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9.24 17:33
수정 : 2019.09.25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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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켜이 포갠 종이 더미에 구덩이를 파고 연필을 꽂은 근작 <미디어아트 연구> 앞에서 설명 중인 한계륜 작가. “나의 연필이 블랙홀을 타고 왜소행성 에리스로 휙 간다는 상상을 표현한 미디어아트 작품”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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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소행성 에리스에 대한 관심으로
테크놀로지 기반 미디어아트 틀 깨고
전통적 미술도구 이용 상상력 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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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켜이 포갠 종이 더미에 구덩이를 파고 연필을 꽂은 근작 <미디어아트 연구> 앞에서 설명 중인 한계륜 작가. “나의 연필이 블랙홀을 타고 왜소행성 에리스로 휙 간다는 상상을 표현한 미디어아트 작품”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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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아트란 무엇일까. 미술계에선 매체미술이란 어려운 말로 풀이한다. 하지만 거장 백남준의 작품에서 보이듯, 티브이 예술, 비디오아트란 용어와도 종종 뒤섞여 쓰인다. 뭉뚱그리면 미술가의 전통적 도구인 붓과 조각도 대신 영상 같은 매체를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20세기 이후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의 디지털 기술로 만든 첨단 영상예술이 미디어아트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흐름도 보인다.
국내 미디어아티스트 가운데 몽상가로 소문난 한계륜 작가는 테크놀로지에 바탕한 미디어아트의 기본 전제를 단연코 거부한다. 대신 그는 연필과 종이 뭉치로 미디어아트의 상상력을 이야기한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밤부갤러리에 차린 작가의 근작전 ‘에리스를 그리다’(29일까지)에는 수백쪽이 켜켜이 쌓인 종이 뭉치에 우묵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쪽에 연필을 쿡 꽂은 작품이 ‘미디어아트 연구’라는 제목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이 작품이 왜 미디어아트인지에 대해 설명하기보다 동심의 상상력이 엿보이는 동문서답을 내놓는다. “종이 뭉치의 구덩이는 2000년대 발견된 태양계 외곽의 왜소행성 에리스로 통하는 블랙홀 같은 겁니다. 거기에 꽂힌 연필은 그 별로 가는 로켓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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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영상 작품 <파랑의 승리>. 연필에 노랑, 파랑 색상이 주로 칠해지게 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영상 텍스트가 연필심 모양의 노랗고 파란 패널 형상에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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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명왕성과 거의 크기가 같아 명왕성을 태양계 행성의 지위에서 끌어내리는 계기로 작용했지만, 정작 에리스 자체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작가는 수년 전 그 소외된 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연민과 관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2016년부터 이미 두차례 에리스 행성을 찾아간 가상의 여행을 소재로 상상의 미디어아트 전시를 벌여왔다. 연필과 종이, 단순한 조형물을 활용해 그는 마치 소설 <어린 왕자>처럼 에리스 행성에 갇힌 여행자와 거기 사는 가상의 생물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종이와 연필 외에도 휴지에 영상을 투사해 별에 사는 생물을 묘사하고, ‘나는 그 별에 가지 않았다’는 자신의 독백을 풀어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보여지는 작가의 개념틀은 여러모로 특이하다. 종이에 연필로 드로잉을 할 때 작품 표기를 ‘종이에 연필’이라고 하는데, 작가는 이런 드로잉을 실제 수백쪽의 종이 뭉치 안에 꼭 맞추듯 수십개의 연필 몸체를 끼워 넣는 물리적 행위로 해석해 내놓는다. 지나치게 추상화한 테크놀로지 담론에 짓눌리거나 영상 매체 등에 형식을 제약받는 미디어아트의 본령을 새롭게 고민해보는 작업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를 보고 나서 전시장이 자리한 밤부타워의 옥상으로 나가면 루프탑에서 서울 전경을 감상하는 체험도 할 수 있다. 전시는 29일까지. (02)6918-8222.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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