄의 진동수에 미세한 변화를 줍니다. 한 개가 100이면 다른 두 개는 0.5나 0.1을 더해요.” 자신의 귀로 진동수의 0.1 단위까지 식별이 가능하단다. “기계로는 0.2까지만 됩니다. 조율은 귀로 하는 겁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피아노 옆에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끊임없이 공구로 피아노 내부를 매만졌다. “이 피아노가 2억5천만원입니다. 늘 최선의 상태로 유지해야죠.”

가끔 음대 콘서트홀 피아노를 조율하면 꼭 다음날 병원 신세를 진단다. “상당히 유명한 연주자가 공연하면 대학 쪽에서 나를 불러요. 대학은 여기처럼 전문연주자가 매번 공연하는 곳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길면 8시간까지 하죠. 체력이 완전 바닥이 나요. 연주자가 만져 보고 이런저런 주문을 하기 전에 미리 완벽하게 조율하는 거죠. 조율은 육체노동이면서 정신노동입니다. 소리를 듣고 음악적으로 좋은지 판단하고 처방을 내야 하죠.”

2003년 폴란드 출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첫 내한 공연은 아마도 그를 가장 흥분시킨 공연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조율한 피아노로 예술의전당 공연을 마치고 지메르만은 2400명 관객에게 “미스터 리에게 감사한다. 완벽한 조율로 피아노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주었다”고 인사했다. 해외 공연마다 자신의 피아노를 공수해오고 전속 조율사까지 대동하는 “지구 최강의 까다로운 연주자”가 공개적으로 그를 추켜세운 것이다.

이 조율사의 사무실에 있는 조율 공구 가방.

위가 이 조율사가 최근 만든 새 조율 공구다. 건반의 세 줄 가운데 가운뎃줄만 고정시킬 수 있다.
조율사로 가장 행복한 순간은? “못된 목수가 연장 나무라는 경우가 있어요. 한 연주자가 공연을 앞두고 건반이 연타가 잘 안 된다고 조율사를 찾아요. 건반이 무겁다는 거죠. 옆에서 보니 그 연주자 손가락 놀림에 문제가 있어요. 손가락을 눕혀 치더군요. 여기 피아노는 국제표준에 맞춰 성능이 완벽해요. 하지만 한 시간 뒤 연주라 잔뜩 긴장하고 있는 연주자에게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할 순 없어요. 국제표준을 무시하고 건반 깊이를 10㎜에서 9.75㎜로 낮추고 스프링도 조금 강하게 조정합니다. 공연 다음 날 그 연주자한테 카톡이 와요. 어제 그 건반 어떻게 만졌냐고요. 너무 편하게 연주했다고요. 그럴 때 보람을 느끼죠.”

조율인생의 뿌리는 조부에게로 내려간다. “할아버지가 대나무로 단소를 직접 만들어 불었어요. 시조창을 전문가 수준으로 잘하셨죠. 포플러 나무로 장구도 직접 만드셨고요. 저도 옆에서 보고 배워 단소를 만들었어요.” 손자는 궁상각치우 국악 음계만 나오는 할아버지 단소와 다르게 서양 음계가 다 나오게 만들었다. 구멍을 뚫으며 음을 확인하고 위쪽으로 구멍을 넓혀 음을 높이기도 했단다. 조율의 시작이다.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부문 명장 1호’

1963년부터 공연장 조율만 4만1천회

81살 현역 생생한 경험 ‘조율의 시간’

조부한테 단소 배워 소리의 세계 입문

“컴퓨터 못 찾는 미세 진동수 귀로 식별”

최근 직접 조율공구 ‘뮤트’도 고안해

63년 전인 고3 때는 직접 조율의 세계에 들어섰다. 옆 동네 교회에서 풍금을 만난 게 계기였다. “단소 가락만 듣다가 풍금이 만드는 화음의 세계를 만나니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었죠.” 학교를 마치면 바로 교회로 직행해 저녁 끼니도 거르고 새벽 1시까지 풍금을 쳤단다. 독학으로 연주법을 읽히고는 풍금 뚜껑을 열고 이것저것 건드리다 그렇게 하면 소리가 변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거금을 주고 일본어 조율 책까지 주문했단다. “풍금 내부를 만지다 도저히 답을 찾지 못한 불협화음 문제에 맞닥뜨렸죠. 그 책을 읽으려고 일본어 교재까지 사서 독학으로 일본어도 배웠죠. 책을 봤더니 제가 엉터리로 한 조율이 예전에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이 한 방식(순정률 조율)이더군요.”

한국에는 피아노 조율사가 600명가량 있지만, 100명 정도만 “살아남은 상태”라고 했다. 피아노가 급격하게 줄고 있어서다. “세계적인 추세이죠. 중국만 1970년대 한국처럼 막 피아노를 사들이고 있어요. 제가 60년대부터 조율하며 보니 먼저 별표전축 붐이 불더군요. 그 뒤를 흑백티브이가 이었고 다음이 피아노였어요. 응접실이 허전하니 하나씩 갖다 놓았죠. 그때는 이웃집에 피아노 소리가 나도 안 싸웠어요.”

그는 71년에 회사를 나와 79년까지 프리 조율사로 일했다. “퇴사할 때 제 월급이 4만원이었고 부수입은 25만원가량 됐죠. 하루에 회사 일로 4대, 개인적으로 4대씩 봐줬어요. 과로로 위장병이 생기기도 했죠. 그런데 79년 10·26이 터진 뒤 조율 일거리가 딱 끊기더군요. 풍악도 배부를 때 울린다는 옛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 무렵 시간을 내어 운전면허를 땄어요.”

요즘은 공연을 직접 관람하지 않는단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일할 때는 처음 10년 정도 직접 봤어요. 기획사에 요구하면 언제든 특석에서 볼 수 있지만 안 들어갑니다.” 왜? “연주자가 실수할까 봐서죠. 연주자가 곡을 까먹거나 손이 돌아가지 않아 연주를 딱 멈춰버리는 큰 실수를 하는 모습을 본 뒤로는 객석에 안 가요. 연주자 마음이 얼마나 콩닥거렸을까, 안타까웠죠. 보는 내 마음이 힘들었어요.”

이종열 조율사. 강성만 선임기자

현재 공기업에 다니는 그의 아들도 조율사 자격증이 있다. “요즘에는 아들이 저를 부러워해요. 정년이 없다고요. 아들이 고등학생일 때 나한테 미래에는 전자기술이 발달해 조율사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죠. 그때 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연주 중 피아노 건반이 쑥 들어가 안 올라오면 기계가 고칠 수 있냐고요. 소리의 아름다움은 절대 기계가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했죠. 사람의 귀로만 가능해요.”

8남매의 둘째이자 장남인 그는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고교 시절을 더 자유롭게 보낼 수 있었단다. 대학 졸업장이 없어 불편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고개를 저었다. “전혀 없어요. 3년 전에 이런 일은 있었죠. 요즘 음악대에 피아노 구조학 과목이 있어요. 저한테 한 학기에 몇 시간 강의해달라고 해요. 내가 조율 시간이 불규칙해 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다른 조율사를 소개해줬어요. 나중에 들으니 대학에서 그 친구한테 대학 졸업장이 있냐고 물었다고 해요. 장인이 왜 학벌이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가장 좋아하는 곡은? “집에 레코드가 800장가량 있는데 다 피아노가 들어간 곡입니다. 피아노 없는 음악은 지루해요. 모차르트나 쇼팽을 가장 좋아해요. 제 성격처럼 아기자기하고 화려하고 예쁜 곡을 좋아합니다. 피아노 연주자는 잉그리드 헤블러나 알프레드 브렌델을 좋아해요. 헤블러는 두 번 만났어요. 브렌델은 한국에 안 왔죠. 지메르만처럼 엄청 까다롭다고 들었어요.”

‘조율의 시간’은 언제까지 갈 것인지 묻자 그는 “제자들이 절대 일을 놓지 말라고 하더군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집에만 있으면 일어나기 싫어 계속 누워 있어요. 허허.”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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