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전시개막 행사 때 전시장 바깥에서 관객들을 맞은 양혜규 작가. 얼굴 언저리에 검은색 페인팅을 하고 나타난 그는 묵언수행 하듯 일체 말을 하지 않고 입술만 웅얼거리는 기행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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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같은 자태로 나타난 작가
묵언수행 하듯 웅얼거리는 기행
예사롭지 않은 퍼포먼스 펼쳐
3일 전시개막 행사 때 전시장 바깥에서 관객들을 맞은 양혜규 작가. 얼굴 언저리에 검은색 페인팅을 하고 나타난 그는 묵언수행 하듯 일체 말을 하지 않고 입술만 웅얼거리는 기행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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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 작가의 개인전이 차려진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케이3 전시장. 짚풀 무더기와 무언가가 불타는 모습, 우주의 웜홀, 방울 따위가 뒤섞인 벽면의 월 프린팅이 눈에 들어온다. 바닥에는 짐볼들이 깔렸고, 블라인드 구조물, 구슬이 장식된 구체 조형물 등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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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 미술 벗어난 전위 공간으로
개인의 역사와 시간 자유롭게 펼쳐 전시장에 들어가면 그의 퍼포먼스를 대략 이해할 법도 하다. 입구에는 1982년 나온 대중가수 민해경의 노래 `서기 2000년’이 울려 퍼진다. 2000년이 되면 모든 꿈이 이뤄지고, 전쟁도 없고 끝없이 즐거운 세상이 온다는 가사 내용이 `사바사바~’란 후렴구와 함께 나왔다. 현관에는 작가가 일곱살 때 동생들과 함께 그렸다는 동심의 그림 <보물선>의 복제 이미지가 내걸렸고, 뒤이어 내부로 들어가면 혼돈스러운 기억과 연상의 이미지, 소리의 스펙터클이 펼쳐진다. 짚풀 무더기와 불타는 모습, 로봇의 작업 광경, 양파쪽, 방울 따위가 뒤섞인 사방 벽면의 월 프린팅이 우선 눈길을 휘감는다. 바닥에 엉덩이를 내리깔고 앉으면, 땅의 향기를 풍기며 굴러가는 짐볼이 깔려 있다. 작가의 등록상표이자, 추상 거장 솔 르윗에 대한 헌정 작품으로 유명해진 블라인드 구조물이 바퀴를 단 채 관객들의 손에 의해 움직이며, 양 작가의 또다른 대표적인 방울 달린 구 조형물이 천장에서 늘어뜨린 줄에 매달려 있다. 모두 한결같이 손을 대거나 냄새를 맡고 직접적으로 오감을 움직여 접할 수 있는 작품들이지만, 일단 이미지가 과밀한 느낌으로 가득해 보고 생각할 여지 없이 눈에 우선 주워담게 된다. 국내 상업화랑에서 치르는 첫 전시인 `서기 2000년이 오면’은 양혜규가 국제미술계에서 20년 넘게 보폭을 넓혀온 스타임을 과시하는 동시에, 대표 출품작을 팔기 위한 쇼룸의 성격도 지닌다. 작가가 기획한 포장의 기술은 예사롭지 않다. 출품작들은 작년까지 서구에서 모두 전시하고 작업했던 것이지만, 민해경의 가요와 자신의 유년시절 그림, 대표작의 독특한 편집으로 전시장을 색다른 전위공간처럼 만들어놓았다. 세상의 온갖 이미지가 과잉된 감각으로 들어찬 월 프린팅은 남프랑스의 옥시타니아 지방(프로방스)의 이교도적 역사와 풍토에서 영감을 받고 작업했다는 근작들이다. 천장에서 늘어뜨린 각종 구슬장식과 날아다니는 드론들이 소란한 이미지와 사운드로 감각을 자극했다. 재기와 신비주의가 섞여 미지의 품격을 발휘하는 신비롭고도 요망한 스펙터클의 공간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작가가 추구해온 불가지론의 역사, 어렴풋이 느끼고 인지할 수는 있어도 실체는 알 수 없는 개인적 시간의 미스터리를 추체험하게 된다. 민해경의 1982년 노래가 황당하고 막연한 가사로 18년 뒤의 미래상을 꿈꾸며 불렀던 2000년이란 연대는 지금 시점에서 이미 19년이나 지나와버린 묵은 과거다. 1982년, 2000년, 2019년이란 기점 사이에서 작가는 개인의 접힌 역사와 시간을 이야기한다. 절제된 개념미술적 어법에 충실했던 그가 과잉과 충동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질적인 벽면 프린팅을 대표작들과 함께 자유롭게 펼쳐놓은 것은 이전 작업들과 다르게 비친다고 미술인들은 평한다. 작가는 내년 미국 뉴욕현대미술관(모마)·마이애미미술관, 영국 테이트세인트아이브스 분관 전시 등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모호함과 신비주의를 넘어 장년으로 가는 양혜규가 또다른 건너뛰기를 할 수 있을지 미술인들이 주시하고 있다. 11월17일까지.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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